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밤이다. 비 내리는 밤에 혼자서 이렇게 눈 뜨고 있으면 수많은 생각도 함께 내린다. 하늘을 긋고 떨어지는 유성우처럼 이 생각, 저 생각이 의식의 지평선에 떨어져 내린다.
며칠 전에는 대학 동창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친구는 암이 재발해서 5년 동안 투병을 했고, 처음 발병한 것은 서른여섯 살 때였다고 했다. 같은 고장에서 자라나 같은 대학 같은 과를 나왔는데, 그토록 무심했던 것은 무슨 차가움이었을까. 친구는 큰 병을 앓는 중에도 모든 일을 꿋꿋이 치러냈다. 아이를 키우고 논문을 쓰고 취직을 하고 직장 생활을 하는, 그 모든 삶의 과정을 지켜내려 했다.
밤에 장례식장에서 선배와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대전 집으로 가려다 말고 대전역으로 향했다. 시간을 못 맞추는 바람에 포장마차에서 두 시간 넘게 기차를 기다렸다. 이 역을 돌아간 친구도 수없이 다녔을 것이었다. 이름 모를 사람들이 드문드문 지나다니는 대전역 앞 광장.
친구야. 너무 서운해 하지 말아라. 나도, 다른 친구들도 다들 친구처럼 떠나게 될 테니. 걸어온 길이 멀다 보니 이제 더 갈 길은 멀지 않았구나.
넓은 유리창을 때리는 밤의 빗소리를 들으며 나는 삶의 근원에 다다르고 싶은 갈증을 느낀다. 하지만 지금껏 그러했듯이 지금도, 앞으로도 나는 그 근원이라는 것에는 영영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삶의 본질이 정치적인 것에 있다고, 또 예술은 곧 정치와 같은 것이라고들 누가 말했던가. 이런 단견을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런 의심도 없이 믿는 사람들은 철부지 젊은이이거나, 도가나 불교를 모르는 사람이거나, 서양 이론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받아들이는 편견적 인간일 것이다.
내 삶의 시작으로 돌아가보면 거기에는 정치가 없다. 나는 어머니의 탯줄로부터 떨어져 나와 앙앙 울면서 젖을 찾았을 것이다. 거기에 무슨 정치가 있었겠나. 오로지 이 지상의 시간을 지켜내야 한다는, 무목적적 목적만 존재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 삶의 존재론적 차원일 것이다.
태어나 보니, 본디 환상이나 환각일 수밖에 없는 세상이 나 자신을 맞아들여 그 환상, 환각의 일부로 만들어 버렸다. 나는 나라는 것을 만들고 나 아닌 것도 만들고, 가족이라는 것, 학교라는 것, 정치라는 것에도 관여해 나가지만 이 모든 것은 지어진 것, 구축된 것,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 모든 것에는 진리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세차게 때리는 소리 속에서 인터넷 다음에 뜬 연재 소설을 보다 한밤에 들어온 소식들을 본다.
전방에서 지뢰가 터져 젊은 군인들이 몸이 상했다고 한다. 북한에서 매설한 목함지뢰가 터졌다고 한다. 팟캐스트 방송들에서는 무어라고들 하나. 폭발 영상을 놓고 의견들이 분분하다.
의례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으니 이상할 것이 없다. 정치 세계의 일들은 차라리 그 불확실성이 본질이라고 할 만하다. 진리값 대신에 세력의 강약과 형세의 유불리와 이용을 위한 효용을 따지는 영역에서 자명한 것은 없다. 다만, 그렇게 주장될 뿐이다.
정치가 그런 것이 아닐 때가 있었을까. 역사를 더듬어 보니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
조선시대에도, 신라 때도 방략은 진실을 이겨냈다. 사태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힘을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진실은 절실히 원해도 얻을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일 뿐이다.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어떤 삶을 만들어갈 것인가.
제약된 삶의 시간의 틀 속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비가 내리는 밤에는 삶이 근원에 가까워진다. 한번쯤은 한밤의 빗소리 속에 잠겨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