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4·11 총선과 486 세대

등록일 2012-03-08 21:36 게재일 2012-03-08 19면
스크랩버튼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총선이 바싹 다가왔다. 서울 정치계는 공천 문제로 꽤나 시끄러운 것 같다. 필자는 정치를 할 생각이 전연 없으니, 혹시 이 글이 선거법 위반이 되더라도 양찰해 주시기 바란다.

필자는 이 문제를 요즘 486세대의 문제로 생각하게 되었다. 486세대는 처음에 등장할 때는 386세대였으니, 그 뜻은 다 알고 계시듯 30대이고, 80년대에 대학교에 다녔으며, 6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 말이 시사평론계에 처음 등장할 무렵 필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이 말이 어느덧 세월이 흘러 486이 되었다. 왜냐? 말할 것도 없이 처음 등장할 때 30대이던 사람들이 40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10년 성상이 흘러 명칭마저 바꾸지 않고는 아니 될 시점에 다다른 것이다.

이 486세대가 처음 정계에 하나의 주역으로서 등장한 때는 아마도 노무현 대통령 시대가 아닌가 한다. 노무현 대통령께는 그를 보좌해 주는 젊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나이로 보면 대체로 30대 후반 40대 초쯤이었고, 학생운동 맥락에서 보면 NL계였고, 학맥으로 보면 고려대학교나 서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등에 연계되어 있었다.

이 그룹은 486세대 전체적으로 보면 테크노그라트들과는 밀접한 연관이 없어 집단이 결코 크다고만은 할 수 없고 특정한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로 어느 의미에서 편향성이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그룹은 특유의 정서적 연대감을 바탕으로 삼고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대중적 폭발력을 지닌 지도자를 중심으로 일종의 `북인` 그룹을 형성하면서 권력을 거머쥐었고, 관계와 국회에 진출했다. 이 분들 중에는 어느 면에서는 `손쉽게` 국회의원이 되고 관료가 되었다고 진단할 수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정치는 모름지기 소통을 추구해야 한다. 세대 내에서는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같은 세대의 사람들을 참여시킬 수 있어야 하고 세대 간에는 윗세대에게는 존경을 드리고 가르침을 구하며 아랫세대에게는 친애의 감정으로 다독거리고 북돋워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소통이 부재할 때 그러한 정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성공적으로 나라와 국민을 이끌어 가기 어렵다.

이번 선거에 나선 분들 가운데 필자와 개인적 인연이 있는 사람은 이상수 전 노동부 장관이었다. 이 분이 어떤 교수 분의 죽마고우이신데 필자는 다시 그 교수 분과 교분이 깊은 때문이었다.

몇 년 동안 주로 문학행사장에서 만나 본 이상수 전 장관은 정치인답지 않게 문학을 아주 깊게 이해하는 분이었다. 예를 들어 필자는 이 분이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라는 작품에 대해 줄거리며, 주제며, 거기 나오는 대화를 소상하게 기억하고 있고, 이 소설의 교훈을 자신의 삶의 일부로 삼고 있는 것을 보면서 정치인 가운데 이런 사람이 몇 분만 더 있어도 우리나라 문학, 문화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인권운동을 하고, 노동자들을 변호하고,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된 일로 옥고를 치른 과정을 보면 이 분은 신의를 지키고, 책임을 질 줄도 아는 정치적 미덕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 분에게 올해는 또 다른 시련의 해가 되는 것 같다. 언론들은 대체로 한 정치인의 내부 사정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하지도 않고 그런 것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또 같은 정당 안에서도 이해 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리기 때문에 남의 약점을 예사로 보아 넘기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과정에 필자는 486세대가 깊게 관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486세대는 자신이 치른 희생에 비해 `빨리` 기득권층이 되었고, 그것을 질기게 연장해 가려 한다. 윗세대를 밀쳐내고 빨리 주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 필자는 그 세대의 일부다. 마음이 아프다. 정치세계 소식을 접하며 사는 일이 힘들다.

방민호칼럼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