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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이 사회성과 함께 잃어버린 것들

등록일 2015-10-29 02:01 게재일 2015-10-29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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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br /><br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문학에서 사회성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문학이 사회적 가치를 지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번에도 나는 역시 최근에 이르기까지의 약 20년 동안 한국문학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말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한국문학이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어 왔기 때문에 문학적인 문학이 되지 못했다는, 1990년대 이후 문학인들의 반쪽짜리 진단은 앞을 다투어 반사회적인 문학을 향해 `돌진`하도록 했다.

때문에 좋은 의미에서 사회파 작가가 될 만한 작가들도 자신의 컬러를 사회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도록 `포장`하도록 했다.

예를 들어 김영하 같은 작가는 장편소설 `검은 꽃`이나 `빛의 제국` 같은 소설의 소재나 주제는 지극히 사회사적인 것이지만 그는 이것을 냉소적 포즈로`문학화`시켰으며, 정이현 같은 작가도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같은 문제성 있는 소설집의 주제를 여성 인물의 욕망의 문제로 더 많이 `내면화`시켰다.

이러한 `문학화`의 가장 단적인 예의 하나가 사상의 공백을 `감상`으로 보충하는 것이다. `외딴방`이후 신경숙의 대부분의 장편소설들은 울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암시적 작가의 존재를 상기하지 않고는 읽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고, 공지영 같은 작가의 `극단적인` 사회적 소설도 예를 들면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보여주듯이 죄없는 자가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독자들의 감상에 의지해서나 사형제 비판이라는 주제를 지탱할 수 있었다.

최근 들어 한국 문단에서는 문학은 곧 정치라는, 젊은 작가들의 반항 어린 목소리가 급증했으며, 이러한 주장들은 랑시에르라는 프랑스 학자의 견해에 대부분 기초를 두고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문학은 감성의, 감각의 재분배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같은 1970년대의 소설이 문제적인 것은 그것이 부르주아 쪽으로 쏠려 있는 대중의 미학적 취향을 프롤레타리아 쪽으로, 성공적으로 재분배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견 타당성이 있다. 그런데 문학은 곧 정치라는 선언의 위험성은, 따라서 어떤 작품도 정치적인 것이고, 따라서 불온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이 선언 아래 드디어 아주 작은 포즈만으로도 그 작가는 사회적으로 문제성이 있고 그 작품은 사회적 가치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됐다.

사상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지극히 둔감하고도 게으른 숱한 작가들이 `자동적으로` 사회적 의미를 부여받았다. 작품을 아주 잘 읽는, 그래서 가장 작은 징후만 가지고도 거대한 의미를 찾아낼 줄 아는 `문학파` 비평가들에 의해서 말이다.

도대체 무엇이 사회적 문학을 떠나 문학적인 문학이 될 수 있는가?

사실은, 지극히 사회적인 문학이야말로 지극히 문학적인 문학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사회가 하나의 사물처럼 소설 속 등장인물의 외부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때 이런 문학은 지극히 얄팍한 사회적 문학밖에 될 수 없다. 이에 대한 반대 급부로 이번에는 그 외부적 사회를 제거한 내부의, `내면성`의 문학을 구축하겠노라 한다. 하지만 이 내면은 텅 비어 있거나 오로지 빈약한 내면만을 지닐 뿐이다.

왜냐하면 진짜 내면이란, 인간 개체가 타자들 또는 타자들의 집합과 관계하는 과정을 치열하게 겪어내는 인간들에게만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부화 한 내면성 아닌, 외부 배제의 내면 추구로 말미암아, 지금의 한국문학은 지극히 단조롭고 재미없는 소설로 변질되고 말았다. 누가 타인, 타자와 그것들의 집합체로서의 사회를 강도 높게 다루지 않는 소설을 재미 있어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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