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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를 생각함

등록일 2015-07-09 02:01 게재일 2015-07-09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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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고양이는, 내가 아는 고양이들은 좀처럼 믿을 수가 없다. 배 고플 때 밥주는 이가 나라면, 그 날이 며칠이고 계속되면 반드시 내 옆에 와서 아양을 부리곤 한다. 슬며시 가까이 와서 제 얼굴을 부비기도 하고 바짓자락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친밀감을 표현하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고양이가 몇 년 전에 몹시 할퀴어 팔에 지우지 못할 상처를 낸 적도 있고, 머리나 등허리 쓸어주는 것을 가만히 있다가도 갑자기 손을 꽉 무는 것도 여러 번씩 경험했기 때문에 이 녀석을 근본부터 믿어줄 생각이 없다.

이런 고양이 생리를 생각하면 개는 얼마나 충직한 짐승인가. 나 어릴 적 암캐 페이지는 먼 데로 팔려가서 몇 날 며칠 흐른 뒤에도 목에 나일론 끈이 매달린 채 돌아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집에만 틀어박혀 저를 팔아버린 주인을 원망했다. 하지만 팔아버린 엄마도, 그것을 막지 못한 나도 꽉 물어 응징을 가하려 하지는 않았다.

나는 남자 의리보다 여성들의 신의를 훨씬 귀하게 보고 높이 인정하기를 또한 즐겨 한다. 대체로 그렇게 본다는 것이지 늘, 어느 경우에도 그러함은 아니니 크게 탓하지는 마시라 하고 싶다.

이것이 어찌 흔한 남녀 역차별이 될 것이냐. 대저 남자들 세상을 보면, 바로 나 자신까지 포함해서, 권력과 기회를 따라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일들 벌이기를 손바닥 뒤집듯 한다. 참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왜냐 하면 그것이 그 남자의 유전자에 찍힌 성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요, 이 모양으로 생긴 세상에 나서 살아 보려고, 더불어 아내와 자식까지 책임져 보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벌어지는 현상들에 불과한 까닭이다.

그러나, 참으로 교활하면서도 단순한 것이 남자여서, 반드시 그런 낌새를 상대방이나 남이 알아차리게 만드니, 교묘히, 끝까지 잘 속였더라면 좋았을 것을, 가다가다 끝내 자신을 들키고야 마는 게 또 남자들의 한계다.

나 혼자 생각하기에, 남자들의 의리가 가진 한계는 무엇보다 그것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대상을 향한 의리인 데서 오는 것 같다. 때문에 자신이 의리를 지켜야 할 대상이 힘을 잃어버리거나, 돈이 없어지거나, 혹은 자신이 그보다 더 낫게 되는 순간 지극하던 마음은 스르르 녹기 시작하고 귀하던 순간은 잊혀지게 되고 어려운 시절의 도움은 별 것 아닌 것이 된다.

여성의 신의는 그와 다르다. 여성에게 주어진 기회는 상대적으로 남자보다 작거나 드물어서 많은 경우의 여성들은 무한대의 욕망을 추구해 가기보다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끼리 정을 나누고 돕고 잊지 않으며 살아가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여성들은 작은 이해 관계에 골몰하는 듯 보여도 사실은 큰 신의에 강한 지속성을 보여준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여성 같은 남자가 얼마든지 있고 남자 같은 여성도 아주 많다. 그러니 내 사소한 견해는 남자를 공격함이 아니요, 여성을 쓸데없이 찬미함도 아니다. 대저 이해득실 덜 따지고 사람을 만나고 지켜 나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아무리 친하던 벗도 1, 2년을 안 만나면 불통이 쌓이고 그 빈 자리를 소문과 말전주가 채우고, 불필요한 오해와 기억의 착란이 서로의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고 마는 것이 요즘 세상의 괴로운 생리다.

어젯밤 나는 고등학교 동창 둘과 정든 `고향`의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야기가 진진할수록 소설 속 이야깃감이 많아질 것 같은 욕심을 채우느라 벗들을 오랫동안 거리에 붙들어 두었다. 셋이 앉아 있으니 안정감 있어 좋고, 셋 사이에 아무 이해도 없으니 괴로울 것도 없고, 옛날부터 친했으니 감출 것도 없었다.

그래서 서울서 만났다 헤어지는 사람들과는 다른 것이려니, 우리는 다들 여성인 것이리니. 여성다운 신의여야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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