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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문학 사회의 이면

등록일 2015-06-25 02:01 게재일 2015-06-25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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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br /><br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아주 오래된 일이다.

문학상 시상식 뒤풀이였는지 다른 문학행사 끝나고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나는 어느 여성 작가의 창작집에 해설을 쓴 후였고, 그녀를 포함한 몇몇 사람이 따로 떨어져 나와 뒤풀이를 하고 있었다. 그 여성작가는 예나 지금이나 이렇다할 소설은 쓰지 못하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확고한 주류 집단의 일원임을 확신하고 있을 것 같다.

그 무렵 그녀는 자신의 살 길을 위해 이른바 주류 집단에 소속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 작가가 큰 작품을 잘 쓰는 작가는 아니지만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한두번 만날 때 그런 뜻의 의사를 표명했었다.

그 말이 몹시 고까웠던 모양이다. 필시 내게 해설을 써달라고 한 것도 아주 후회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문단 주류와 꽤나 거리가 먼 사람임을 책을 내고야 알아챘던 것이다.

그 뒤풀이 자리에서도 나는 눈치없이 그녀에게, 물론 호의를 품고, 노력하면 더 잘 쓸 수 있을 것이라 말했던 것 같다. 그러자 그녀는 대뜸, 형이 날 키워줄 수도 없으면서, 왜 그 따위 소리를 하느냐, 앞으로 그런 소리 하지 말아라, 하고 일격을 가해 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주류가 아니기 때문에, 물론 나는 항상 내가 있는 곳이 내 삶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지만, 그녀가 내게 신경질을 내고 있고, 말하자면 그것이 일종의 절교 선언이나 다름없으며, 내가 그녀에 대해 어떻게 화를 내든 전혀 아랑곳하지 않을 정신적 태세가 되어 있음을, 용케 알아차렸다. 그 정도 눈치는 다행히 볼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 일이 아주 불쾌한 경험임은, 문단 아닌 다른 세상에서라도 비슷한 일을 겪은 분이라면 쉽게 알아챌 수 있으실 것이다.

문제는 그래도 문학을 한다는 집단에서 이런 일이, 한두번도 아니고 늘 있는 일처럼, 작가들 모이는 자리마다 벌어진다는 사실이고, 더 슬픈 것은 그런 작가들이 젊은 층에서 자꾸 출현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해한다. 젊을수록 미래가 불안한 시대라는 것이다. 안정된 직장을 구하지 못해 안달 난 젊은이들처럼 작가들도 문단에 올라서자마자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적응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를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갈급해 마지 않는다.

어쩌다 그런 여성작가들, 젊은 작가들이 모여앉은 모임에 우연히 나갔다 치밀어오르는 구토를 차마 참아내지 못하고 나와버린 일도 있다.

참으로 씁쓸한 것은 그렇게 비주류를 쫓아버렸다고 만족해 한 이들이, 평소에는 그렇게 여유롭고 이성적인 것처럼, 사려 깊은 자의 포즈를 취하느라 여념이 없으면서도, 금방 나가버린 사람의 험담을 분이 풀릴 때까지 두고두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수위를 가리지 않고 해댄다는 것이다.

그런 민낯을 내놓고도 아무런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자신들은 주류이고, 그 안에서 자신들끼리 인정해주고 서로 만족해 마지 않는 자칭 일류들이기 때문이다.

안습. 이런 때 쓰는 말이 아닌가 한다.

더욱 한심한 것은 나 자신은 주류가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 무슨 어이없는 망상이란 말이냐.

문단 시스템 문제가 나올 때마다 내가 늘 생각하는 것이 있다. `내` 스스로 나를 소외시키지 않는 한 누구도 그 사람을 완전히 소외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표절 사태로 시끄러운 문단이다. 그러나 비주류 작가들이여. 다들 힘을 내자. `나` 자신을 믿는 한 구조 따위는 한갓 허상에 지나지 않을 테니. 아무리 그 힘이 커보여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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