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수 경북대 교수, 서안나 시인,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은 이 행사의 한 부분인 백일장 심사를 마친 참이었다. 한 3년 전부터 이곳을 알았었다. 만해마을은 백담사에 딸린 공간, 해마다 만해축전이라는 큰 행사를 열고 있었다.
일을 끝낸 뒤라, 어디선가 맛있는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만해마을은 원통에서도 속초 쪽으로 한 20분 달려가야 하는 곳. 커피전문점 같은 곳이 아주 귀하다. 우리는 만해마을 근처에 있는`오래된 시계`라는 나무집으로 갔다. 근방에서 진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이라고는 이곳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 3년 전에 만해마을 근처를 배회하다 이런 집이 있다는 걸 알았다. 원목으로 지은 2층집이고, 간판은 영어로 `Old Clock`(올드 클락)이라고 되어 있었다. 갔더니 1층 문이 잠겨 있고, 휴대폰 번호가 남겨져 있었다. 혹시라도 찾아올 손님을 위한 것이었다.
잠시 후 까페 주인이 왔다. 우리는 2층으로 안내되었다. 바깥에서 곧장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돼있었다. 1층은 이 분의 주거공간이라고 했다. 2층은 넓었고, 어둠침침했다. 그래도 창은 꽤 넓었는데, 바로 옆에서 흐르고 있는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돼있었다.
주인아저씨는 어딘가 모르게 괴짜 같은 느낌을 주었는데, 그것은 2층 홀의 전면을 장식하고 있는 오래된 레코드 판들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손님은 그때도 달랑 우리 일행뿐. 우리는 그 분과 어떤 이야기들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그 분은 이 집을 직접 지었다고 했다.
아마도 이 분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백 번도 넘게 받았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집을 갖게 되었느냐? 어디서 뭘 하셨느냐? 레코드 판은 다 진짜냐? 얼마나 모은 것이냐? 사람들은 상대방이 그 질문을 반가워할지 어떨지 생각하지도 않고 지겨운 질문을 던져내는 경우가 많다.
그 분은 이곳에 집을 짓기 전에 신촌에서 수십 년 동안 다방 같은 것을 했다고 했다. 아마 다방이 아니라 그 비슷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팝송에 미쳐 있었고, 이 레코드판들은 모두 팝송이고, 우리 음반은 하나도 없다고 했었다. 그때는 겨울이었던가.
지금은 여름이다. 우리는 또 우리밖에 없는 2층 홀에 널부러지듯 앉아서 주인 양반에게 커피를, 나는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다. 그리고 말했다. 빌리 홀리데이를,`I`m a fool to want you`(누군가 이 노래 제목을 `당신을 무지 원하는 나는 바보`라고 번역해 놓은 것을 보았다)를 듣고 싶습니다. `빠담 빠담(padam padam)`도요.
왜냐하면 이곳은 내가 듣고 싶은 팝송이나 샹송이라면 어떤 곡도 이미 준비되어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내 지식 범위, 감상의 범위가 미치는 한도쯤은 이곳에서는 애송이 취급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일찍이 알았다.
우리는 3년 사이에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어쩐지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그 분도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나와 성이 같기도 한 그 분의 괴짜다운 성품이 진즉부터 좋아져 있었다.
“여기서는 내가 제일 힘 쎕니다. 어떤 가수도 내가 나오라면 나와야지. 들어가라면 들어가고. 용서 없어. 크크크. 하하하.”
우리는 이 분의 말씀이 너무 재밌어서 웃어대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는 내가 제일 힘쎄. 왜냐. 나는 내가 평생을 들여 모아온 음반들로 내 왕국을 만들어 놓았으니까.
“손님도 없는데 어떻게 하세요?”“돈 벌면 뭐해요? 버는데 맞춰서 덜 쓰고 살면 되지.”
웃어대면서 나는, 나도 내가 제일 힘쎈 왕국을 하나쯤은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