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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고 죽는다는 것

등록일 2015-04-16 02:01 게재일 2015-04-16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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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세상이 혼란스럽다.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로 304명이나 되는 귀중한 인명이 희생된 날이다. 꼭 1년이 된다. 이 1주기를 차분하게 맞이할 수 없는 세상이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해결된 것 없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아이들이 희생되어야 했는지, 아무도 이유를 정확히 모른다.

사람 하나가 죽어도 큰 사건이고 연유를 정확히 찾아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이 바다에 수장되었는데도, 정부는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하다. 하지만 그게 쉽게 마음대로 되나? 그 부모, 형제,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만 해도 1천명이 넘을 테고, 나아가 대한민국 국민은 한 다리, 두 다리만 건너가면 아는 사람들이다.

진실을 덮어두자고 해서 쉽게 덮이지 않을 바에는 진실을 알아내고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쪽이 낫다. 4월 들어 정부에서 희생자 유족들에 대해서 보상, 배상을 하겠다고 하고 그 액수가 얼마가 된다고 신문, 방송에 떠들썩하게 오르내렸다. 그러자 유족들이, 어머니들까지 삭발을 했다. 정부가 특별법을 무력화 시킬 만한 시행령을 만든다고 해서 광화문은 또 다시 술렁이고 있다. 그 시한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4월 16일이면 시행령 존폐 또는 개정 여부에 따라 유족들이나 국민들의 판단, 행동이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통이 그렇지 않아도 고조되는 지금이다. 이번에는 유력한 경제인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서 그가 남긴 메모와 비망록이 다시 한 번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

20대 때는 산다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져보지 못할 만큼 열정에 차 있었던 것 같다. 그때는 그런 질문을 던졌다 해도 답을 구하려 했다기보다 젊음의 멋에 취해서였을 것이다. 30대에는 세상살이의 차가운 논리에 눈 떠 어떻게든 모진 세상에 적응하려 온힘을 기울였던 것 같다. 서른일곱의 어느 가을날이 생각난다. 그날 젊음이라는 게 이렇게 끝났다는 확실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40대 때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어떻게든 감당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컸다.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는 위치의 감각, 인식이 꼭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그 자신을 얽어맸다.

이런 시간들이 모두 덧없이 흘러가 버렸다. 이제 그 고개 위에 섰다. 그런데, 가슴 한편으로 늘 찬바람이 분다. 살아간다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아슬아슬하기만 하고 위태롭게만 느껴진다. 그런 심정 위로 세상과 시대의 무겁고도 혼란스러운 사건들이 떨어져 내린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녹여내느라 지난 한 해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게 흘러갔다. 어떻게 작년의 이맘 때를 맞이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이런 식으로 인생의 소중한 시간들이 모래시계의 모래가 흘러내리듯 빠져나가 버린다면 이 삶은 얼마나 허무하고 허망할 것이냐.

우리 삶이 이런 식이어서는 안 된다고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사람이 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태어나고 죽는 것이 아니던가. 우리는 어디에서인가 이곳으로 와서 또 어딘가로 떠나게 마련이다. 다들 알고 있듯이 이 세상은 우리가 잠시 머물다 가는 정류소다. 우리가 영원히 있을 곳에 있지 않고 반드시 떠나지 않으면 안 될 곳에 머물러 있다는 이 사실을 하루에도 몇 번씩 자각해야 하는 게 아니던가.

그러면 이 정류소에 함께 머물고 있는 사람들은 그 얼마나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인가? 우리는 적과 동침해서는 안 되며 친구이고 애인이고 부모형제 같은 사람들과 손을 맞잡고 살을 부비며 서로 아껴주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도로, 4월 16일.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슬픔과 혼란을 더한 이 날을 맞으며 필자는 생각한다. 죽은 이들이 우리와 꼭 같이 귀중한 생명을 타고난 사람들이었음을 잊지 말자고. 그리고 예의를 지키자고. 그것이 바로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가치를 지키는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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