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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의 `조선상고사`

등록일 2015-05-28 02:01 게재일 2015-05-28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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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1880년 11월 7일에 나서 1936년 2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다. 지금의 대전에서 나서 중국 뤼순 감옥에서 옥사했다. 나는 뤼순의 파놉티콘식 감옥 고적지에 걸려 있는 그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는 1925년경부터 무정부주의에 경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민족사를 중시한 그의 시각이나 태도는 일관된 것이었다. 1931년경에 신문에 연재한 `조선상고사`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최근에 나는 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동명왕`에 관한 논문을 보충하는 문제로 `하는 수 없이` `조선상고사`를 펼쳐 들었다. `사랑의 동명왕`에 담긴 이광수의 역사인식, 특히 고조선이나 고구려에 대한 인식을 살피자면 이 책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꼭 읽어야 할 필요를 느끼기 전까지는 어떤 책도 한갓 물건일 따름이다. 그러나 일단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책은 살아있는 영혼으로 변한다. 두껍고 무거운 `상고사`와 함께 한 지난 며칠이 즐거웠던 것은 그 때문이다.

나는 선생의 살아있는 영혼, 그 숨결을 느꼈다. 그는 그 어려운 시대에 일제의 힘과 식민사관에 물든 무리들에 맞서 치열한 연구를 계속했다. 그의 저술은 한번 잡으면 놓기 어려운 매력을 발산하는데, 이는 그 책이 자신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묻고, 따지고, 논박하며, 자신의 견해를 명쾌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것이 정말 옳았느냐는 그 다음의 문제다. 역사를 대하는 근본적인 태도에서 그는 옳았고, 또 가히 존경할 만했다.

뿐만 아니라 나는 그의 넓고도 깊은 학문에 찬탄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중에서도 인상적인 것은 한문과 꼭 같지 않은 이두문에 대한 그의 해박한 이해였다.

이렇게 말하면, 또 어떤 분들은 신채호의 지리, 인명 인식이나 이두 해석에 오류가 적지 않았다거나, 나아가 그에 바탕한 역사 사실 인식에 문제가 많았다는 반론을 꾀할 수 있다.

과거의 책은 그 부분적인 인식 오류를 잡아내는 방식으로는 절대 참된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그 책이 기본 인식에서 옳았는가, 가치의식 면에서 본받을 만한가, 그 방향에서 새로운 생산성을 얻을 수 있겠는가 같은 질문이 제기되어야 하고, 거기서 고개를 끄덕일 만하다면 그 책은 귀한 고전이 될 수 있다.

신채호는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이두에 대한 이해에 기초해 있지 못함을, 신라사 기술의 신빙성 문제를 충분히 비판적으로 의식하지 않았음을, 중국 쪽 문헌들의 역사 기술에 과장, 은폐, 변개가 많음에 각별히 유의하지 못한 것을 따져 물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같은 태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눈으로 상고사를 재인식하고자 했다.

텍스트들을 연결짓고 갈라치고 분석하고 종합해 가는 그의 모습은 경탄을 자아낸다. 이로써 `조선상고사`를 쓴 그의 여러 덕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점이 모습을 드러내는 바, 그것은 바로 영감에 찬 창조적 상상력이다. 학문 연구라는 것도 상상력의 독특함과 탁월성에 의해서만 진실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그는 입증한다.

책을 읽어가며 나는 또 생각한다. 무엇 때문에 그는 그토록 고난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갔던가. 왜 그것을 자초, 곧 스스로 불러 들였던가.

사람은 누구나 한 평생을 산다. 어느 시인은 한 사람이 세상에 오는 것이 귀한 것은 그의 한 평생이 오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신채호, 그 대전 사람은 무엇 때문에 이역 만리 그 머나먼 곳에 가서 도서관의 역사책들을 뒤지고 비밀 결사에 참여하고 끝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해야 했던가.

세상을 권세 있게, 편하게, 배불리 사는 것보다 미래를 준비하며 찬 자리에 눕는 것을 가치 있고 복된 삶으로 여길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시대에 그와 같은 사람이 있었음을 눈물겹게 고마워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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