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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문학하던 생각

등록일 2012-07-05 20:44 게재일 2012-07-05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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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그 시대에는 한국어로 문학을 하는 것이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일제가 `국어`, 즉 일본어로 문학을 할 것을 장려 또는 강요했기 때문이다.`문장`이나`인문평론`같은 잡지가 폐간되고 대신에`國民文學`이라는 것이 생겨나 일본어로 소설이나 시, 평론을 발표하는 일이 생겨났다. 이것은 새로운`문학장`의 출현을 의미했다.

일찍이 이광수는 조선문으로 쓴 문학만이 조선문학이라고 해서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에서만은 제국적인 지배로부터 자율적인 거리를 확보하려고 했다. 언어 자체가 일종의 상징 자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광수의 이 생각은 아주 중요하다. 이광수는`조선문단`이라는 잡지를 펴내 작가들을 등단시켜 작품을 발표하도록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도향, 현진건, 채만식 같은 중요한 작가들이 나타나 `조선문학`이 활성화 되었다.

1940년을 전후해서 일제가 학교에서의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고 이광수를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감금하고 한글 잡지들을 폐간시키고 조선어학회 사건을 오늘날의 국가보안법에 해당하는 치안유지법 사건으로 다룬 것은 이 문학장의 재편을 노린 것이었다. 그것은 조선문단에 일본어를 도입하는 것이었으며 이광수 이래 형성된 조선문학의 전통을 폐지하려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장`의 출현에 조선 문학인들은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반응했다. 그 첫 번째 유형은 일본어로 문학하라는 권력의`명령`을 수용하는 것이었다. 상대적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문학인들 중 상당수가 이들 가운데에서도 특히 기존의 문학장에서 별다른 재능을 나타내지 못한 사람들이 이`명령`을 높이 받들었다.

두 번째 유형은 여전히 조선어로 문학을 해나간 사람들이었다. 이태준이나 박태원, 채만식 같은 중요한 문학인들이 여전히 거의 모든 문학 작품을 조선어로 창작했는데 이것은 단순히 그들이 일본어를 구사할 수 없어서는 아니었다. 이른 나이에 일본에 유학했던 이광수마저 자신의 일본어 문학이 절망적이었다고 보았던 만큼 문학에서 모국어의 의미와 역할은 절대적이며 이들은 이 가치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세 번째 유형은 침묵을 선택한 이들이다. 한글로 문학을 하는 것이 여의치 않고 그 문학에 대일협력적인 색채를 부조하지 않고는 작품을 쓸 수 없는 상황이 심화되어 감에 따라 작가와 시인들은 차라리 침묵을 지키는 길을 선택해 나갔다. “묵하는 정신”을 주장한 백석은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문학장`이란 다소 생소한 말이다.`장`이라는 것에 대해서부터 생각해 봐야 한다. 피에르 부르디외에 따르면 그것은“입장들의 구조화된 공간”이다. 서로 적대적이거나 차이 나는 입장들이 뒤얽혀 있는 힘들의 충돌 공간이 바로`장`이다. 따라서`문학장`이라는 것도 문학적 입장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가치 지향을 가지고 함께 뒤얽혀 혼거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문학장`이 단순히 공간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기억을 포함하는 시간의 장이기도 하다. 우리의 역사가 불운했다면 백석의 의지는 일본어가 주도하는 문학장에 가려 햇빛을 쏘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한글을 지킨 문학인들, 침묵을 선택한 문학인의 손을 들어 주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지금 `문학장`은 그런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이 주도하고 있다. 만약 그 시기에 백석 같이 한글문학의 정신을 지키고자 한 사람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우리가 어떠했겠는가? 백석에게 있어 진정한 `문학장`은 일본어와 한국어가 혼거하고 있는 시대의`단면`이 아니라 저 멀리서부터 다른 저 미래로 연결되는 기억의 장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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