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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을 생각한다

등록일 2012-04-26 21:24 게재일 2012-04-26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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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며칠동안 이효석에 묻혀 살았다. 이효석이 세상을 떠난 것은 1942년 5월25일이다. 얼마 안 있으면 이효석의 기일이 돌아온다. 꼭 이때가 되어 이효석을 다시 보게 된 것은 아니지만`풀잎`이나`일요일`같은 소설과 함께 며칠 지내다 보니 그의 삶과 죽음이 아주 새삼스러워진 것이다,

그가 남긴 소설로는`메밀꽃 필 무렵`이 아주 잘 알려져 있지만`풀잎`이나 `일요일`이야말로 문제작 중의 문제작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들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에 씌어졌다. 1941년 11월30일과 1941년 12월8일이 이 작품들의 탈고일이다. 그런데 이 1941년 12월7일 또는 8일은 일본이 진주만 공습과 함께 미국에 선전포고를 해서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때다. 이로부터 1942년 2월15일에는 싱가포르가 함락되었으니 이 몇 달 간 일본은 파죽지세로 동남아로 진격해 간 것이다.

이때 이효석은 전혀 다른 문제에 처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전쟁을 하고 조선인들에게 전쟁 지원을 강요하고 있었지만 이효석은 그때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다가 급기야는 뇌막염에 걸려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이효석의 삶이 참으로 특이하게 보였다. 전쟁은 이상한 것이다. 삶의 활기를 위해, 목적을 위해 타자들의 생명을 해하려 하는 것이 바로 전쟁 아니던가. 바로 그때 이효석은 자기 생명이 사그러드는 운명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엇갈림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풀잎`이라는 소설을 보면, 이효석 자신을 닮은 작가 준보가 역사상 왕수복이라는 기생 출신 가수로 알려진 실이라는 여인과 사랑을 하고 있다. 두 사람은 전쟁연습을 위한 등화관제가 내려진 평양의 뒷골목을 숨어다니며 사랑을 나눈다. 준보는 생각한다. 자신은 아내를 잃었고 그로써 허물어진 가정을 새로운 사랑으로 쌓아올려야 하고 따라서 아무리 등화관제 중이라 해도 자신에게 이 정도의 특권쯤은 허용되어야 한다.

`일요일`에도 이효석의 분신인 준보가 등장한다. 그는 막 소설 원고를 탈고한 기쁨을 안고 거리로, 백화점으로, 찻집으로, 호텔 식당으로 걸음을 옮긴다. 호텔에서 아주 맛있는 식사를 하면서 오랜만의 행복감을 느낀다. 하지만 친구의 말 한마디가 그를 괴롭힌다. 도쿄에서 죽은 어떤 음악가의 시신이 오늘 평양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준보는 삶의 활기를 빼앗겨버린 듯한 슬픔을 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준보는 평화롭게 노는 아이들을 보다 문득 이 아이들의 미래에 행복이 기약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풀잎`과 `일요일`은 이효석이 전쟁의 시대에 삶과 죽음의 기로에 놓여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그는 자신의 생명의 소중함과 가치에 대한 인식 속에서 전쟁을 관조하고 평가할 수 있었다.

이 이효석을 생각함으로써 나는 많은 현재의 문제들을 보고 평가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은 것도 같다. 우리들 생활에는 숱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이 문제들은 어떤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가?

만약 어떤 태도, 생각, 행동이 우리들의 생명적 가치를 지키고 고양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옳다. 그러나 어떤 감언이설, 현상적 이익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궁국적으로 우리들 삶과 생명의 원리 바깥에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우리들 것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사실 지금 나는 안동, 영양, 봉화로 답사를 떠나왔다. 봄 보슬비 속에서 세상이 이렇듯 아름다울 때 이효석은 홀로 세상을 등져야 했다. 그 이태전 초겨울에는 아내가 세상을 떠 홀로 아이들을 키우며 살아오던 그였다. 그는 왕수복 여인을 만나 새로운 생활을 설계하고 싶어했지만 운명은 그를 저버리고 말았다, 나는 기생이면서 레코드 취입을 한 가수가 된 왕수복의 노래`고도의 정한`을 듣는다. 먼 옛날 이효석과 왕수복의 못 다 이룬 사랑의 사연이 가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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