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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추석은 아주 길었다

등록일 2012-10-04 21:29 게재일 2012-10-04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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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올해 추석은 아주 길었다. 마음이 한가로워서였을 것이다. 8월, 9월은 몹시 힘들게 보냈는데, 급한 일들을 어떻게든 마감을 짓자 갑자기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추석 전전날에 대전에 내려갔다. 전날에는 고등학생 때 추억이 깃든 옛 도시 중심가를 걸었다. 그곳도 역시 변하기는 했다. 옛날에는 브라암스가 있었고, 얼마전까지 쌍투스라는 커피숍이 있었다. 지금은 젊은이들이 왁자지껄 드나드는 로바다야키가 들어섰다. 대신에 쌍리라는 조용한, `요즘스럽지` 않은 찻집이 생겼다. 오래 못 만난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차례를 지내고 서울로 올라와 장인이 계신 파주에 다녀오자 어쩐지 모든 의례를 다 끝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다음날은 일찍 학교에 나갔다. 월요일이었을 것이다. 불교방송 라디오에 잠깐 들러 생방송 10분을 한 뒤다. 아무도 없는 인문대학 캠퍼스가 그렇게 마음에 들 수 없다.

연구실에 들어가자마자 방 청소를 하고 책들을 새로 배치하기 시작했다. 매번 수업에, 회의에, 논문에, 평론에, 출판에, 약속에 쫓겨 다니다 보니 마음은 늘 분주하고, 연구실에 들어앉아 있어도 마음은 바깥에 있을 때가 많다. 아홉 시 반쯤부터 시작한 정리는 네 시가 훌쩍 넘어서야 끝났다.

이제 다 된 것 같다. 있을 게 있어야 할 곳에 있는 것 같다. 당장 필요할 때 필요한 책을 찾을 수 있다는 건 기쁜 일이다. 이제 `문학사상`소설 부문 신인상 응모 원고들을 보아나갈 차례다. 놓일 곳에 놓여 있는 원고들을 우편봉투에서 꺼내 하나하나 읽어간다. 예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구성이며, 문장 솜씨 같은 것들이 눈에 더 잘 들어온다. 한참을 끈기 있게 찾아 읽어가자 마음에 드는 작품들이 두세 편 있다. 그만하면 나머지 응모 원고들 중에도 고를 만한 작품이 있을 테니 오늘 성과는 이것으로 되었다.

그러자 찾아뵈어야 할 선생님들을 찾아뵙지 못한 늦은 생각이 난다. 한 분 선생님께는 미리 전화도 드렸지만 다른 분께는 추석 전에 인사조차 못한 게 마음에 걸린다. 그런데 오늘은 운이 좋다. 이 분과, 이 분이 아끼는 `늙은` 박사 한 분과, 언제 저녁 식사라도 하시자고 전화를 드렸는데, 마침 두 분이 같이 있다고 당장 올 수 있으면 오라시는 것이다. 학교에서 양재동까지 택시로 삼십 분. 가니 선생님과 선생님의 `학생들` 셋이 함께 앉아 있다. 선생님께서 요즘 어떠냐고 물으신다.

선생님, 이제부터는 글을 가려 쓰겠습니다. 글 많이 쓴다고 좋은 글 쓰는 것은 아니고, 몸도 좋지 않으니, 이제는 공부 절반, 운동 절반 하겠습니다. 눈이 좋지 않아졌으니 밤 아홉 시가 넘으면 책을 읽지 않고 대신에 아침에 일어나 공부하겠습니다. 마음 급하게 먹지 않고 차근차근 하루에 200자 원고지 스무 장만 써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술도 가려 먹고 사람도 가려 만나겠습니다. 이 말씀은 밖으로 내지 못했다.)

어제는 다시 학교에 나갔다. 심사 원고들을 다 읽고 그 가운데 서너 편을 추려냈다. 도서관에 반납하려고 그렇게 찾아도 없던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집 `고독한 자유`를 찾았다. 이 가운데 `지금은 죽은 왕녀를 위하여`와 `거울`을 읽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북한산에 올랐다. 이북5도청 쪽으로 올라가 대남문, 대성문 지나 형제봉 거쳐 평창동 쪽으로 내려왔다. 산에 오르니 바야흐로 가을 기운이 세상에 가득하다. 문득 어제 휴대폰 메모에 써 둔 시 구절을 생각한다. “돌아가는 길은 / 오던 길 꼭 그대로인데 / 왜 이렇게 가슴이 막막한지요”.

나는 벌써 하산을 생각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마음이 한가롭다. 이번 추석은 유난히 길다. 아무래도 내 인생이 한 번 또 변하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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