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면 생활이 꽤나 번잡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 일주일 사이에 나는 백태웅 교수와 두 번이나 우연히 마주쳤다. 지난봄에 하와이 갔을 때 처음 만나 놓고는 연락 한 번 주고받은 일 없는데, 서울에서 이렇게 조우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한 번은 강남에서, 다른 한 번은 여의도에서.
오늘 여의도역 앞에 있는 투썸플레이스라는 커피숍에서 백태웅 선생을 만나자 나는 내 가방 속에 든 책,`안철수냐 문재인이냐`의 존재를 바로 떠올렸다. 이 책은 바로 어제 세상에 나왔고, 이 책의 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조정환 선생은 저 1990년 전후의 격변기에 백태웅 교수의 동지였다.
그때 두 사람은 급진적인 진보 운동의 선두에 서 있었다. 한 사람은 긴 수배생활을 거쳐 지금은 `진보 지성의 정원`이라는 다중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긴 수감 생활 끝에 사면을 받아 미국 노틀담 대학에 유학해 지금은 하와이대학의 법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과연 진보란 무엇일까? 사실 이 문제는 인생이란 무엇일까? 하는 문제보다 여러 수준 아래 문제다. 우리는 먼저 인생에 대해 묻고 그 다음에 다시 진보라든가 보수라든가 하는 문제들에 대해 물어야 한다. 이 물음의 순서가 바뀌면 그 사람은 필시`겉넘게` 된다.`겉넘다`라는 말은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대충 푸는 것을 뜻한다. 돌이켜 보면 20대와 30대 초반에 나는 이렇게 `겉넘는`사람이었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인생과 우주에 관해 따져 생각한다는 것인데, 변증법적 논리학을 외우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고, 삶에 대해 고민한다는 것은 나와 타인과 공동체 또는 사회를 총체적으로 사유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저 사회를 바꾸면 모든 것이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꼭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결핍된 사유 형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음을 날카롭게 인식해서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쪽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내 자신 안에서 철학적 사유를 회복시켜 세계와 우주에 대한, 삶 자체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구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했다.
올해 다시 무라카미 하루키를 떠올렸다. 과거에 내가 읽어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했던 하루키의 문장을 찾아 그의 소설들을 이리저리 뒤져 보았지만 정작 그 대목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공적인 문제를 위해 내 노력과 시간을 허비하지 않겠다. 왜냐.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분투하는 동안 숱한 문제들이 새로 생겨날 텐데, 왜`내` 귀중한 삶의 시간들을 그런 덧없는 일에 바친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 덧없이 인생을 허비했던 백태웅 교수가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것이 내 인생의 질문에 어떤 중요한 작용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와이에서 만난 백태웅과 오늘 여의도에서 만난 백태웅. 이상하게도 정채가 감도는 그의 까만 눈동자와 함께 며칠 전 내게, 몇 년 동안의 자신의 연구 결과를 집약한 두툼한 연구서를 건네주고 돌아간 선배 교수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생각해 본다. 나는 나 자신의 복잡, 번다한 생활 속에서 숱한 일들을 만들어 가면서 내 자신이 무엇인가 의미 있는 일들을 하고 있다고 믿곤 한다. 하지만 내 삶의 시간이 흘러가는 사이에 타인은 나와는 다른 종류의 삶의 시간을 그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나는 내 스마트폰 메모장에 한 문장을 천천히 새겨 기록해 놓는다.
`타인은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크고 복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