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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외야수가 좋다

등록일 2012-07-26 21:53 게재일 2012-07-26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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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나는 야구를 좋아하지 않는다. 축구가 가진 활력에 비해 야구는 너무 정적인 느낌을 준다. 휴지(休止)가 많고, 멈춰 있는 시간이 긴 것은 스포츠든 게임이든 진력이 난다.

한 번은 경마장에 가본 적이 있는데, 이건 무슨 게임이 이런지, 한 번 경주를 하고는 삼십 분이나 기다렸다 또 한 경주를 하고, 이런 식으로 게임이 진행되는 것이었다. 게임에 열중한 사람들은 그 시간 동안 밖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말들을 관찰하고, 무엇인가 기록도 해 가며 삼십 분이 부족하게 빠듯이 쓰는데, 나는 그 사람들 관찰하는 것도 한두번이지 이건 도무지 싫증이 나 견딜 수가 없었다.

원래 자신이 열중하고 있는 것에는 시간이 가는 줄 모르는 것이다. 야구 팬들도 보면 투수가 교체될 때나 공수가 전환될 때와 같은 멈춤의 시간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보내면서 이것저것 생각도 하고, 기록도 체크하고, 치어리더들도 보면서 재밌게 보낸다.

하지만 나는 불행히도 야구에 빠지지 못했다. 고등학교 때 OB베어스와 삼성 라이온즈가 싸우는 걸 재밌게 본 이후로 야구 경기를 한두 번이나 관람했을까. 그러니까 나는 낚시나 바둑에 빠지지 못한 사람들처럼 야구에 빠지지 못한 사람이다.

이렇게 빠지지 못하다 보니 야구에 대한 불만도 생겨났다. 야구는 이상하게 다이아몬드 안에만 반짝이는 것 같다. 투수와 포수와 타자의 게임 같다. 결코 소수만을 위한 스포츠가 아닌데도 왠지 자꾸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조연에 불과한 것 같다.

어렸을 때 평범하지 않은 것은 열등한 것이라는 명제에 심취하기도 했던 나는 주연과 주역만 하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조연이 좋고, 조역이 좋다. 그래서 나는 야구에서 외야수만은 좋아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나는 외야수의 고독을 좋아한다. 외야수는 있어도 없는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투수와 타자가 승부를 겨루는 순간 외야수는 관중들의 관심권 바깥에 있다. 외야수는 언제나 다이아몬드 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지만 야구장 사람들은 그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오로지 공이 외야를 향해 날아갈 때만 관중의 시야에 들어간다. 그러면 그는 혼자 덩그러니 서 있다 죽어라 하고 공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공을 놓치면 안된다. 버젓이 잡을 수 있는 공을 놓쳐버리면 그때 관중들에게서 쏟아질 야유는 또 얼마나 크겠는가? 그런 치욕적인 순간에 부닥치지 않으려면 그는 사력을 다해야 한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오는 공을 그가 멋지게 잡았을 때 관중이 보내주는 칭찬도 잠깐이다. 그는 다시 적막한 자기만의 공간을 감당해야 한다. 또 외야수는 공수가 바뀔 때마다 얼마나 멀리 이동해야 하던가. 그는 멀리 갔다 멀리 돌아오는 사람이다. 그는 야구장에서 가장 고단한 사람이다. 자기팀이 삼진아웃 세번으로 허망하게 공격을 끝내버리면 그는 돌아오자마자 다시 먼 곳으로 뛰어나가야 한다.

나는 그런 외야수가 좋다. 더불어 외야수같은 사람들이 좋다. 사실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이아몬드 안에서 게임을 하는 사람보다 외야에서 게임을 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 외야수들이 다이아몬드 안의 사람들마저 그들답게 만들어준다는 것을 안다.

지금 사람들은 새로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다이아몬드 안에서 열띤 게임을 벌이는 정치인들을 보고 있다. 그러나 이 다이아몬드 안의 정치인들을 그들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외야수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관중석의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게임의 필수 불가결한 일부이며, 그들 없이는 게임이 성립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조정환이라는 진보이론가는 “진짜 대권은 사람들 각자가 쥐고 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정말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바야흐로 외야수들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나는 이 외야수들이 덜 힘든 세상을 맞이하고 싶다. 외야수들이 자기가 누군지 알아야 하는 시간이 바로 지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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