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가면서 책 두 권을 들고 갔다. 그 중 한권이 조지 오웰의 산문집.`나는 왜 쓰는가`하는 제목의 산문집이다. 왜 쓰는가. 너무 근본적인 질문이어서 혼자 여행할 때 부담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언젠가 다 읽지 않은 게 늘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다.
그 중에 사형수를 처형하는 얘기를 써놓은게 있었다. 조지 오웰은 원래 영국 사람이지만 버마에서 경찰을 했다. 식민지를 다스리는 경찰이니 결코 좋은 일을 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 일을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다. 경찰 일을 하면서 오히려 영국이 식민지를 끝까지 다스릴 수 없고, 언젠가는 물러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버마 사람들은 이 젊은 영국 경찰 머리속에서 그런 의식이 작동하고 있다는 걸 알 리 없었을 것이다. 그는 흔해빠진 지배자의 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실제로 그도 코끼리를 총으로 쏘면서 정말 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보고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쏘지 않을 수 없었노라고 했다. 코끼리를 쏘아 목숨을 끊어놓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식민지 경찰의 위엄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해 있는 자기를 의식하면서 일종의 연기를 펼쳤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생각이 달랐고 지배자의 일원인 자기를 의식함으로써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그런 그가 어떤 인도 사람 하나를 처형하던 일을 써놓은 수필이 흥미롭다. 그 사람은 젊은 생명체였고, 그 점에서 조지 오웰 자신과 다를바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를 처형하는 사람들의 일행이었다.
그는 이 과정을 지극히 냉철하게 묘사했다. 죽음을 향해 무심하게 힌두교 주문을 향해 걸어가는 그 남자는 태연하게 물웅덩이를 피해 걷는다. 조지 오웰은 그런 행동에서 그가 살아 있는 사람임을 깨닫는다.
나는 이 사형수 이야기를 읽으며 여순 감옥에서 그렇게 죽어간 안중근과 신채호를 생각했다. 이역만리에서 처형당하고 병사해야 했던 그들은 얼마나 아름다운 생명들이었던가.
자기 한 목숨을 바쳐 숭고한 뜻을 이루려는 사람은 아름답다. 조지 오웰이 그 인도인의 이름을 밝혀놓았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예전에 이돈화라는 천도교 운동가가 쓴 `천도교 창건사`라는 것을 보았더니 거기에 동학혁명에 참여해서 생명을 바친 사람들의 이름이 여러 줄에 걸쳐 나열돼 있었다. 이름 석 자가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죽으면 다 끝인 것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이름으로 그 사람의 값진 삶이 거기 그렇게 존재했음을 기억해 두는 것이다. 조지 오웰은 그 인도 사람의 이름을 써놓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 일을 겪으면서 자신이 다른 세계에 속해야 하는 사람임을 절실히 깨달았던 것 같다.
그의 산문집은 오로지 그 자신만이 쓸 수 있는 경험세계를 다른 어디서 볼 수 없는 어조와 문체로 기록하고 있다. 이 산문집 속에는 서점 이야기도 있다. 그는 별스런 직업들을 다 전전했던 것 같다. 또 전쟁에 관해서도 남들과 전혀 다른 것을 보고 말하고 있다. 진귀한다는 것, 그것은 이런 글들을 가리켜 말하는 게 아닌가 한다.
삶을 진짜로 살고, 글도 진짜가 되는 게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이 칼럼만 해도 벌써 2년이 되는데, 그 사이에 과연 나는 나 자신의 눈과 목소리만으로 이루어진 글을 썼는가. 아니면 적당히 타협하고 눈치보고 했던 것은 아닌가.
글은 이름 석자처럼 무서운 것 같다. 조지 오웰 같은 사람과 글이어야 값어치가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시간이 이렇게 오래 흐르도록 그를 기억하는 뜻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 아니겠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