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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 철학이란 무엇이었나?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등록일 2012-05-24 21:23 게재일 2012-05-24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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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그때 나는 대학교에 갓 들어가 철학 강의라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캠퍼스에서 만나는 선배들이며 친구들은 `입만 벌리면' 정반합이 어떻고, `대립물의 투쟁과 통일'이 어떻고 `양질 전화'가 어떻고 `부정의 부정'이 어떻고 하는 얘기만 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헤겔 변증법이나 마르크시즘적 변증법을 아주 속화시킨 논리들을 마치 교과서라도 되는 양 이렇게도 배우고 저렇게도 배우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 잘 알지도 못하면서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같은 것을 읽고,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지만 고등학생이 그게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는 환경에서 자라났었다. 그 시절에 그래도 읽은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라곤 까뮈의 `이방인'이나 `시지프스의 신화' 같은 것이었다. 이 철학적 조류는 그래도 `존재의 부조리'니,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느니' 하는, 조금만 더 노력하면 알 것도 같은 소리들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학에 가면 삶과 죽음을 논한 이 부류의 철학 책이라도 한껏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 철학이라는 걸 접해보려니, 도대체 이건 내가 생각하던 철학이 도무지 아니었다. 그것은 무슨 도식 같은 것이고, 그 도식 같은 `법칙'들을 가지고 자본가며 노동자며, 봉건제며 자본제며, 잉여가치며 물신성이며 하는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나도 3학년이 되었는데, 그해 봄에 어디선가 `강철서신'이라는 게 돌아다녔다. 내 선배들이나 가까운 어떤 친구들이 그런 것을 보고 있었고, 나도 분명히 그 가운데 한 편 정도는 읽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첫 머리인지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박헌영은 왜 미제의 프락치가 되었는가' 하는 소제목을 달고 무슨 이야기를 펼쳐 나갔던 게, 지금도 그 구절만큼은 머릿속에 분명히 남아 있다.

박헌영이라면 일제하에서 1950년 한국전쟁기까지의 한국 공산주의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미치광이 행세까지 해서 감옥에서 요시찰 인물로 풀려나와 해외로 망명했고, 나중에 다시 국내에 잠입해서 해방 될 때까지 대구니, 광주니 잠행하면서 끈질긴 투쟁을 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 박헌영이 왜 미제의 프락치가 되었느냐고 묻는 것이다. 답은 그가 종파주의자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헌영은 그렇게 해서 김일성 일파에 의해 숙청당했다. 문학인 임화 같은 사람도 남로당 계열인지라 엇비슷한 죄목으로 사형을 당했다. 이러한 피비린내 나는 숙청이 연달아 치러지고 나서 주체사상이니, 김일성 유일사상체계니 하는 것이 만들어졌다. `강철서신'은 바로 그 주체사상을 설파하는 문서였다.

그런 것을 철학일지도 모른다고, 사상인지도 모른다고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 시간이 흘러 생각해 보면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세대는 철학적으로 볼 때 불행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486세대 상당수는 철학이 삶과 죽음을 묻는 근본적인 질문의 형식이 되어야 한다는 자명한 진실에서 멀리 벗어나, 도식 같은 `법칙'을 철학인 것처럼 착각하고, 주체사상 같이 조야한 사이비 사상까지 철학의 한 경향이나 될 수 있는 것처럼 좌고우면했었다. 그런 비철학적, 철학 미달적 사고로 어떻게 그 시대를 풍요롭게 헤쳐나올 수 있었겠는지? 사태가 그런데도 그나마 민주화운동들을 하고, 우여곡절 끝에 새로운 길을 택하기도 하고 속류와 절연하는 길을 실험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이건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지금 그 `강철서신'을 쓴 김영환 씨가 탈북자들을 돕다가 중국에 억류된 지 수십 일이라고 한다. 그는 그래도 자신이 벌여놓은 일들에 책임을 지려고 하는 것이다. 젊은 날 한때의 생각이 낳은 부조리를 씻어내기 위해 그렇게 애쓰는 모습을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왜 그로 대표되는 486 세대의 어떤 부분은 그러한 경로로밖에는 1980년대를 고민할 수 없었는지, 가슴에 통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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