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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태? 북어? 코다리? 노가리? 동태? 황태

등록일 2012-02-16 22:00 게재일 2012-02-16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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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겨울이면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생태국 생각이 난다. 옛날에는 내가 태어난 충청도 예산에는 아마 생태를 구경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생태국 솜씨는 그 연조가 아주 오래된 것은 아닐 텐데도 생태 몇 토막에 김장 김치를 말갛게 썰어 넣은 생태국은 그 시원스러운 맛이 일품이다.

생태국 생각을 하면 다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외할머니께선 돌아가시기 몇 해 전에 넷째딸 집인 우리 집에 와서 겨울을 나셨다. 그때 아버지가 아침마다 자전거를 타고 시장에 가서 생태를 사오셨고 그러면 어머니가 이 생태를 국으로 끓여 외할머니께 드렸다. 그 덕분에 나도 생태국 맛을 들였는지 알 수 없다.

아버지는 어렸을 적에 부모님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에 외할머니를 어머니처럼 가깝게 여기셨던 것 같다. 사위에게 장모님은 어려운 분일 텐데도 아버지는 외할머니를 살갑게 모셨던 것 같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생태국 대신 생태탕이라는 것을 봤는데, 그때면 이 맛있는 음식에 어머니, 아버지, 외할머니 생각이 함께 딸려 올라오곤 했다.

시간이 흘러 나중에 채만식이 쓴 `명태`라는 수필을 보게 되었다. 채만식은 가난하게 살면서도 세상을 날카롭게 보는 시각을 견지하려 했던 작가였다. 그러나 일제 말기가 되면 자기 뜻과 얼마나 상관없는지는 몰라도 자신이 펼치던 생각과 다른 글을 쓰게 됐다. 내가 보기에`명태`는 그런 자신의 처지와 상관이 있어 보였다. `명태`의 일부분을 잠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명천 태가가 비로소 잡아 팔았대서 왈 명태요 본명은 북어요 혹 입이 험한 사람은 원산 말뚝이라고도 칭한다. 수구장신, 피골이 상접, 한 삼년 벽곡이라도 하고 온 친구의 형용이다. 배를 타고 내장을 싹싹 긁어내어 싸리로 목줄띠를 꿰어 쇳소리가 나도록 바싹 말랐다. 눈을 모조리 빼었다. 천하에 이에서 더한 악형도 있을까. 모름지기 명태 신세는 되지 말일이다.”

내 감각으로는 이 `명태`는 명태라기보다는 북어다. 살아 있어 동해를 헤엄쳐 다닐 때는 명태라 하고, 잡았어도 살아 있는 듯 싱싱한 것을 생태라 한다. 이 명태를 잡아 말린 것이 북어이고, 반쯤만 말린 것이 코다리이고, 명태 새끼를 말린 것이 노가리다. 또한 이 명태를 얼린 것이 바로 동태이고, 이 명태를 덕장에 널어 겨우내 얼었다 풀었다 하기를 반복해서 건조한 것이 곧 황태다.

그런데 이 명태 말린 북어를 보고 채만식은 자신의 신세를 절감했던 것 같다. 내장을 다 긁어내고 싸리로 목줄띠를 매고 바싹 말린 명태. 이 명태에 눈이 빠졌다. 앞을 못 보게 하는 극형을 받아 맹목이다. 이 얼마나 비참한 신세인가.

채만식은 바싹 마른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한다. 나중에는 폐병에 걸려 죽어 버렸다. 일제 말기에 그가 지조를 지키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는 이 북어의 바싹 마른 몸채와 빠져나간 눈을 보고 그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리라.

나중에 나는 비평을 하면서도 나 자신의 비평이 시원치 못하고 혜안이 없고, 그렇다고 세상에도 내 몸을 맞추지 못해서 괴로워하던 때가 있었다. 그 무렵 겨울이면 저 강원도 인제 백담사 쪽에 다니곤 했는데, 그때 비로소 황태 덕장을 보게 됐다.

겨울에 눈 맞으며 허공에 널려 서 있는 황태 모습은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했다. 그래도 난 아직 북어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살아서 겨울 동해 흰 바다 물결을 헤엄치는 명태 시절의 나날을 그리워했다.

그럼 나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다시 명태로 돌아가기는 틀렸고 채만식의 북어처럼 바싹 말라 생명의 흔적 찾기 어려워지면 어쩌나? 나, 몸은 비록 세상에 잡혔지만 그 겨울 우리 식구들 입맛을 살려주던 저 생태의 싱싱함을 간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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