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은 우리에게 이제는 아주 잘 알려진 시인이다. 나는 그가 쓴 시들을 언젠가 책을 들고 다니면서 읽은 적이 있다. 그래도 남들에게 나도 백석을 좋아한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다들 좋다고 하는데 나까지 그 대열에 합류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백석을 참 좋아했기에 그의 시를 외우려고까지 했던 적도 있다. 그중에서도 그가 통영에 대해서 쓴 시들 가운데 하나는 내가 가끔 사람들 앞에서 읊어 보이기도 할 정도다. 그 시를 여기 한 번 옮겨 본다.
“옛날엔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千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 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붉으레 한 마당에 김 냄새 나는 비가 내렸다”
백석은 낭만적인 사람이었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신문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는 바람에 일본 유학 기회를 얻게 되었지만,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시를 쓰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이 아는 주옥같은 시들을 써냈다.
나는 위에 인용한 시 중에서도 특히 “미역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두 번째 행을 너무나 아낀다. 천희라는, 처녀를 뜻하는, 흔한, 이름다운 이름을 갖지 못한 여인의 절실한 사랑의 태도를 이렇듯 아름답게 표현해 놓을 수 있을까?
그런 백석이 1940년경에는 훌쩍 만주로 떠났다. 만주라면 그 시대에는 만주국이라 해서 일본의 괴뢰국가의 영토였으니까 일본 천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곳에서 백석은 이른바 북방을 지향하는 시라는 것을 몇 편 남겼다. 아름다운 시들인데, 그것은 우리 민족의 뿌리를 저 시베리아, 만주, 중앙아시아를 이루는 대륙적인 풍정에서 찾는 것들이었다.
그렇잖아도 1940년대 들어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않은 백석이지만 그런 그의 시와 산문이 1942년 하반기가 되면 뚝 끊기는 것을 볼 수 있다. 도대체 왜 그는`갑자기` 말문을 닫아버린 것일까. 이유를 찾던 내게 한 산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산문의 구절이 한 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민족의 경중을 무엇으로 달 것인가. 그 혼의 심천(深淺)을, 나아가서 존멸의 운명까지도 무엇으로 재고 점칠 것인가. 생각이 이곳에 미칠 때, 우리는 놀라 두렵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동양과 서양을 가려 본다. 그리고 서양보다 동양이 그 혼이 무겁고 깁은 것을 예찬하고 이것에 심취한다. (그러나) 동양은 무엇을 가졌는가. 동양에 무엇이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가. 조선은, 동양의 하나는 무엇을 잃어버렸다. 잃어서는 아니 될 것을 잃고도 통탄할 줄 몰라 한다. 무엇인가 침묵하는 정신을 잃은 것이다. 잃고도 모르는 것이다.
그때는 `내지` 일본이고, 조선반도이고, 만주이고, 어디든 가리지 않고 대동아주의니, 동양주의가 횡행했다. 백석은 그런 시끄러운 소리가 정말 듣기 괴로웠던 모양이다. 그는 말한다. 동양의 혼이 서양의 혼보다 무겁고 깊다고 깝치지 말라. 동양에 그런 무엇이 있단 말인가. 이 엄혹한 시대를 견디는 가장 슬기로운 태도는 바로 “묵(默)”하는 것임을 알라.
요즘 사방을 둘러보면 정말 흥성스러운 말잔치가 많다. 그러나 값이 없다. 고민한다. 과연 문학은 잘 말하고 있는 것일까? 깊은 `묵(默)`의 시간 속에서만 진짜 말이 솟아오르는 게 아닐까. 그러나 그것이 어찌 문학에서만의 일일까. 정치도, 교육도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