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바지 여름은 뜨거웠다. 위도는 변하지 않았건만 기후는 확실히 달라졌다. 장마철에 비 한 방울 보이지 않다 여름철 막바지 염천이 사람을 태웠다.
하지만 하루 비가 더위를 씻어간 오늘 아침, 갑자기 여름 가고 가을이 와 버렸다. 국회 도서관 가는 한강 다리를 건너는데, 하늘은 맑고, 몇 점 구름은 사뿐하고, 여의도 빌딩들은 성큼 앞으로 다가서 있다. 여름 내내 나의 마음은 말 못 할 고통을 안고 있었던 것 같다. 세상은 내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쪽으로 흘러가고, 사람들은 비틀린 구조의 압력에 짓눌려 괴로워 했다. 밤이 길고 잠은 불안했다.
어젯밤 자리에 누워 잠을 청하는데 불현듯 내 삶이 끝나는 순간이 떠올랐다. 사람이 숨이 멈추면 이 세상의 일들은 내가 어떻게 관여할 수 없게 된다. 나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요, 아무리 미련을 품어도 나는 죽은 자로, 과거의 사람으로 치부되고, 나 또한 아무런 생각도, 행위도 없는 적멸 세계로 돌아가고 만다.
이렇게 생각하자 불 꺼진 방안이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벌떡 일어나 형광등 스위치를 눌러 방안을 환하게 밝혀놓고 보니, 아무 일도 없다.
여전히 나는 이 세계의 일부분으로 존재하고, 그러면서도 그로부터 이탈되어 있는 듯한 밤의 적요. 여름의 뜨거움과 밤의 허무를 뒤로 하고 일주일만 지나면 생활의 리듬이 급박해질 것을, 당장 캠퍼스에서 학생들을 만날 것을 생각하며 한강 다리를 건너 국회로 들어간다. 원고를 끝낼 자료를 찾으러다.
얼마만이던가. 벌써 오래 이곳을 찾지 못했다. 마음만 먹으면 차로 오분 거리 지척인 것을, 근 일 년씩 여기 오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 분주한 나날들, 마음이 외부 세계를 향해 있던 나날들이었다.
앗. 국회도서관 현관 앞에 커피 판매점이 생겼다. 열람 카드를 빼서 들어가려고 하니, 출입 제한 인물이 되었단다. 아뿔싸. 다시 한번 아이디, 비밀번호를 눌러도 역시 출입제한이다. 하는 수 없이 담당직원을 찾아가니, 지난번에 와서 열람카드를 반납을 안했단다. 낭패다. 그런데 고맙게도 열람카드 제작 비용 2천원만 내면 된단다. 이렇게 좋을 수가.
드디어, 안으로 들어가자 정간물실은 4층이었던가, 5층이었던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다 복사카드를 1층에서 사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다시 내려가 복사실을 찾자 이제는 열람카드만으로 어느 층에서든 복사비용을 충전해 넣을 수 있다 한다. 변했다. 오지 않던 사이에 편해졌다. 정간물실로 올라가 검색어로 자료를 찾고 열람카드로 출력을 하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다.
국회를 빠져 나와 학교로 향하는데 아직도 오전이 많이 남아 있다. 좋다. 학교가 있고, 공부할 것이 있고, 학생들이 있는 한 나는 아직 살아있고 세상의 희망도 끝난 게 아니다. 규장각 위에 차를 세우고 자하연 길 따라 올라오는데 철 모르는 매미는 따갑게 울고 여름을 견딘 나무는 녹음을 더욱 짙게 드리웠다.
무엇을 할까, 천천히 걸어 오르며 생각한다. 어떻게 살까, 연구실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며 생각한다. 여름을, 지난 봄을 통과해 나오며 막막한 심정을 미처 다 끊어내지 못했다.
지난 며칠 사이에 계속해서 마음 속에 맴도는 문제가 사실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우리 세계의 정치적인 일들로부터 한 단계 더 멀어져 보자는 것이다. 사람들의 삶, 세계의 움직임에 대한 관심을 버리자는 게 아니요, 더 근본적으로, 깊이 생각하기 위해 현안들의 잡다한 움직임에 잠시 귀와 눈을 막고 내 안의 세계에 머물러 보자는 것이다.
연구실 문을 열면서 나는 지금 이 문제를 생각한다. 이 세계의 안에 있지 않고 바깥에 있는 것처럼 살아도 안을 더 뜨겁게 사랑하는 방법이 있을 것 같은 느낌. 그렇다면 나는 아무 것도 버린 것이 없을 테다. 이것이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