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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등록일 2012-10-25 20:36 게재일 2012-10-25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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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그날 나는 학교 가는 버스를 타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내가 살던 동네 태평동도 변두리지만 학교는 더 먼 변두리에 있었다. 학교에 가려면 시내버스나 스쿨버스, 아니면 자전거를 이용해야 했지만 그 어느 것도 시간이 꽤나 걸렸다. 시내버스가 다니는 신작로까지 한참 걸어간 후 버스를 타야했다. 등교시간에는 언제나 만원. 버스 안내양 누나가 배로 금방이라도 터질 듯 한 김밥 버스에 밥알들을 밀어 넣으며 오라이를 외치면 버스 기사 아저씨가 급브레이크를 밟아서 김밥 속을 정리했다.

버스 앞문과 뒷문 중간쯤에 겨우 버티고 서서 한손으로는 터질 듯한, 또 다른 김밥 책가방을 붙들고, 다른 한 손으로 천장에 매달린 손잡이를 잡고 거친 운전솜씨에 적응하려고 안간힘을 쓰다보면 어느 사이엔가 라디오 소리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마음이 점차 안정되면서 학교 앞 정류장에 내릴 때까지 이것저것 공상이나 하는 것이다.

그때 라디오가 무슨 소식을 전해주고 있었다. 흔히 틀어주는 정규방송이 아니었다. 학생들도, 어른들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것은 대통령 유고를 알리는 소리였다. 여기저기서 작은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기억에는 그것이 여학생인지 남학생인지 분간되지 않는다. 그쪽 노선으로 여학교가 없었으니 그것은 남학생들의 울음소리였을 것이다. 그때 나도 눈물을 흘렸다. 우리 대통령이 돌아가시다니….

몹시 슬프면서도 세상이 곧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불안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대통령이라는 직함이 박정희라는 이름이나 마찬가지로 고유명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박정희라는 세 글자와 동의어였다. 나는 1965년생이다. 기억이 허용하는 유년의 시절부터 언제나 대통령은 그분이었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교사였고, 나중에 장학사를 거쳐 교장선생님이 됐다. 나는 학교의 질서를 적어도 겉으로는 따르는 소년이었다. 종신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은 세상이 곧 그를 따라서 끝날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학교도 그날 하루종일 뒤숭숭했다. 물상 선생님은 늘 전날 마신 술이 안 깬, 벌건 얼굴로 수업에 들어와 학생들을 쥐 잡듯 혼내곤 했는데, 그날은 그렇지 않았다. 그때까지 완강하게 지켜져 온 질서가 어떻게 해서 깨어지게 되었는가는 생각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 다음해 봄이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 교정 옆 언덕에는 같은 재단에서 지은 상고가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함성 소리가 나면서 고등학생 형들이 전부 운동장으로 쏟아져 내려왔다. 큰 사변이라도 난 것 같았다. 중학생인 우리들 수업도 중단되고, 선생님들이 모두 운동장으로 나갔다. 체육 선생님이 학생 주도자 같은 형에게 다가가 뺨을 때리며 무엇이라고 혼을 냈다. 고등학교 전교생을 그 자리에서 `엎드려뻗쳐`를 시켰다. 그것이 역사 속에서는 `서울의 봄`이라고 했던 때의 사건이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내게 체제는 무엇이 되었든, 한국식 민주주의가 무엇이든 아무런 상관 없는 일이었다. 나는 국민교육헌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우는 어린이였다. 반공 웅변대회에 여러 번 나가봤고, 전교 어린이 회장을 했다. 아침마다 교장선생님이시기도 한 설립자의 훈시를 교실마다 설치된 마이크로 듣고, 일요일 아침에는 같은 반 학생들끼리 유등천변에 풀을 매고, 도랑을 치러 삽을 들고 나갔다. 대통령의 사진과 훈시는 국민학교 때나 중학교 때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분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존경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그 분의 일자걸음을 본받으려고 쉬는 시간에 화단에 나가 좁은 경계석 위를 걸어가는 연습을 하곤 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분의 세계가 끝났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엔 아직도 그분의 신화가 살아 있어 다른 생각을 하려는 나를 잡아끈다. 그 분의 역사는 아직 제대로 평가될 수 없다. 모든 평가는 신화가 물러나고 이성이 제대로 작동할 때 이뤄지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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