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대련에서 내려 뤼순감옥으로 직행했다. 뤼순감옥은 우리 선열들의 피가 배어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안중근, 신채호, 이회영 같은 분들이 사형을 당하고, 또 옥사했다.
뤼순 감옥에는 물론 난방장치가 없다. 교화시설이 아니라 형벌 시설이라는 것을 보여주듯 감방은 좁고 남루했다. 죄수들은 노역을 해야 했는데, 일을 하러 갈 때는 무거운 쇠공이를 발목에 차고 끌고 다녀야 했다. 죄수들은 형틀에서 고문을 받기도 했다. 매일 죄수들이 죽어 나갔다. 사형을 받은 죄수들의 시신은 나무통에 통조림처럼 담겨 같은 죄수들에 의해 매장됐다.
나는 안중근 의사가 사형을 당한 시간을 기억하기로 했다.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 안중근은 그때 나이 서른두 살이었다. 너무 짧은 인생이었지만 그는 죽음 앞에서 의연했다.
안중근의 죽음을 기리면서 생각했다. 진리나 이상은 그것을 품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진리나 이상은 미래에 실현된다. 지금 우리는 안중근이 염원하던 독립된 나라에 살고 있다. 아직 통일되지 않았지만 안중근이 우리나라에 대해 품고 있던 이상은 머지않아 실현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나 이상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존중받고 존경받아야 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진리와 이상을 품은 사람들이 비현실적이라고 비난하기를 즐긴다. 꿈이나 꾼다는 것이다. 자기 꿈에 빠져, 사서 고생을 한다거나 그 사람 옆에 있으면 자기까지 불행해진다고도 한다. 바로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을 속물이라고 한다는 것을 당사자는 알지 못한다. 이 속물들의 인생조차 진리나 이상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빛을 쏘이고 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속물들은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자기 행복만을 추구할 수 있다.
단동은 옛날 이름이 안동이다. 중국에서 동쪽을 평안하게 한다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대련에서 버스로 네다섯 시간 거리. 이곳이 어디냐 하면,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신의주와 마주보고 있는 땅이라고 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일 년 전에도 뤼순을 거쳐 단동에 왔었건만, 올해 다시 어떤 견학단의 일원이 되어 똑같은 코스를 밟아온 것이다. 단동에는 지금 신도시 건설이 한창이다. 신의주 접경에 북한과 중국이 합작해서 무슨 단지인가를 조성하려 하고 있는데, 이런 흐름을 타고 부동산 경기가 뜨겁다고 한다. 심지어 서울 강남 아줌마들이 단동의 압록강변 쪽 전망 좋은 아파트들을 사들이고 있다고 한다.
나는 일제말기 몇 년을 단동과 남신의주에서 살았던 백석의 자취를 더듬었다. 함경북도 삼수라는 첩첩산중에 가서 몇 십 년을 살아내야 했던 백석. 그는 왜 북한에 남아 있었던 것일까? 그는 영문학을 공부하고 그렇게 여행과 방랑을 즐겼음에도 어째서 사회주의 이념의 땅에 남아 있겠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가 참으로 많이 후회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그리고 원치 않는 시를 쓰느니 차라리 돼지치기, 양치기로 평생을 보내려 했을 백석의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한 삶을 생각해 본다.
지금 백석의 도시 단동은 남북한 관계가 경색된 때를 틈타 북한 경제를 좌우해 나가는 중국의 정책이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생생히 보여준다. 남북한이 멀어지니 자연히 북한은 중국 영향권 내로 점점 더 깊숙이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곳에서 중국 기업가가 북한 쪽에 `오더`를 주면 북한 여러 지역의 공장들이 그 주문을 소화해서 가동된다. 북한은 공장 지을 돈이 없기 때문에 중국에서 공장을 지어주고 광물자원 같은 현물로 갚도록 한다고 한다.
통일은 쉽게 실현되지 못할 진리요, 이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길게 살릴 단 하나의 길이다. 이것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