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댁에 다녀오던 밤이다. 그날 따라 모인 사람들이 적어 선생님께도 죄송하고 마음도 울적했다.
분당에서 서울로 올라와 그날 모인 사람들끼리 술을 한 잔 하고 마음을 나누다 헤어지고 나자 대리운전을 요청해야 했다.
-신촌 가주세요.
-예에.
기사분이 얼굴이 울퉁불퉁 언뜻 보면 꽤나 험상궂게 보일만한 데다 말씀도 없으시다. 몇 마디 코스를 묻고는 말문을 닫기에 나도 옆자리에 앉아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앉았을 수밖에.
차가 반포대교로 갓 들어섰을 때다. 이분이 갑자기 무슨 말씀인가를 하시는데 처음에는 그게 혼잣말인 줄 알았다.
-여자 때문에 십 년 공부 도로아미타불, 그 누구죠?
-네?
-왜, 있잖아요. 그 황진이하고.
-아, 지족선사요?
-그렇지. 지족선사. 내가 바로 그 꼴이우.
-네?
나는 이 양반의 뜬금없는 소리에 내심 궁금증이 인다.
-도 닦겠다고, 출가한 지 20년만에, 팔자가 바뀌려고 그랬는지 술집엘 갔다우.
거기서 이 분은 어떤 이혼녀를 만났단다. 아이가 딸려 있는 여자였다고 한다. 이 분은 20년씩 도만 닦아온 사람이고 여자도 외롭고 힘들게 살아오던 차, 사랑이 불꽃처럼 일어났더란다. 여자에게 빠져 마음공부니 도닦는 일은 팽개쳐 버리고, 어떻게든 사랑에 매달리려 했더란다. 그런데, 아이 딸린 여자는 간단치 않더란다. 사랑도 사랑이지만 모성애가 무섭더란다. 거기에 술집 나오는 여인은 돈이 필요한 것인데, 도만 닦은 가난한 몸으로 어떻게 여자를 만족시켜 줄 수 있나?
결국 여자는 떠나고 남자는 여자도, 마음공부도 다 잃어버리고, 산에서 아예 내려올 수밖에 없더란다.
-고생하셨겠어요.
-괜찮아요. 요즘엔 이 일 해서 돈 벌고, 외로우면 술집 가서 한 잔 하고. 사랑 같은 건 참 어렵디다.
나는 유난히 차를 천천히 모는 이 분의 얼굴을 옆으로 슬며시 훔쳐본다. 첫인상으로 험하게 보이던 것은 어디로 사라지고 웬 얼굴 깨끗한 중년의 사내가 앉아있는 것 같다.
-도는 어떻게 닦으신 거죠? 절에 계셨나요?
-중은 아니었고. 그냥 스승도 없이 혼자 닦았어요. 그러니까 도닦는 방법도 남에게 가르쳐 줄 수도 없고. 다만 20년 공부로 마음 비우는 연습은 한 셈이지요.
이제 이 분의 말씀은 도 닦는 것, 그러니까 마음 비우는 이야기로 본격적으로 옮겨간다. 마음을 비운다? 어떻게 해야 하나?
수행을 해야 한단다. 그냥 되는 건 아니란다. 앉아서도, 누워서도, 길을 가면서도 마음을 비우는 수행을 할 수 있단다.
우리는 내 주소지에 도착해서 대리운전비까지 주고받았는데도 서로 헤어지지 못했다. 주차장에서 함께 걸어나와 그 입구에 서서 한참을 그분은 말씀하시고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고 있었다.
어디서들 자꾸 신호가 오는 것이 이제 이 분이 또 다른 차들을 운전하러 가실 때가 되었다. 우리는 몹시 아쉬운 친구들처럼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나는 그 분이 허청허청 언덕길을 걸어내려가는 것을 바라보다가, 이윽고 밤하늘을 오랜만에 올려다 보았다.
한밤. 한 시 반은 족히 된 시간. 지금 이 길을 걸어내려간 사람은 누구신가?
내 삶이 몹시 어지럽고 힘든 것을 아시고 홀연히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신 무슨 보살은 아니셨는가?
힘을, 기운을 빼고, 마음을 비우고 살고 싶다. 조금만이라도, 순간순간만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