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를 향한 내 의문에 답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하루키도 이미 변했다. 하루키라는 존재가 한국문단에 그 존재를 뚜렷이 한 때는 1990년대 전반기. 그때 문학사상사에서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상실의 시대`로 번역해 들인 것이 공전의 히트를 쳤다. 일본 68혁명 세대의 패배를 노래한 이 음유시인 기질의 작가는 한국에 들어와 80년대 학생운동의 패배감에 젖어 있던 세대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당시의 X 세대들은 그의 신도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1980년대에 학생들이 `창작과 비평`이나 `김수영시전집`을 들고 다녀야 고상한 티가 났다면, 그때는 하루키 책 한 권쯤은 들고 다녀야 시대를 아는 청년으로 취급되는 듯했다.
하루키의 어느 단편소설에서 주인공이 이렇게 독백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절대로 사회 문제의 개선을 위해 애쓰지 않을 것이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동안 또 다른 숱한 문제들이 생겨나는데 왜 그런 부질없는 싸움을 위해 내 귀중한 인생의 시간들을 허비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이런 하루키를 혐의쩍어 했다. 많은 이들이 하루키 노선을 따라 공적인 문제를 생각하는 삶에서 사적인 삶의 세계로 인생 전환을 해나갔다. 내가 중요하고, 나의 자유가 중요해졌다. 언론은 386세대와 X세대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는 것처럼 보도를 했다. 왕가위 감독이니, 하루키니, 서태지니 하는 기호들이 새 시대 개막을 알리는 나팔 소리처럼 간주되는 때였다.
그때 나는 지하생활자 같은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시대는 바뀌어서 나처럼 세상을 변혁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설 자리는 없어졌다. 그러나 세계가 부조리하며 더 정의롭게 되어야 한다는 감각만은 남아 있었기에 진군하는 시대와 호흡을 같이 할 수도 없었다. 새로운 시대를 구가하는 이들이 이상을 품는 것은 부질없다, 우리는 한갓 개체일 뿐이다, 사회 따위에 관한 고민은 벗어버리고 나와 너만을 생각하자고 할 때, 나는 그런 주장을 선뜻 받아들일 수도, 철 지난 꽃을 아름답다고 말할 수도 없는 어정쩡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나 또한 내 자신의 삶을 위해 싸워 나갔다. 아니, 그런 쪽으로 오히려 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는지도 모른다. 세계가 내게 냉담하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사실이 자명한 진리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남은 자는 슬퍼할 수 있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죽어가는 자는 살아남으려고 애쓰느라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시대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하루키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대학원에서 시간강사로, 전임 교수로 건너뛰어 오는 동안 간간히, 그러나 늘 과연 나는 이 지극히 사적인 삶에 만족해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했다. 나는 늘 공적인 문제를 취급하고 있는 듯한 포즈를 취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포즈의 이면에는 집요하게 나 자신을 관철시키려는 욕구가 도사리고 앉아 나라는 가면을 조종해 나갔던 것 같다. 세상이 내게 냉담한 때는 어떻게든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나 보복하고 싶은 마음이 들고, 세상이 나를 반겨주는 것 같으면 자기도 모르게 그 온기가 선사하는 쾌락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추석 연휴 때 나는 내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이 식사를 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는 주위를 의식하지 못하고, 내가 주시하고 있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밥을 먹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평소에는 꽤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인데, 그날은 그렇지가 않았다. 타인을 의식하지 못한 분주한 손과 입은 그의 모습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하나의 명제가 떠올랐다. 사적이기만 한 삶은 추하다.
남을, 타자를, 사회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욕구를 가장 중시하고, 자신의 자유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추하다. 나를 쳐다보는 타인의 시선은 단지 눈빛인 것이 아니라 내 외부 세계의 존재를 상징한다. 공공성에 대한 천착이 없는 삶은 아름답지 않다. 나는 이렇게 하루키의 질문에 대한 잠정적인 해답을 내놓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