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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테러를 생각한다

등록일 2015-11-19 02:01 게재일 2015-11-19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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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파리에서 일어난 잔인한 살상을 옹호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난민을 가장해 유럽으로 숨어든 테러범들과 유럽 내부의 동업자들은 바타클랑 극장에서의 조준 학살을 포함해 파리 여러 곳에서 동시 다발적인 살상을 감행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을 따지기 전 중동에서 벌어진 일들에 관한 나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보려 한다.

2001년 9월 11일의 테러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1991년 12월 8일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됨으로써 세계는 하나로 통합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9·11 사태는 세계가 기독교와 이슬람으로 분리돼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소비에트 해체를 앞뒤로 두 번에 걸친 걸프전쟁은 그 상징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제1차 걸프전쟁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촉발돼 1990년 8월 2일부터 1991년 2월 28일 사이에, 미국 주도의 34개국 다국적 연합군과 이라크 사이에 벌어졌다. 이때부터 전쟁은 싸움이라기보다 살상, 살육 또는 잔혹게임 비슷한 것이 됐다. 한쪽은 일방적으로 때리고 다른 한쪽은 그냥 맞기만 하며, 이런 것들이 다 비디오 게임처럼 미군 비행기로부터 지상으로 실시간 중계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03년 3월 20일부터 4월 14일에 걸쳐 벌어진 제2차 걸프전쟁은 더욱 심했다. 미국의 부시정권은 이라크에 화학무기가 은닉돼 있다고 했지만 막상 쳐들어가보니 이렇다 할 것은 없었다. 9·11의 분노를 어딘가로 돌려야 할 필요성, 그 복수심을 중동에서의 질서 재편을 위해 화학무기설을 이용했을 뿐이다.

나는 그때 전황을 기억한다. 이라크군은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하지 못했다. 겉으론 호언장담했지만 실질적인 군사력 면에서 형편없었던 이라크군은 미군의 무차별 공격에 고양이 앞의 쥐처럼 찢길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아무리 정확한 최첨단 무기로도 민간인과 군인을 정확히 갈라 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전쟁이 있었다. 9·11 테러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알 카에다의 오사마 빈 라덴을 찾아 미국은 2001년 10월 7일부터 아프가니스탄의 집권 탈레반을 향한 전쟁을 시작했다. 오사마는 아프가니스탄 깊은 협곡 속으로 숨어들어간 것으로 알려졌지만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51km 떨어진 아보타바드라는 작은 도시에 3년간 은신하다 사살됐다. 그게 2011년 5월 2일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그러고도 끝이 보이지 않다가 2014년 12월 18일이 돼서야 미국의 활동 종료선언으로 끝을 맺었다.

지난 15년 동안 우리는 서방언론을 통해 생중계되는 이슬람 근본주의의 만행을 목도해 왔다. 그들은 이민족, 타종교의 고대 유적지를 파괴하고, 여행객들을 살해하고, 자신의 영향권 안에 들어 있는 이들을 향해 무자비한 이슬람식 통치를 행했다. 이걸 교정하기 위해 서방이 그들을 향해 무기를 드는 것은 언제나 정당해 보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무수한 양민들이 희생된 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거대한 악을 퇴치하기 위한 고육지책일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해 줄 수 있는 일일까? 무수한 인명이 살상당하는 전쟁이 없이는 그들의 세력을 견제할 방법이 없는 것일까? 혹시 그런 `세계전쟁`의 와중에 그것을 이용해 돈을 버는 세력이 이 전쟁을 부추기고 지속시킨 면은 없는 것일까?

프랑스가 파리 테러에 대한 보복 공격에 나섰다는 소식이다. 이슬람 국가라는 IS는 어디서 자금과 무기를 조달받는지 꽤나 세력을 잘 유지하는 모양인데, 이번엔 얼마나 버틸지 두고 볼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테러 세력과 반테러 국가가 정면으로 맞붙는 사이에 무고한 민간인들은 살 집과 고향을 잃고 유랑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이념도, 종교도, 그것이 현실화 되기 전에 먼저 인류가 절멸되고 이 지구가 무너질 것 같다고. 인간은 원래 지혜를 모르는 생물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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