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리는 밤에 평론가와 소설가와 시인이 만났다. 평론가와 소설가는 본래 친분이 있던 터라 언제 한 번 보자고 벼르던 게 그 밤이 되었다. 평론가는 최근에 시집을 낸 시인이 생각나서 합석을 하자 했다. 시인이 한 사람 더 동반해 와서 일행은 모두 합해 넷이 되었다.
네 사람은 `오늘도`라는 간판이 달린 소설가의 단골 음식점에 모여 앉았다. 그날 자리를 처음 제안한 소설가께서 포항에서 고래 고기를 공수해 오고 일본 술까지 가져왔다. 술자리가 아주 고급스러워졌다.
네 사람 다 이제는 사십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들. 시끄러운 곳은 귀가 감당을 못해 가지 못한다. 아무나 하고 어울리는 성품들도 못 된다. 낯선 곳 찾아다닐 모험심조차 잃었다. 단골 음식점의 따로 나 있는 조용한 방 같은 곳이 이런 사람들 모임에는 제격이다.
소설가와 시인은 자주 어울린 사이가 아니다. 그러나 진귀한 안주가 있고, 고급 사케까지 있으니, 자리는 금방 풀어져 버린다. 정치 얘기도 하고, 고래 고기 칭송도 하고, 시집 얘기도 한다.
열시쯤 되자 집이 경기도 여주라는 시인의 친구는 퇴장을 선언한다. 나머지 셋은 자리를 사케집으로 옮겨간다. 이번에는 줄곧 일본술로 `달려` 보자는 소설가의 제안이 있으셨던 까닭이다.
밖에는 눈이 내린다. 술집 안에는 사람들이 많다. 벌써 세 사람은 주변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박정희, 박근혜 얘기도 나오고 박태준 얘기도 나온다. 이 이름들이 모두 소설가의 인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까닭이다.
평론가는 난데없이 무라카미 하루키를 만나러 하와이에 갔던 일을 소설로 쓰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삶을 대하는 태도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하루키가 `선언`했던 것처럼 고독한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또 하나는 자신의 삶을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공적인 일들이 자신의 일이 되기도 한다. 나머지 하나는 삶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다거나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에게 지상에서의 삶은 무한자에 귀의하기 위한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는다. 자유도 희생도 필요 없다.
평론가는 탁자 위의 그릇들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탁자 위에는 술잔과 물컵과 시인이 들고 온 테이크아웃 커피 잔이 놓여 있다. 사람들은 마치 술잔과 물컵과 커피잔이 다른 것처럼 다른 유전자를 따라 세 가지 삶의 유형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한 삶이 자신의 의사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그들은 유전자가 시키는 일을 할 뿐이다. 그러니까 세상은 이상적인 곳이 될 수 없다. 타인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 아무리 애써도 언제나 나머지 두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세상은 근본적으로 나아질 수 없다.
그러자 소설가가 말한다. 자신은 요즘 술잔과 물컵과 커피잔이 놓여 있는 탁자에 관해 생각한다고 한다.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라 해도 그 다른 사람들이 근원적으로 공유할 수밖에 없는 탁자는 무엇이겠는지 묻는다고 한다. 그것은 의식주일 수도 있고, 의식의 최대공약수일 수도 있겠다. 그는 늘 역사에 관심이 많다. 이제 그것을 움직이는 근본적 요인을 찾고 싶어 한다.
시인이 묻는다. 같은 탁자라 해도 술잔과 물컵과 커피잔에게는 각기 다른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 술잔에 있어의 탁자는 물컵에 있어서의 탁자와 같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것들은 다시 커피잔에 있어서의 탁자와도 다를 것이다. 평론가가 주석을 단다. 그러나 역시 탁자는 하나이지 않느냐. 이 탁자가 그 셋에게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을 수는 있다. 그럼에도 탁자는 여전히 하나다. 그것의 의미를 물어볼 수 있다. 시인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바깥으로 나오자 눈이 그쳐 있다. 머리가 어쩐지 더 무거워진 것 같다. 과음을 해서인가. 그러나 마흔도 중반을 넘어서 버리면 다들 생각이 근원에 다다르고 싶어지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