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역 앞에 맥도날드가 하나 있어 거기 잘 들리곤 한다. 원두커피 한 잔에 천원이면 비싸다고는 할 수 없다.
맛도 그런대로 괜찮다. 더 가깝기로는 롯데리아가 있지만 한 잔에 2천200원이다. 200m 걸어서 1천200원이나 아끼는 턱이니 안갈 수도 없다.
그래도 가끔 롯데리아에도 가는 것은 영 바쁠 때가 있다는 것 말고 거기 아주 오래 아침 출근하시는 연세든 아주머니가 계신 까닭도 있다. 몇 년씩 왔다갔다 하며 보니 처음에는 본척 만척 했던 것도 다음에는 인사를 하게 되고 또 그 다음에는 안부도 묻게 된다. 아예 안 가기 어렵게 되어 몇 번에 한번은 롯데리아행. 오늘은 다행히 커피 값을 아낄 수 있는 날. 맥도날드 쪽으로 간다. 전철역 옆 횡단보도 지나서 오른쪽으로 몇m 가서 다시 홍익문고 앞으로 건너가면 바로 맥도날드, 그런데 그때 구급차가 사이렌 소리 유난히 크게 이쪽으로 달려온다.
어디 급한 환자라도 생겼나 하고 무심히 쳐다보는데 구급차는 맥도날드 앞에 와 멈춘다. 그럼 환자가 여기서 생겼나? 누군가 길을 가다 심장마비라도 왔나, 아니면 조금 전에 무슨 교통사고라도 났나?
구급차가 와서 선 곳을 보니, 빌딩 바로 밑에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는데 심상치가 않다. 빌딩에는 줄이 여러가닥 까마득한 위로부터 아래로 늘어져 있는데, 보니 이것은 유리창 닦을 때 쓰는 안전줄 같다. 그때서야 나는 사태를 알아챘다. 고공에서 유리창을 닦던 분이 추락해 버린 것이다.
사고는 좀 전에 발생한 듯한데 구급차 소리 덕분에 사람들이 그제야 구경꾼들처럼 여럿 몰려든다. 맥도날드는 그 빌딩 바로 옆이고 문이 쓰러져 계신 분 옆으로 나 있다. 사람들 틈으로 보니 쓰러진 분은 아직 살아 있다. 하지만 한쪽 다리가 차라리 앞뒤가 돌아가 버렸다고 해야 할 정도이고, 피가 흐르지 않는 게 오히려 섬뜩한 느낌을 준다. 차마 오래 볼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려 빌딩을 다시 올려다보니 십여층은 훨씬 넘어 보인다. 어디에서, 몇 층에서 떨어진 것일까,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다시 몸서리가 쳐지며 구급대원들이 환자를 들것에 막 태우고 있는 것을 본다. 환자는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고, 구급대원들은 상한 한쪽 다리를 들것에 올리느라 조심조심 움직인다. 더 볼 수가 없어 차마 외면하고 맥도날드 안으로 들어가니 안에서도 바깥 동정을 알고 있는지 어떻게 되었느냐는 착잡한 표정들이다. 커피를 주문하고도 영 아침 기분이 나지 않는다.
사실은, 은근히, 맥도날드에서 햄버거 세트를 팔 때 끼워 파는 인형을 살까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마침 며칠 전에 보아둔 게 있었고, 그 이름이 상디라고 했는데, 참 재미있게 생겨서 사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다. 키덜트라고, 영어로 키드와 어덜트를 합쳐, 어른이 다 되지 못한 어른 또는 어른이 되고도 아이 세계를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있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내 자신이 일종의 키덜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형을 눈여겨 볼 마음도, 주문할 마음도 싹 사라져 버렸다. 방금 전에 본 끔찍한 장면, 상한 사람에 대한 걱정이 인형 같은 것을 아예 생각조차 못하게 만든 것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뭐냐? 우리들의 삶은 마치 허공 줄에 매달린 유리창 닦는 사람의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줄을 놓으면 곧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래서 저마다 줄 하나를 부여잡고 떨어지지 않으려 몸부림을 치는 형국, 이것이 우리네 삶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삶을 어떻게 살아가든, 직업이 어떻거나, 돈이 많거나 적거나, 어디 살거나, 다들 안쓰럽고 딱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줄을 부여잡고 있는 사이에, 그 삶의 시간에 사람들은 저마다 서로를 안타깝게 여기고 연민스러운 눈빛으로 보듬어 안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누군가가 밉고 나쁘게 여겨져도 다시 한번 돌아보는 여지를 남겨두고, 그 또한 나와 함께 같은 허공에 떠 있음을 의식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