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학교 후배가 대학에 취직하는 문제로 몸살을 앓은 일이 있다. 멀리서 이 일이 되어 가는 과정을 바라보며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대학 교수가 되는 일은 참 어렵다. 그 어려움은 고시에 합격하는 것과도 다르다. 고시 같은 것은 점수를 높게 받으면 그 순서대로 합격 통지를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대학에서는 그와 다르다. 아무리 좋은 학교를 나와도, 아무리 논문 실적이 많아도 그 사람이 취직되리라는 보장이 없는 게 바로 대학의 교원 임용 과정이다. 학과마다 필요로 하는 사람의 특성이 다르고, 그 학과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학맥이나 인맥이 다르다보니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이 꼭 선택된다는 법이 없다. 어떤 때는 남자라서 안 되고 어떤 때는 여자라서 안 된다. 어떤 때는 특정 종교를 믿지 않기 때문에 안 되고 또 어떤 때는 믿기 때문에 안 된다. 더구나 매번 한 사람만이 선발되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도전해도 매번 좌절하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렇듯 교수가 되는 정법이 없기 때문에 웃지 못할 일이 다종다양하게 생겨나는 것이 대학 인사다. 밖에서나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보면 저것이 지성의 전당이라는 대학에서 벌어지는 일이냐고 아연실색할 일이 버젓이 행해지곤 하는 것이 대학에서의 취직 일인 것이다.
그런데 이 후배는 다행히도 자신을 이끌어주는 사람이 있었다. 연구 실적이 좋았기 때문에 주관이 개입하기 어려운 1차 심사인 서류 심사를 거쳐서 2차 심사에 해당하는 공개강의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어떤 우여곡절을 거쳤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이 후배는 2차 심사 과정도 무사히 마치고 마지막 심사과정에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웬만한 학교들은 대체로 2차 심사를 거쳐 올라온 성적표를 인정해서 1위로 올라온 사람을 낙점해 주게 마련이지만 사립대학 같은 경우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 3차 심사에서 순위가 싹 바뀌어 `엉뚱한`사람이 낙점을 받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1순위, 2순위, 3순위자까지 모두 자격이 부적합하다 해서 이른바 `나가리`를 만들어 버리는 경우도 많다.
결과적으로, 가슴을 졸이며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마지막 관문을 이 후배는 제대로 통과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테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이 사람을 이끌어 줄 수 있는 마지막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회 초년생 시절에 나는 그와 정반대의 경험을 했다. 그때 나는 세력도 없고 갈 곳도 없는 박사졸업생이었다. 졸업하고 나서 두 학기를 몇 곳에 원서를 냈지만 소득이 없었다. 내심 연구 실적이 꽤 만만찮다고 생각하던 터에 이곳저곳에서 `낙지국`을 먹고 나니 낙심천만이었다. 세상이 나를 배척한다는 서운한 마음과 더불어 도대체 어떻게 해야 사회에 입문할 수 있는지 난감하다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빠져 있었다. 용케 2차 심사까지 세 곳 다 올라갔지만, 또 3차 심사까지 올라가서도 더 이상 문을 열어주지 않는 세상을 어떻게 상대해야 한단 말인가?
참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뻗쳐왔다. 나와 어떤 일면식도 없고 관련도 없었던 분이 내 서류만을 보고 호의를 품으셨던 것이다.
세상이란 뭔가? 그것은 세대에서 세대로 삶을 이어주고 이어받는 것이다. 아랫세대 사람은 늘 부족하고 약하다. 그러나 후생가외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윗세대는 잘 살펴서 이끌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 역할을 잘 하면 할수록 사회는 더 나아질 것이다. 물론 그분이 그때 잘된 선택을 하셨는지 나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