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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관람기

등록일 2012-08-09 21:21 게재일 2012-08-09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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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한국 축구가 정말 장족의 발전을 했다. 옛날 축구가 아니다. 중학교 다닐 때 우리 학교는 미식축구가 유명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매번 졌다. 그러면 감독이신 체육 선생님이 팔짝팔짝 뛰면서 선수들을 혼냈다. 전교생이 응원을 하던 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나는 미식축구 아니라 축구도 선수가 되는 과정은 그런 것이려니 했다. 그래서 한국 축구는 창의성이 부족한 게 아닌가 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 선수들이 마치 남미 선수들처럼 상대 선수를 둘씩, 셋씩 젖혀내고 요리저리 공을 몰아 앞으로 내달렸다. 상대 선수가 공을 잡으면 두 사람, 세 사람이 압박을 해서 꼼짝 못하게 했다. 심판이 내리는 판정에 대해서는 주장 구자철이 얼마나 말이 많은지, 마치 펜싱 사브르에서 우리 남자팀에 패하고 만 이탈리아 선수들 입을 방불케 했다.

섬세하고 자유로워 보였다고나 할까. 잘하는 축구를 보면 예술 같은데, 우리 축구가 그런 것에 가까워진 것이 영국팀을 이긴 것보다 더 기쁜 일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이틀이나 지났나? 내가 늘 가깝게 지내는 사람 중에 이승은이라는 출판사 편집자가 있다. 축구며, 펜싱이며, 이번에 참 잘들 한다는 얘기를 나누는데, 문득 이 사람이, 자신은 올림픽 경기들을 보는 게 너무 마음이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왜냐? 대화를 나누던 나를 포함한 두 사람이 다소 의아스런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본다. 이기려고, 앞서려고 안간힘을 쓰며 경쟁하는 모습이 보기 싫다는 것이다. 올림픽이 사람들을 비정상적인 생존 싸움으로 내몬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그럴 만도 하다. 특히 유도니, 레슬링이니, 배구니, 탁구니, 축구니 하는 경기종목을 보면 서로 이기려고 사투를 벌인다. 하지만 달리기나 수영이나 양궁 같은 종목은 그렇지도 않다. 그런 종목들은 인간의 심신에 내장된 가능성을 극한에까지 밀어붙여 발견해 보려는 진정한 실험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100m 달리기를 9초 몇에 끊어내는 우사인 볼트나 한층 성숙된 인간미를 보여준 박태환 같은 사람들은 아무리 칭송 받아도 나쁘지 않은 게 아닐까? 그렇다. 그들은 인간의 가능성을 펼쳐 보이는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과연 이 최고의 인간들은 과연 이상적인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이 문제는 간단치 않다. 바람직한 인간의 모습이 꼭 눈이 매처럼 밝아 매번 과녁의 10점에 맞출 수 있는 양궁 선수일 것도 아니고, 상식적으로 보면 도저히 들 수 없을 것 같은 바벨을 거뜬히 들어 올리는 역도선수가 이상적인 체형을 가지고 있다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도대체 그 100m 달리기는 왜 150m 달리기는 될 수 없었던 것인가? 또는 그것이 3천m 달리기였다면 우사인 볼트의 이름도 그렇게 높지 못했을 수도 있다. 즉, 우리가 칭송해 마지않는 경기 능력이라는 것도 사실은 다 인위적으로 설정된 규칙에 따른 훌륭함일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올림픽을, 우리 훌륭한 선수들을 깍아 내리고 싶지 않다. 다만 그 모든 최고를 향한 노력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은 아니라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달성한 심신의 높이가 곧 우리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심신의 조화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리라는 것이다.

늦은 밤부터 동이 터올 때까지 전후반 90분, 연장 전후반 30분, 승부차기까지 전부 소화해내고도 그날은 밤을 새워 축구를 본 보람과 기쁨이 있는 날이었다. 우리 축구에서 체육이 예술이 되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는 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행운일 것이다. 하지만 올림픽의 모든 훌륭함을 인정하고 난 후에도 우리는 저 이승은씨가 말한 경쟁의 무위성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조화가 늘 최상을 지향하는 행위 속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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