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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극공화국 구상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어차피 우리나라도 몹시 춥기 때문에 얼마 전부터 나는 남극공화국을 건설하면 어떨까 하는 상상 어린 생각을 해보곤 한다. 지구상에 어느 나라든 나라 땅이 없는 곳은 없기 때문에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은 땅을 찾다 보면 결국 남극밖에 떠오르는 곳이 없다.그런데 이 남극에 관해서는 남극조약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이를 먼저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이 조약의 내용을 먼저 살펴보자. 첫째, 남극 지역은 평화적 목적에만 이용할 수 있고 특히 군사기지나 방비 시설을 설치할 수 없다. 둘째, 과학적 조사를 행할 수 있고 이를 위해서 국제협력을 할 수 있다. 셋째, 남극 지역에 대한 모든 영토 및 청구권 요구를 동결한다. 그러니까 주장들은 하고 있지만 아직은 무주공산이라는 것이다.그렇다면 과연 이 남극에 공화국을 건설할 수 있을까? 나라를 건설하려면 영토와 국민이 있어야 하고, 독자적인 주권을 확립해야 한다. 그러면 영토는 얼마나 잡을 수 있을까? 사전에 따르면 이 대륙의 면적은 약 1천310만1천㎞로 추정되며, 대륙 연안의 붕빙의 면적을 합하면 1천412만㎞나 된다. 이것은 오스트레일리아(768만7천㎞) 면적의 약 2배가 된다. 넓다. 국민은 몇 명이나 되나? 현재로서는 나 혼자다. 그러나 이 글을 보고 여러 동조자가 나올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남극공화국 건설에 참여하는 사람이 어느 정도라도 된다면 먼저 남극 대륙으로 건너갈 배를 사야 할 것 같다. 메이플라워호 같이 신대륙을 찾아가는 멋진 배를 말이다. 그리고 아직 발설할 단계는 아니지만, 만약 정 동조자가 없다면 그냥 혼자라도 가서 펭귄들을 국민으로 삼는 방법도 있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단 그들을 사람 취급을 해주든지 내가 펭귄이 되는지 하는 방법이 필요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주권이 문제인데, 이것은 남극조약에 의하면 쉽게 풀 수가 없는 문제다. 그런데 한 가지 원용할 방법이 있기는 한 것 같다. 일단 가서 공화국을 수립하고 몇 십 년이라도 사는 것이다. 그러면 그 시간에 따른 점유권이 인정될 것이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소유권으로 전환하는 일도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그러면 기본 구상은 끝난 것 같다. 그런데 이곳이 과연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인지를 따져보는 일을 빼놓을 수는 없다. 또 같은 사전에 따르면, 무엇보다 그곳은 춥다. 심하게 저온이다. 남극 중심부는 가장 따뜻할 때가 평균 영하 30℃, 가장 추울 때는 영하 70℃다. 그리고 보스토크 기지라는 곳이 1960년에 영하 88.3℃라는 세계 최저의 기온을 기록했다고 한다. 이 기온에 적응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하나 믿는 게 있다. 실제 기온과는 다르게 체감 기온이라는 게 따로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따르면 우리나라도 남극 못지 않게 춥다. 그러니까 나는 이미 저온에 단련될 대로 단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다음으로는 먹을 게 있어야 한다. 생각해 보자. 무엇보다 물이 많아야 하는데, 이것은 얼음이나 눈을 녹일 연료만 있으면 만사 오케이다. 걱정할 게 없다. 그러나 연료는 또 어디서 구해야 하나? 철저한 조사를 위해서 다시 그 사전을 참고해 본다. 남극 대륙에는 석탄, 은, 주석, 우라늄 같은 자원들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 잘 되었다. 남극으로 이주할 때 삽이나 괭이 같은 것을 많이 가지고 가서 성심껏 파면 연료 걱정은 기우에 불과할 것 같다. 하지만 양식은 또 어떻게 하나? 남극 대륙 주변에는 고래가 많이 살고, 바다사자도 있고, 펭귄도 있다. 얘네들을 주식으로 삼을 수도 있겠지만 국제협약도 있고, 또 어쩐지 동족 같은 느낌이 나니 그럴 수는 없다. 하는 수 없다. 지금으로서는 비닐하우스를 짓고 난로를 때서 벼나 채소를 재배하는 수밖에.이것이 나의 계획이다. 비록 충분치 못하기는 하지만 한 가지 약속해 줄 수는 있다. 나로서는, 구성원들을, 형편이 닿는 한, 어떻게든, 따뜻하게 대해 줄 거라는 사실이다. 그게 사람이든 펭귄이든 말이다.

2014-10-02

우리 근대문학관을 생각한다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지난 주에는 도쿄에서 베이징으로 두 나라의 현대문학관들을 돌아보는 강행군 여행을 했다. 도쿄에서 1박하고 베이징에서 2박으로 귀국했으니, 피로하다면 피로한 여행이었던 셈이다.일행은 국회의원인 도종환 시인, 평론가 염무웅 선생, 그리고 국립도서관의 관계자 분들과 나, 그렇게 7인이었다.도쿄에서는 일본 근대문학관, 일본 민예관, 가나가와 현립 문학관을 살펴보았고, 베이징에서는 중국현대문학관과 루쉰 기념관 현황을 접할 수 있었다.무슨 일이든 어떤 과업을 설정하고 그것을 이뤄내려고 생각하면 쉬운 일이 없다. 의미와 가치가 깊고 높은 것일수록 더욱 그렇다고 봐야 한다.아주 오래 된 일이 되어버렸다. 1997년 2월, 그때 나는 후쿠오카, 오사카, 교토, 도쿄로 이어지는 10여일 여행을 했다. 일본 국제교류기금의 초청을 받았는데, 그 당시 아무 문학상의 실적도 갖지 못했던 나로서는 과분한 기회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그 여행은 나를 크게 변화시킨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그 무렵까지만 해도 나는 한 마리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다. 현실의 부조리에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저항하는 것에 제법 큰 가치를 부여하고 국문학 공부는 게을리하면서 평론이나`일삼는`나날을 보내고 있었다.안으로는 그러한 나 자신에 대한 불만이 꽉 차 있으면서도 그 상태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나를 바꾼다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길을 알지 못했다. 그 겨울이 돌아오기 전의 몇 개월은 참혹한 번민과 방황의 시간이었다. 그때 나는 혼자 배를 타고 인천에서 텐진을 통해 중국으로 가서 6박7일을 보낸 적도 있었다.일본 여행의 기회는 내 의식에 심각한 격변을 가져왔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폭력적으로 지배하고 가혹한 수탈을 행했지만, 자기 나라의 전통과 문화에 대해서는 끔찍할 정도의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 숱한 일본의 절과 신사와 문학관과 전통적 거리와 책들은 나로 하여금 나의 나라 한국의 문화적, 문학적 상태에 대해 각성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듯했다. 알에서 새가 나오듯, 고치에서 나방이 나오듯, 나는 깨어나야 했고 탈바꿈하지 않으면 안되었다.우리 또한 우리의 전통과 문화적 정체성을 확고하게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그래서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것이라도 좋다 했던 어느 시인의 역설처럼, 그런 것을 갖출 수 있다면 차라리 국수적이라는 비난을 들어도 감수할 수 있으리라고 혀를 깨물면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던 것이다.일본에서 돌아와서, 나는 내 공부의 방향을 수정했고, 비평의 색조를 바꾸었다. 이름하여 전향이라면 전향이다. 남이 뭐라 해서, 얻어 맞아서 한 전향이 아니요, 내 마음속에서 저절로 우러나 한 전향이니, 아무 후회할 것 없는 기쁜 생각의 바뀜이었다고 할 수 있다.그 무렵부터다. 한 사람의 한국문학 관계자로서 나는 우리도 문학관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키워왔다. 내가 상상하는 우리의 근대문학관의 형상을 글로 지어 어느 지면에 발표하기도 하고, 근대문학 자료들에 대한 관심의 폭도 가능한 한 넓혀가고자 했다.지금도 나 혼자 그런 생각에 빠져 있다면 서글플 것이다. 그런데 문단 일각에서 나와 같은 경로를 거친 것은 아니로되, 똑같이, 더 늦출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이제 그것을 위한 실질적인 준비를 해나가게 되었다.3박 4일의 여행은 몹시 피로했다. 남들은 50년전, 30년전에 한 일을 지금에서 하면서 늦은 것을 벌충하고 더 낫게까지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자니, 아닌 말로 식은 땀이 난다. 하지만 마음 속에 한 가닥 기쁨이 연기를 피운다. 우리도 이제 우리 어려운 시대의 문학 유산을 모으고, 정리하고, 보여주고, 즐길 때가 곧 오리라는.

2014-09-25

동명왕의 유훈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이광수가 쓴 마지막 장편소설은 1950년 초에 발간한 `사랑의 동명왕`이다. 해모수와 유화 부인 사이에서 태어나 동부여를 떠난지 이태만에 고구려를 건설하는 위업을 세운 사람이 바로 동명왕 주몽이다. 하지만 삶은 무상하여 그 또한 세상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왕위를 이을 아들 유리에게 마지막 유훈을 내리게 된다. 마흔을 넘기지 못한 나이였다.그런데 이 `사랑의 동명왕`은 이광수에 있어서도 마지막 유언과 같은 작품이었다. 이광수 역시 일제 말기에 부역을 일삼은 죄인의 몸이었으나, 박두한 6·25 전쟁의 와중에서 1950년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논문 때문에 이 작품을 되짚어보다 느낀 바 있어 그 문구들을 인용, 소개해 본다. 이 작품 마지막 장에서 동명왕이 유리에게 남기는 유훈은 이광수 자신이 이 땅의 위정자들에게 남겨놓고 싶은, 진심이 어린 말이었을 것이다.-듣거라. 네 진실로 어리석은 줄을 알면 좋은 임금이 될 것이다. 임금은 몸소 일하는 자가 아니요, 사람을 골라 일을 시키는 자다. 네 마음대로 하면 나라를 잃을 것이요, 어진 사람들의 마음을 좇으면 나라를 크고 힘있게 하리라.-면전에서 감히 임금의 말을 거슬르는 자는 충성 있는 자요, 임금의 비위를 맞추어 아첨하는 자는 제 욕심을 채우려고 임금과 백성을 깍는 소인이니라.-백성이 배곯고 헐벗지 않으면 나라의 힘이 있고, 백성이 임금과 그 신하들을 믿으면 나라의 힘이 있고, 군사가 죽기를 두려워 아니하고 장수를 잘 믿으면 나라의 힘이 있느니라. 요는 백성이 임금을 믿음에 있느니라.-백성을 속이지 아니 하고, 백성의 것을 빼앗지 아니하고, 백성이 사랑하는 자를 상주고, 백성이 미워하는 자를 벌하면 백성이 믿느니라.-백성은 제 욕심이 없이 저희를 위하는 자를 사랑하고 저희를 해하는 자를 미워하나니, 백성을 위하는 자에게 높은 벼슬을 주고 백성을 해치는 자에게 엄한 벌을 주면 백성이 믿느니라.동명왕은 유리를 향한 당부의 말씀 끝에 자신과 고락을 같이 해온 신하들을 가리키며 마지막으로 고언한다.-너는 이 사람들을 존경하고 만사에 물어 하여라. 그러나 한 사람에게 오래 큰 권세를 맡기면 맡는 자는 교만한 마음이 나고 다른 사람들은 이를 시기하여서 편당과 알력이 생기나니, 조심조심하여라.이 소설 끝에는 집필을 끝낸 시기가 적혀 있는데, 단기 4282년 12월 17일 석양 무렵이다. 서기력으로 따지면 1949년이고, 그렇게 해서 이 소설은 1950년 5월에 한성도서 출판사를 통해 세상에 나왔다. 그 바로 다음달에 전대미문, 동족상잔의 전쟁이 발발한 것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세상 많은 사람들이 정치를 혐오하고 정치인을 욕한다. 하지만 정치가 없이 어떻게 세상이 움직이랴. 세상과 사람들을 이렇게도 저렇게도 움직이는 힘을 가진 정치이니, 이에서 무턱대고 고개 돌릴 수 없다. 아니, 무엇보다 귀하게 여겨주어야 한다.예부터, 좋은 정치를 만나면 백성들이 눈에서 눈물을 씻어냈고 나쁜 정치 아래서는 고통과 절망을 면치 못했다. 저 끝 아메리카부터 또 다른 끝 이라크까지, 세상은 쇠와 구리가 끓는 것 같은 형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왜 하필 `사랑의 동명왕`이라 했을까? 동명왕은 큰 나라 고구려를 세운 임금이니 `사랑의 동명왕`아니라 `정복자 동명왕`이라고 쓸 수도 있었다.하지만 그 모든 힘보다 크고 강한 것이 바로 사랑이요, 자비다. 동명왕(東明王)이란 동쪽의 밝으신 왕이라는 뜻이고, 이때 이 `명`자는 해와 달을 합쳐서 글자를 만든다. 해와 달같이 밝은 마음으로 백성들을 넓게 사랑하신 왕이었다는 뜻이다. 단군의 뜻을 이은 이 나라에서 사랑을 아는 밝음보다 위에 설 것은 없다.

2014-09-18

휴일의 문답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어느 때는 내 생각보다 남의 생각이 귀해 보일 때가 있다. 그렇게 내가 겸손해질 때 내게는 차라리 희망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먹을 것 많았던 명절, 그만큼이나 피로했던 연휴를 보낸 이들께 이야기 한 토막이나 소개해 본다. 그 이야기의 앞토막이다.ㅡ성서에도 인내와 절제 없이는 하늘나라로 갈 수 없다고 했어. 하늘나라는 뭔가. 누가 복음 17장 21절에 천국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말아라, 너희 마음안에 있다 그랬어. 마음이 편하고 행복하면 그게 천국이고 마음이 아프고 괴로우면 그게 지옥이야. 불교에서는 일체유심조라고 하잖아?ㅡ똑같네요.ㅡ똑같지. 그러니까 모든 종교의 근본은 하나야. 창조주, 조물주가 만든 진리를 알아야 거기에 맞춰 살 수 있거든. 그렇지?ㅡ네.ㅡ그걸 배우는 게 신학이라야 해.ㅡ좀더 드셔요.ㅡ음. 난 아침, 점심 두 끼를 굶으니까 이 밥이 꿀맛이야.ㅡ저는 요즘 저녁을 안 먹어요.ㅡ잘했어. 에스파니아 격언에 몸이 아프면 의사 백 명을 부르기 전에 저녁을 굶으라 했어. 밤 동안에는 우리 몸에 있는 모든 회복 기능이 모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주는 시간이야. 그 밤에 밥을 먹고 자면 쓸데없이 먹은 그것을 소화시키느라고 에너지와 시간을 뺏기게 돼. 자연히 아침에 피곤해지지. 밥을 먹지 않고 보내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도 몸이 거뜬해. 밤새 모든 게 잘 회복돼서지.ㅡ막걸리 한 잔 드려요?ㅡ그려. 자연은 참 신비로운 거야. 이 알코올은 신경을 마비시키잖아? 알코올은 CH3CH2OH거든. 그런데 여기에 산소 하나가 달라붙으면 물분자 하나가 빠져 나가면서 CH3COOH가 돼. 그런데 이놈은 신경을 살려.ㅡ그게 뭔데요?ㅡ식초. 아세트산이라고 하지.ㅡ그럼 이 술이 산소랑 결합하면 식초가 되는 거예요?ㅡ암. 산화되니까. 산화효소에 의해서.식초는 박테리아가 산화효소를 분비해서 알코올을 산화시켜 얻어내지. 그런데 이놈은 피로물질을 분해해서 피로를 없애주고 또 신경을 잘 돌게 해줘.ㅡ식초를 잘 먹어야 하겠네요?ㅡ당연하지.ㅡ그렇군요.ㅡ우리가 알아야 할 게 퍽 많아. 인간은 동물하고 달라서 본능적으로만 사는 게 아냐. 우주 만물 만상의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하게 돼 있어. 인간은 특별하지. 그걸 모르면 인생을 망쳐. 누구든지. 진리를 모르고 자기 욕심 채우기 위해 살다가 결국은 자기가 뿌린 대로 거두는 거야.ㅡ그래요.ㅡ갈라디아서 6장 7절에,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두리라고 했어. 그런데 살아서뿐 아니라 죽어서도 마찬가지야. 살아서 나쁜 마음을 가지고 산 사람은 죽어서도 계속 벌을 받아. 내세가 있느냐 없느냐? 영혼의 세상이 있는 거야. 지금은 유기체에 영혼이 붙어 있지만, 죽으면 유기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늘의 분신이기 때문에 하늘나라로 가. 나는 그것을 사실로 믿어. 과학자기 때문에. 영혼도 파동이고 전기도 파동이야. 빛도 파동이고. 모든 물질은 파동의 결합체야.ㅡ파동이라.ㅡ그렇지. 우주 만물 만상의 본질을 깨우치면 삶의 질이 달라지고 차원이 전연 달라져. 세상은 이 파동처럼 서로의 영혼을 감응시키는 곳이 되어야 해.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나는 나중에 더 쓰고 싶다.

2014-09-11

`명량`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역사라는 것은 참 무정하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제때 그대로 주는 법이 없다. 몽골 초원에서 일어난 칭기스칸은 몽골 제국을 일으킨 대영웅이었지만 역사는 몽골인들에게 그와 같이 위대한 인간을 단 한번밖에는 그 출현을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 몽골은 반은 중국 영토가 되어 내몽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중국 글자와 전통적인 몽골 문자를 섞어 쓰고 있으며, 나머지 절반인 외몽골만이 몽골로 독립하여 알파벳을 활용한 문자 운용 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 두 몽골이 하나로 돌아가는 일은 역사상에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현대는 현대 이전보다 훨씬 가혹해서 한 번 기회를 상실한 민족에게 또 다른 가능성을 부여해 주지 않곤 한다.역사가 가혹할 정도로 기회에 인색하다 함은 한국문학의 영역에서도 드러난다. 우리는 러시아 문학이 가진 도스토예프스키를 가졌는가? 톨스토이를 가졌는가? 영문학이 가진 토마스 하디를, D.H. 로렌스를, 버지니아 울프를 가졌는가? 할 때, 그 훌륭한 작가의 수효가 많지 못한 한국현대문학의 영세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뭐니뭐니 해도 탁월한 이야기꾼이었던 이광수 같은 작가를 한국문학사는 몇이나 품고 있는가? 아마도 그는 50년 혹은 100년에 한 번 날까말까 한 작가라고도 할 수 있다.최근에 빅 히트를 기록하고 있는 영화`명량`을 보면서 나는 다시 한번 이 역사의 가혹함을 생각하게 된다.그때 이순신은 이 나라에 존재할 수도 있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역사는 아주 관대하게도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하여 이 나라에 존재하도록 하는 행운을 베풀었다.명량해전을 앞두고, 임금을 향해, 자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노라고, 바다를 지키게 해달라고 진언을 올릴 수 있었던 이순신의 존재로 말미암아 조선 반도는 더 이상의 도륙을 면하고 사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이 이순신은 역사상에 몇 년만에 한번씩 나는 인물인가? 하면, 내 생각으로는 500년에 한번 날까 말까 하다. 살려 하면 죽을 것이요, 죽으려 하면 살 것이라는 불굴의 의지와 용기로 전대미문의 전란을 헤쳐간, 그리고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같은 인물을 우리는 그 이후의 역사 속에서 더 만나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많은 인물들을 가상적으로 떠올려 보지만 그 멸사봉공의 뜨거운 정신에 버금갈 인물을 나는 찾을 수 없다.그리고 지금 우리는 바로 그 이순신과 같은 인물을 목마르게 갈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초인이 역사와 민중을 구제해 주리라는 엘리트 역사관에서가 아니라 헌신적이고도 희생적인 참된 정신의 소유자만이 우리로 하여금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게 해줄 것이라는, 구원을 갈구하는 마음에서다.말과 글, 뉴스들이 실로 수없이 교차하는 오늘날 그것들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영웅의 이미지를 간단없이 제공해 주고 있으나, 정작 그 허상 아래 감추어져 있는 실제 인물의 실체는 초라하고 보잘 것 없다. 진짜 영웅은 없고 영웅의 분식된 이미지만 있다.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실 즈음의 일들이 생각난다. 이미 병이 깊어 임종을 앞에 둔 추기경께서 아마도 그때는 추기경직을 내놓고 요양하고 계셨던 때였던 것 같다.어느 오솔길을 허적허적 걸으며, 예수의 형상 아래 늙고 지친 몸을 엎드리고 신의 뜻을 묻는 노추기경의 모습에서 나는 황야를 헤매는 신의 아들의 이미지를 언뜻 발견할 수 있었다.지금은 누가 성스러운지 나는 잘 알 수 없다. 그분을 만나고 싶다. 가장 낮은 곳에 엎드리는 자가 가장 높은 사람일 텐데, 지금 우리는 다들 너무 높다. 자기를 바쳐 남을 구할 이순신을 만나기 어려운 시대다. 그래서 우리의 병이 이다지도 깊은 것인지도 모른다.

2014-09-04

인터넷 말에 대하여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계용묵의 소설 `백치 아다다`를 보면 아다다는 말을 잘하지 못한다. 그녀는 지참금을 가지고 시집 갔다 남편이 돈을 잘벌게 되자 소박을 맞고 돌아온다.새로 만난 남편도 아주 돈을 밝히는 사람이어서 아다다는 데려가는데 돈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대단한 장점으로 여겼다. 하지만 아다다에게는 아무 돈도 필요치 않았다. 아다다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진정한 사랑이었다.아다다는 돈이 자기 불행의 씨앗임을 직감했다. 새 남편이 감춰둔 돈을 몰래 가져다 바다에 내다 버린 아다다는 뒤늦게 알고 쫓아온 남편에게 맞아 죽는다. 아다다가 그냥 지냈더라면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그보다 지금 이 글의 관심사는 왜 아다다를 말 못 하는 이로 그렸을까 하는 것이다. 말을 하지 못해야 아다다의 불행한 삶의 의미를 더 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정말 억울하고 슬플 때 우리는 말을 하지 못하고 대신 갑갑한 가슴을 친다. 아다다는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괴로운 삶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말을 하지 못하도록 태어났기에 아다다는 진실할 수 있었을 것이다.사람은 보통 말을 하며 살아가도록 생겨났다. 우리네 인생을 생각해 보면 사람은 숱한 말을 나누며 살아간다. 사람의 인생은 말을 수없이 주고받는 과정의 연속, 그것이다. 말 없이는 인생도 없다 해도 과장 될 것은 없다.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말을 잘 주고받는 일처럼 소중한 것도 없다고. 아무리 많은 말을 주고 받아도 그 속이 허망하게, 텅 비어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단 한 마디의 말로도 상대방을 칼로 찌르듯이 깊은 상처를 내는 일은 또 얼마나 많던가? 실로 나는 오늘날처럼 말이 흘러 넘치고, 또 그 흘러넘친 말들이 홍수처럼 사람을 휘갈기고 휩쓸고 끝내 죽음에 이르게도 하는 때가 다시 없었다고 생각한다.아다다는 그런 말의 위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생래적으로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그런데 이 말과 아주 흡사한 성질을 가진 것이 이 세상에는 하나 더 있으니, 그것이 화폐다. 곧, 돈처럼 소중하고도 또 그렇게 타락하기 쉬운 것이 없다.옛날 유주현의 소설에 `유전 24시`라는 게 있었다. 그것은 이 사람에서 저 사람으로 옮겨다니는 돈의 시각으로 인간 세상을 본 것이었다. 돈이 굴러가는 방식이나 방향을 보면 세상을 볼 수 있다.사람의 말처럼 사람이 쓰는 이 돈이라는 것도 주고 받고, 모습을 바꾸기가 능란하기 이를 데 없어서, 그 안에 진실이 담기기란 하늘에서 별을 따는 일이나 다름없다.그러므로 아다다가 말을 못하는 여자로 설정된 것은 그녀가 돈의 가치를 모르고 대신에 사랑의 진실성만을 쫒는 성격을 가진 것과 관계가 있다. 말을 못하는 그녀는 돈을 믿지 않았다. 돈이 행복을 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인터넷이 생기고 나서, 이메일에, 블로그에, 트위터에, 퍼이스북에 너나 할 것 없이들 말하고 쓴다. 옛날에는 말하고 쓸 수 있는 신분이나 계급이 한정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분명 인터넷은 신이 내린 축복이다. 세상을 복되게 만들 수 있는 물건이다.그러나 지금 네이버나 다음을 보면, 또 트위터를 보면 신이 내린 축복을, 진실을 가리고 남을 속이고 정신병적 공격성을 드러내는데 쓰는 일이 너무 많다. 돈처럼 말도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돈 안드는 말이니 생각나는 대로 나오는 대로 쓴다. 남을 보고 죽으라고 쓰고 자기 편을 위해서는 어떤 거짓말도 허용한다.말이 피를 흘리는 모습이 보인다. 가시 면류관을 쓴 오늘의 말이다.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말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할 때다.

2014-08-28

수덕사 법회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점봉산에서 대학원생들과 작가들과 함께 곰배령에 오르고, 백담사 만해마을에서 무산 큰스님을 뵈옵고, 충남 예산 덕산 수덕사로 갔다. 집 떠난 지 사흘째, 덕산은 내 고향이다. 하지만 대전에서 크고 서울에서 살아 외할머니 돌아가신 후로는 몇 번 가본 적이 없다.수덕사는 이 고향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곳. 옛날에 수덕사 비구니 스님들이 절 떠나 여행을 하시거나 돌아오실 때 외할머니 댁에 들러 하룻밤 묵고 가시기도 했다고 들었었다. 교통이 불비해서 버스가 몇 대 안 다닐 때의 일이다.이 수덕사에 어머니가 다니던 얘기며, 김일엽 스님을 만나고 여승이 되어볼까도 생각해 보던 얘기며, 김일엽과 이광수의 삶과 소설들에 관한 얘기며, 외할아버지가 그 수덕사 밑에서 어렵게 살던 나혜석의 그림을 사주기도 했다는 얘기 같은 것들이, 내 문학의 깊은 원천이 되었음을 나는 아주 나중에야 깨달았다.이 수덕사에 온 것이다. 김일엽의 저술을 영문으로 번역한 박진영 교수가 법회 중에 강연을 하기로 했다. 나나 유진월 교수, 김우영 선생 같은 김일엽 연구자들이 이 기회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일엽 스님의 4세손뻘 되는 경완 스님이 우리를 따뜻하게 환대해 주셨다. 국문학을 전공했고 비구니 스님으로 계시면서 또 중문학을 공부하시며 정진하고 계시다.수덕사 환희대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법회가 열리고 있었다. 김일엽 생전에 수좌가 된 월송 스님이 대중들과 더불어 염송을 하신다.월송 스님, 낭랑한 목소리로 경을 외시고 세상 떠난 이들의 영혼들과 그 자손들과 법회에 참석한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빼놓지 않고 불러가실 때, 나는 합장하고 삼배를 드리고 또 합장을 하기를 반복한다.원컨대, 이 숙연한 법회에 모인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생사고락의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로 그처럼 이 세상 사람들 하나 하나가 절망과 고통과 슬픔과 갈등과 상쟁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내가 읽은 소설 중에 이런 얘기가 있다. 부처님이 부처가 되신 것은, 전생에 나고 죽기를 수없이 거듭하는 그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서, 한 생에 오로지 한 사람만을 구하시기를 무수히 하심으로써 말미암았다는 것이다.한 생에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하여. 이것은 내가 부질없이 의지해 왔던 세속의 사상들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이 세속에서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을 구하겠다는 이들은 권력을 잡고, 제도를 바꾸고, 추상적인 계급, 계층, 지역, 성별, 연령을 위하여 일을 벌이되, 구체적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지는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일찍이 도스토예프스키가 자기 소설에서 말하기를, 추상적인 인류를 사랑할 수 있으되 살아 있는 그 사람, 내 바로 옆에서 숨쉬는 사람 하나 하나는 미워하다 못해 증오해 마지 않고 마는 것이다.월송 스님이 법회에 모인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듯, 이 세상 사람들 하나 하나 그 낱낱의 생명 모두를 건져올려 구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종교의 이상이며, 또 이상이 되어야 한다.벌써 20년 전에 수덕사에 한 번 들른 적이 있다. 어렸을 적부터 정든 만공 선사, 김일엽 스님의 체취 어린 소담한 산사의 정취 어디가고 한창 불사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그 서글픈 상실감을 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새로 수덕사에 드니 소나무, 꽃 향기 속에 그윽한 덕숭산 총림의 깊이를 실감한다. 멀리 낯선 곳 떠돌다 잊었던 고향에 돌아온 탕아의 심정을 맛본다.법회가 끝나고 사람들 모두 흩어지고 덕산 옛날 비오는 거리를 걸었다. 옛날은 흩어져가고 현재는 쓸쓸하고도 번잡하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 모든 것에 다시 저 옛날이 스미리라. 우리는 다시 회복을 얻으리라. 사랑이 그것을 가능케 하리라.

2014-08-21

눈물 흘리는 이를 쫓아낼 수 없다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교황께서 이 땅에 오신다. 프란치스코 교황. 이분의 이름을 잊지 않을 것이다.중동에 가셔서는 이스라엘 대신에 팔레스타인을 먼저 찾으셨다고 했다. 이슬람 여인의 발을 씻겨 주시고, 가장 가난한 이들의 거리를 방탄 유리 없이 방문하셨다고 했다.그분이 이제 이 나라에 오신다.오늘 내게도 소식이 들렸다. “눈물을 흘리는 이들을 내쫓고 시복식을 거행할 수 없다.” 이것은 한국 가톨릭이 며칠 후 광화문에서 있을 일을 두고 언급한 말이다.참으로 오랜만에 높은 곳으로부터 내 슬픈 가슴을 어루만져 주시는 소리를 들었다.세상은 정녕 그러해야 한다.힘이 약한 이들을 총과 칼과 오랏줄로 밀어붙이지 않고, 직장에서 쫓겨난 이들에게 물세례를 퍼붓지 않고, 자식과 형제를 잃은 이들을 비웃지 않고, 윽박지르지 않고,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법을 어긴 이들을 무섭게 엄단하지 않고, 믿음이 다른 이들을 지옥에 가라 하지 않고, 가난한 이들에게 너희의 게으름을 탓하라 하지 않고, 영문도 모르고 전쟁터에 끌려가 몸을 유린당한 이들에게 없는 일을 날조한다 하지 않고, 세상의 마음을 독사의 날름거리는 혀를 닮은 붓끝으로 시퍼렇게 멍들게 하지 않아야 한다.하지만 우리 사는 세상은 어떤가?이 깊은 바닷물 속 같은 세상에 교황이 오신다. 벌써 세상에 한 줄기 빛이 든다.부자들이여, 가난한 이가 성자임을 아십니까? 힘 있는 이들이여, 힘없는 이가 정의로움을 아십니까? 학식 있는 이여, 배우지 못한 이가 정직한 것을 아십니까? 어른들이여, 아이들이 세상을 가장 투명하게 아는 것을 아십니까? 아내를 때리는 이여, 여자가 있어 세상이 평화로움을 아십니까? 피붓빛이 희고 얼굴이 아름다운 미인이여, 못생긴 사람의 마음씨가 착한 것을 아십니까?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충청도 공주 땅에 살았다. 근화 유치원, 그러니까 무궁화 유치원에 다녔다. 그림도, 한글도 배우고, 유치원 건물을 뱅뱅 돌며 달리기도 했다.그때 수녀님이 계셨다. 수녀님 아래로 여자 선생님이 또 한 분 계셨다. 그러니까 그곳은 가톨릭 계통의 유치원이었다. 아마도 공주 성당에서 세웠거나 운영했을 것이다.하루에 한 번 간식을 먹었다. 공주보다 더 깊은 시골에서 태어난 나는 우유라고는, 비스킷이라고는 그때 처음으로 먹어볼 수 있었다.아이들이 줄을 지어 차례로 유치원의 따로 마련되어 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긴 사각 탁자를 중심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빙 둘러앉는다.그리고 수녀님을 따라, 선생님을 따라, 성호를 긋는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아멘. 한 조각의 비스킷과 한 잔의 우유는 그때 내게 성스러운 빛을 띠고 있었다.교황이 이제 이 나라에 다시 오시니, 나 또한 아주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듯하다. 그 어릴 때, 동화책을 보면, 콩나무가 자라나 하늘 끝까지 닿고, 밤에 물항아리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나오고, 나무꾼이 선녀를 만나 아이들을 낳고 살았다. 마법이 그때는 현실이었다.또 있다. 그때 그림책을 보면 코끼리는 코가 길고, 기린은 목이 길고, 두루미는 주둥이가 길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었다.이제 교황이 오시니, 마음의 눈이 먼 이가 눈을 뜨고, 마음의 등이 굽은 이가 허리를 펴고, 마음의 다리가 주저앉은 이가 바로 일어서리라.마음을 다해 비오니, 교황이시여, 하느님이시여, 이 나라를 옳게 이끄소서. 부디 저를 옳은 길로 이끄소서.

2014-08-14

장수 산속으로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전라북도 장수는 서울에서 멀다. 인터넷으로 알아보니 세 시간 반이 걸린단다.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건만 케이티엑스가 생긴 후부터는 두 시간 버스길도 멀게만 느껴진다.버스 타고 한 번에 가야할 것을 서울역에 가 대전까지 갔다. 거기서 장수까지 그렇게 많이 걸릴 것 같지 않았다.하지만 예상치 못한 암초를 만났다. 열한 시 십 분인가 이십 분인가 대전 버스 터미널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버스가 막상 가보니 결행이다. 바람 불면 배 안 뜨듯이 오늘 그 시각 버스는 안 간다는 것이다.이유는 알 수 없지만 두 시까지 장수에 당도해야 하는데 큰 일이다. 방법 없나?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택시 탄다. 장장 10만원이나 되는 거금을 주기로 하고 택시는 대진고속도로를 달린다.택시 안에서 나는 거의 자포자기한 사람의 심정으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본다. 시원스럽게 뚫린 고속도로 양 옆으로 푸른 산, 산, 산들이다. 며칠 소설`마의태자`를 읽었더니, 나도 자꾸 세상에 뜻없이 산속에나 들고 싶다.장수가 목적지다 보니, `무진장`이라는 말이 저절로 생각 난다. 무진장은 무주, 진안, 장수를 하나로 묶어 이르는 말이다. 전국에서 예산이 제일 적다는 곳이 무주라던가? 무주 하면 나는 안 잊히는 기억이 있다.나 어렸을 때 외할아버지는 우리 집안에서 학식이 가장 높은 어른이셨다. 외손자가 자그마치 열아홉인데, 유별나게 나를 귀여워해 주셨다.여름 시골 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등잔불 피우고 달빛 아래 저녁을 먹고 나면 외할아버지와 나, 둘이 툇마루에 앉아 옛날 역사 이야기를 한다. 연산군 얘기도 하고, 탐라 얘기도 하고, 마의태자 얘기도 한다. 어린 놈이 퍽 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다. 내 열 살 미만 때 얘기다.세월이 흘러 내가 중학 때였나? 연로하신 외할아버지는 무주 구천동에 가고 싶어 하셨다. 그렇게 좋다는데 못 가보셨다고, 여러번 씩이나 말씀하시는 것을 구천동 가까운 대전 사는 어머니가 끝내 외면하지 못했다.여름날이었다. 외할아버지, 어머니, 나, 그렇게 셋이서 무주 구천동 덕유산에 들었다.과연 깊은 산이다. 무더운 여름 한낮에 산속은 그늘이 깊고 땅은 질척질척, 이끼가 두텁다.좋다고, 좋은 산이라고 감탄하시던 외할아버지께서 이듬해인가 초파일 가까운 때 찬물로 머리를 감다 쓰러지시고 말았다. 제주 고씨, 탐라 왕손이라고, 삼성혈 얘기 들려주시던, 만년 야당 외할아버지. 그때 외갓집에 매일 동아일보가 우편으로 왔다. 1면부터 마지막 면까지 한자도 빼놓지 않고 읽으셨다.무주에는 또 애저찜이 있고, 진안에는 마이산이 있다. 그리고 장수는 진주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가 태어났다. 또, 한우가 있고 꺼먹 돼지가 있단다. 두시. 장수고등학교에 겨우 도착했다. 여기서 1박2일, 고등학생 아이들을 만나기로 했다.이광수의 신라3부작, `마의태자`, `이차돈의 사`, `원효대사`, 그 모든 것 다 내려놓고, 백제 땅 `산속` 동네 장수로 왔다.아이들과 함께 시 공부를 한다. 인근에서 공부하고 싶은 아이들은 다 모여든다는 산속의 아이들은 공부를 잘해도 천진난만하기만 하다. 옛날 아이들처럼 처음에는 수줍어하고 부끄럼을 탄다.교정에 앉아 가는 빗속에서 노트를 들고 시상을 떠올리려 애쓰는 아이들을 보는데, 문득 한 줄기 눈물을 흘린다.역사는 무정하게 저 갈 데로 흐르고, 어둠은 아픈 사람들을 늘 아프게만 하는데, 자라날 때, 피어날 때는 다 사랑스럽다. 모두 탐스럽다.서울에서 너무 멀리 왔다. 하지만 내가 떠나온 것은 서울이 아니라 100여일 전 어느 사건으로부터다. 소설 속에서 나라가 망하자 마의태자는 어머니와 아내를 데리고 개골산에 든다.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죽음과 어둠의 나날이다.

2014-08-07

지록위마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중국에 최초의 통일왕국을 세운 이가 진시황이다. 유능하고도 야심찬 군주였던 그는 군현제를 실시하고 수레와 문자를 통일하는 등 세상을 하나로 평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엄격하다 못해 가혹했다. 법으로 천하를 다스려 죄를 지은 자는 용서하지 않았다. 의학이나 식목에 관한 책들 말고는 다 태워 버리도록 했고, 황제의 험담을 한 유생들을 파묻어 죽였다. 아방궁을 짓고 만리장성을 쌓아 백성들을 노역에 동원하여 험하게 다루었다.진시황이 천하를 순시하다 병으로 급서하자 다음 황제를 옹립해야 했다. 부소가 진시황의 장자였다. 사리에 밝았던 그는 아버지에게 간언을 올리다 미움을 받아 변방에서 흉노를 막고 있었다.승상 이사와 환관 조고가 진시황의 죽음을 은폐한 채 황제의 조서를 꾸며내 부소로 하여금 자결하게 했다. 진시황의 또다른 아들 호해가 황제가 되고 이사마저 조고의 참소로 죽음을 당하자 천하의 권력이 조고에게 돌아갔다. 호해는 무능하고도 향락적인 군주였다.어느날 조고가 호해에게 사슴을 바치며 말이라고 했다. 호해는 이것이 어찌 말인가 하지만 조고를 두려워 한 신하들은 대부분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했다. 이에 호해는 자신의 분별력에 문제가 생겼다고 여겨 아무 일도 하지 않다 결국 조고에게 죽음을 당하였다.이로부터 지록위마라 하는 고사성어가 생겨났다.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함은 아랫 사람이 윗사람을 진실하지 못한 말로 겁박함을 가리킨다.호해가 과연 남들은 다 아는 것을 자기만 모르고 있다고 여겼는지 알 수 없다. 으르고 협박하는 위세에 밀려 스스로 분별력 없는 자로 처세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몰락의 단초였다. 환관 조고는 황제 앞에서 자신의 말을 부정한 이들을 가려내 내쫓고 세력을 구축하여 호해를 황위에서 끌어내리고 만다.사슴을 가리켜 말이라 한다?미셀 푸코의 말과 사물이나 중국 고서인 산해경을 보면 옛날 중국 사람들은 우리 현대인과는 전혀 다른 분류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산해경은 외눈박이 사람들도 나오고 남자인 듯한 인어까지 등장시키고 있어, 무엇이 실제이고 무엇이 환상인지 헷갈리게 할 정도다. 고인들은 환상적 범주까지 실제적 범주들과 나란히 놓고 분류를 가했다.하지만 지록위마는 그 옛날 사람들의 인식이 현대인들만큼이나 날카로웠음을 알게 한다.사슴은 우제목에, 말은 기제목에 속한다. 우제목이란 소목이라고도 하니 사슴은 소와 일가친척인 셈이다. 그러니까 사슴과 말을 구별 못한다 함은 콩과 보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숙맥불변처럼, 인간 생활에 가장 긴요하면서도 대척적인 두 짐승, 소와 말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호해는 그렇듯 어리석어야 했다.주권론에 따르면 옛날 황제 나라의 주권은 황제에게 있었다. 오늘날 그것은 국민 각자에게 있다고 말해진다.그러나 국민 개개에게 조각조각 흩어져 나뉘어 쥐여져 있는 주권이란 얼마나 추상적이고 실체 없는 것인가? 이런 쪽모이 의사 주권으로는 어떤 완전한 주권적 실체도 명확히 드러낼 수 없고, 기껏해야 몇 년에 한 번씩 치러지는 선거에서의 투표라는 형태로나 그 형해를 드러낼 뿐인 것이다.그리하여 오늘날 국민이란 저 진나라 2대 황제 호해의 형상을 나누어 가진 이름뿐인 황제들에 지나지 않기 쉽다. 또 그래서 이 현대에도 저 환관 조고의 배역을 자임하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다. 그분들은 지금도 여기저기서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 그러면 또, 자기가 제 정신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들판에 나가 구덩이를 파고 세상에는 할 수 없는 말을 쏟아붓고 묻는다. 사슴은 사슴일 뿐이라고.그 구덩이 위에 풀이 자라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시신의 냄새가 난다.

2014-07-31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980년대만 해도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진 평범한 대학생들이라면, 진실은 결국 통한다고, 진리는 존재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그만큼 순진했다는 것이다. 아니면, 내 자신이 그런 순진한 학생들 중 하나였읕 뿐인지도 모른다. 또, 상식선에서 보면 진실은 통하고 진리는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진실은 곧이곧대로 드러나지 않는 때가 너무 많다. 그것은 저 1980년대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밤늦게까지 뉴스를 보고 새벽에 다시 뉴스를 보는 노인성 체질이 되어버린 나다. 새벽에 스마트폰으로 `다음`을 보는데 믿기지 않는 뉴스가 떴다. 그토록 행방을 쫓던 유병언 씨가 매실밭에서 40일 전에 백골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요즘에는 댓글들도 믿을 수 없지만 그래도 몇 개씩은 떠들어보게 된다. 대부분 장난질하느냐는 투다. 정부나 검경 등 공신력 있어야 할 기구들의 발표 등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쉽게 믿음이 가지 않는데 사람들이 다 믿을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도 그런 오산이 없을 것이다.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의심이나 의혹이 아무리 많이 제기되어도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응대하는 곳은 없다. 공적이고도 합리적인 태도로 사실을 추구하고 검증해 나가야 할 언론은 받아적고 옮겨적고 마감 시간에 맞게 편집하기 바쁘다. 발표나 선언은 그것으로 진실인 듯 행세하고,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불온하고도 불경한 자가 되기 쉽다.사람들은 너무 바쁘고 자기 한 입 먹고 사는데도 지쳤기 때문에 또 그러려니 한다. 그렇다 한들, 그렇지 않다 한들 대체 그게 나와 무슨 큰 관계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또 발표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것에 반응하는 방향이나 수위는 이미 그 사람이 사는 지역이나 지지 정당 등에 따라 대부분 사전에 결정되어 있다.“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안산에서 서울의 국회의사당까지 걸어간 단원고등학교 생존 학생들이 말한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틀렸다. 진실은 언제든지 침몰할 수가 있다. 파묻힐 수도 있고 불에 태워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어른이 되면 진실을 원치 않고 또 진실로부터 되도록 멀리 있어야 안전하다고 믿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은 어른들이 지배하기 때문이다.세월호 참사 이후 나는 이 사건에 관해 숱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명쾌한 설명을 아무 데서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슬픔만큼이나 답답한 나날이었다.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의혹을 품을 수밖에 없는 사건들이 그 이후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것들이 세월호 참사와 어떤 유기적인 관계가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사건들 사이에는 뭔가 인과 관계가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된다.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만약 나 혼자만 그런 생각을 한다면, 더 슬픈 일이지만 이 사회는 죽은 것이다. 우리 사회가 죽어 있지 않는 한 나 혼자만 이런 생각에 빠져 있지는 않을 것이다.그럼에도 나는 지금 우리 사회가 크나큰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한다. 진실에 대한 의지가 적은 사회는 결코 건강하지 않으며 그런 사회가 구성원들을 두루 행복하게 해줄 리가 없다.문제가 크고 괴로울수록 때로는 그것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한 법이다. 더구나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는 쉽게 진정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더 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우리 사회에는 지금 현명한 사람들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태의 추이를 넓게 살펴 대증요법 차원을 넘어 실효성 있는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안에 진실에 접근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가 마련되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 사회는 인식을 함께 공유하며 살아가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2014-07-24

다시 세월호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장마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마른장마 무더위에 못이겨 여름감기에 걸렸다. 덥다고 감기 걸리랴만 선풍기를 틀고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던 일주일 사이에 목에 가래가 끓고 코에서는 콧물이 줄줄 흘렀다. 아예 목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로 감기가 심해지면서, 너무 몸이 안 좋아 역설적으로 살아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이렇게 사지에 힘이 없는 것은 분명 더위를 먹어도 몹시 먹은 탓이었다. 몇 날 며칠 사람을 만나고 일을 하면서도 틈만 나면 픽픽 쓰러지기 바쁜 나날 끝에 나는 드디어 어느날 밤 한강변으로 나갔다. 뜨거운 두통이라도 식히자며 여의도 공원 옆에 한강변에 나간 것이다.바뀌어도 몹시 바뀌었다. 몇 년 전에 가끔 그곳에 가서 봤던 살풍경은 어디 가고 강변은 온통 풀숲 천지가 되어 있다. 시멘트 콘크리트 제방과 계단은 어디로 갔는지 없고, 불과 이태만에 친환경 강변으로 거듭나 있다.한밤의 강변은 아름답다. 강바람도 그날 따라 소슬하다. 무엇보다 바람에 실려오는 풀내음이 좋았다. 여러 풀향이 뒤섞인 풀숲 냄새, 날이 가물어 건초가 되다시피 한 풀들의 마른 냄새가 감기에 지친 감각을 새롭게 일깨워 준다.강가에 앉아서 건너편 마포 쪽을 바라보니 가물가물 했다. 강 수평선 너머에 작은 가로등들이 점점이 이어지고, 자동차들 헤드라이트 불빛, 그리고 강변에 늘어선 건물들의 형광 빛들. 이런 때 빛이 적은 것도 좋았다. 어둠 속에서 적은 빛을 건너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시간이 얼마나 흘렀나. 강 물결은 시간을 잊게 한다. 이제는 일어나야겠어서 밤의 강변을 등지고 나왔다.그때다. 한강변 여의도 둔치 공원 바로 옆에 때 아닌 경찰병력의 대이동이 있다. 경찰 버스가 열 대 넘게 줄 지어 늘어서고 전경들이 대열을 이루어 요소 요소 막아섰다.무슨 일일까. 그러나 그런 밤에 지금 국회 주변을 둘러싸야 할 일이라고는 세월호 문제밖에 없었다.아니나 다를까. 내 의문은 다음날에 풀렸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특별법 제정을 주장하며 국회를 찾아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유가족들은 농성을 하고 그중 대표자들은 단식을 시작했다.예삿일이 아니다. 지금 우리 세상은 이 문제를 제대로 풀지 않으면 안 될 때를 맞이했다.과연 이 문제를 비껴갈 수 있을까?여야는 다시 보선이다, 대표 경선이다, 뭐다 해서 정신이 없다. 김어준의 `파파이스`를 보면 마치 세월호를 잊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진실의 길`은 왜 쓸데없이 야당의 공천이 어떠니 하고 있나? `망치부인`인지 뭔가는 원래 그렇게 `친문`으로 일관했나? 다들 정쟁 속으로 빨려들어간 듯한 느낌이다. `노유진`도 `전국구`도 다들 딴청이다. 정세를 타서 그런가. 원래 그렇게 시류적이었나.목소리가 고픈 세상이다. 한밤의 제복 물결은 다시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일깨운다. 회피할 수 없다면 정면으로 맞이하라. 그러나 과연 고개를 돌리지 않을 성의나 의지를 누가 갖고 있을까.그로부터 사흘이다. 아직도 여름감기는 나의 주인이다. 주인을 모시고 새벽에는 독일이 피파컵을 차지하는 시합을 보았다. 눈을 뜨니 후반전, 또 눈을 뜨니 연장전, 또 눈을 뜨니 메시가 자기를 위로해 주는 독일 선수와 악수를 나누고 있다.다 끝났다. 하지만 쉽게 끝나지 못할 것 같다. JTBC가 밤마다 왜냐고 묻는다. 그것보다 이번 유족들은 비밀과 보상을 교환하는데 꽤나 긴 시간을 요구할 듯하다. 그들은 지금 보상보다 진실을 원하고 있다.나 또한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밤마다 유튜브가 내 생활 속으로 파고든다. 그 소음 속에 아이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스며들어 있다.

2014-07-17

카인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황순원 소설 중에 `카인의 후예`라는 것이 있다. 제목부터 매우 종교적인 인상을 풍기는데, 해방 후 북한 지역의 토지개혁을 배경으로 지주 집안의 후예 박훈과 마름의 딸 오작녀의 삶의 행로를 그린 것이다. 왜 제목이 `카인의 후예`이어야 했나, 하고 물을 때 우리는 성경 속에 등장하는 카인에 관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카인은 아담과 이브 사이에서 난 맏아들이다. 그는 농사를 지었고, 동생 아벨은 양치기였다. 두 사람은 하느님께 공물을 바치는데, 아벨의 것은 기쁘게 받으면서 카인의 것은 받지 않았다. 이에 질투를 이기지 못해 카인은 아벨을 죽이고,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떠돌아 다니다 에덴의 동쪽 놋땅에 정착하게 된다.이러한 사실에서 황순원이 자신의 소설을 `카인의 후예`라 한 것은 우리 한민족이 농경민들임을 상징적으로 지칭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우리들은 땅에 붙박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카인의 후예들이다. 그러나 카인의 후예라는 말은 우리가 단지 농사 짓는 민족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 속에서 카인은 최초의 살인자다. 그는 질투심으로 동생을 죽이고 떠돌다 자신의 죄를 받아들이고 겨우 정착해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이 카인의 아들이 에녹이요, 이로부터 많은 자손이 생겨났다. 에녹은 그가 건설한 도시의 이름이기도 하다. 따라서 카인의 후예란 죄를 짓고 그 죄에 기반해서 문명을 이루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부언하면, 이로부터 존 스타인벡의 거작 `에덴의 동쪽`이 나왔고, 이것이 다시 영화화되어 제임스 딘이라는 불멸의 청춘 초상을 낳았던 것이다.이야기를 조금 더 진전시켜 보면, 카인의 아들 에녹은 수많은 자녀를 갖게 되고, 그중에 유목민의 아버지인 야발도, 대장장이의 조상인 두발카인도, 최초의 음악가인 유발도 나오게 된다. 그런데 이 유목이며, 대장장이며, 음악이라는 것은 곧 문명을 이루는 원초적인 것들이 아니겠는가?여기서 우리는 결국 문명은 죄로부터, 죄의 인식으로부터 생겨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문명을 이루며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인정하며, 그 기반 위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자신의 죄를 부인하는 태도로부터는 진정한 자기 향상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이 카인에 관한 어떤 책 가운데서 전후의 일본과 독일을 비교하는 구절을 발견하게 된 것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거기서 이렇게 썼다. “문명이 건설된 것은 잘못을 인정했기 때문이 아닐까? 역사가 불행한 반복에 의해 피로 물들지 않게 된 것은 범죄가 저질러졌다고 인정한 사실에 의해서가 아닐까?”전후에 독일은 자신의 죄를 근본적으로 반성했던 데 반해 일본은 그것을 부인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어제 신문에 네덜란드에서 일본의 고노 담화 검증을 비판하는 시위가 있었다고 났다. 일본은 세계제2차대전 중에 네덜란드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뒤 네덜란드 사람들을 11만명이나 수용소에 가뒀고, 이 가운데 1만3천명이 죽고, 200명은 위안부로 끌려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 위안부가 수천 명이나 된다는 기록도 있다. 또 최근에는 그 생존자들 몇 사람의 증언을 담은 책이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그러니, 이 일본 문제는 단순히 한중일 3국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일본이 자신의 과오를 승인하고 이를 성찰하려 하지 않는 한 진정한 문명국의 위상을 확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집단 자위권이라는 미국, 한국, 일본 삼각동맹의 필요성에 기대어 과거를 부정, 부인하려 드는 것은 큰 나라로 가는 길을 스스로 막는 우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014-07-10

최저임금

얼마 전에 결정된 2015년 최저임금은 5천580원이라고 한다. 작년에 비해 7.1%가 인상된 액수라고도 한다. 퍼센티지를 보면 꽤 많이 인상된 듯한 느낌을 준다. 참고로 작년에는 5천210원, 재작년에는 4천860원이었다.금방 나는 어느 커피숍에 들어가 아이스커피를 사마셨는데, 2천원이었다. 큰길 가에 연 커피점 치고는 싼 값이다. 이름난 체인점에 들어가 마시려면 4천원에서 4천500원은 각오해야 하고, 호텔 커피숍에서 마시려면 1만5천원을 뒤집어써야 하는 것에 비하면 말이다. 최저임금이라는 것의 개념을 나는 잘 알지 못하지만 대략 시간당으로 따지는 것이며, 일하는 사람이 인간다운 생활을 해나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임금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그런데, 나는 이 최저임금이라는 말이 요즘처럼 실감나게 다가오는 때도 없었던 듯하다. 여러가지 일이 겹쳐 경제사정이 썩 좋지 않다 보니 물가에 나름대로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내 자신이 결코 삶의 최저선에 서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각자의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지금 내가 막 지나치는 치킨집 간판 메뉴를 보니 옛날 치킨이라고 써 있는데, 한 마리가 1만8천원이라고 돼 있다. 꽤나 비싸다. 우리 동네에서는 치킨 한 마리가 콜라까지 끼워서 1만4천원이면 되는 것을.전철에서 내려 학교로 가는 마을버스를 타는 곳에는 빵집이 새로 생겼다. 어디 메뉴를 볼까? 단호박파이가 3천원이고, 영양찰떡은 4천원, 밀가루 반죽에 우유와 버터가 풍부하게 들어가 케이크처럼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팡도르라는 유럽 크리스마스 빵은 5천원이라고 한다.이젠 마을버스를 타야 한다. 버스 안에는 가격표가 없으니 기억을 더듬어 보는 것도 아쉬운 대로 재미있겠다.국회의사당 앞에는 내가 우연히 들어가 본 사우나탕이 있다. 입욕비가 1만2천원이어서 입이 벌어졌다. 학교로 통하는 신림역 근처에서는 6천원, 서울 서부역 근처에 있어서 여행객들이 자주 찾는 모모 한 곳은 8천원이었다.학교 앞에는 아주 맛있다고 널리 알려진 간장게장, 아구찜집이 있다. 서너 사람이 앉아 간장게장은 2인분만 하고, 아구찜은 하는 수 없이 대자로 시키면 공기밥까지 해서 대략 7만5천원 이상 간다. 맛이 보통 아니라서 울며 겨자 먹기로 이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갈 때가 있다.또, 학교에서 가까운 사당역 네거리쪽에 가면 일식집, 참치집이 많이 있다. 며칠 전 선배 한 분이 독일 남자와 결혼을 하게 돼서 환송식을 치르려고 그중 어느 하나를 찾아 들어갔다. 그런데 그 마구로라는 것이 1인분에 5만원씩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가자고, 후배 두 사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려는 것을, 이 선배는 괜찮다고, 너희들 신세 많이 졌노라고 애써 주저앉히는 것이었다.마지막이다. 관공서 같은 곳, 대학 같은 곳에는 회의비를 받으면서 일을 할 때가 있다. 아마도 두 시간쯤 기준으로 15만원쯤부터 20만원쯤 받을 것이고, 각종 심사비 같은 경우는 30만원쯤부터 시작한다.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다. 크기란 언제나 상대적인 것이다. 하지만 나는 며칠 동안 이 최저임금이라는 눈물 어린 말을 곱씹어보고 있다. 내가 회의를 하고 심사를 하는 것이 저 씨뿌리고, 옷을 지어내고, 프레스를 다루는 사람들의 일, 요릿집이나 커피숍에서 음식을 나르는 사람들의 일보다 얼마나 실질적인 가치가 있는지 생각했다.그리고 우리 젊은이들과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갈 임금이라는 것의 몫이 좀더 획기적으로 나아지고, 그들이 치킨 한 마리 먹고 영화를 한 편 보더라도 조금 더 편안한 기분으로 즐길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도.이 느낌 즉, 최저임금이라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의 `윗 계단`을 차지한 구성원들이 누리는 생활의 여러 윤택함과 편리함에 비해 너무 적은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는 비단 나만의 독단적인 감정인 것일까.

2014-07-03

바다여행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생각없이 바다를 향해 떠났다. 하루 당일치기로 동해 바다를 따라가 보자는 것이었다.여정은 복잡했다. 다른 사람들 가는데 따라서 같이 가는 길이라 내 맘대로 코스를 잡을 수도 없었다.먼저 청량리역에서 경춘선 ITX 열차를 타고 남춘천역까지 갔다. 청량리 역은 역시 크고 남춘천 역도 완전히 변했다. 예전에 청량리에서 춘천까지 두 시간 걸리는 기차를 타고 시간강의를 하러 다녔었다. 이제는 나도, 세상도, 자연도 변했다. 쭉 뻗은 기찻길로 한 시간 남짓, 굽이굽이 자동차 길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휑뎅그레 커다란 남춘천 역에 내리니 가는 세월이 속절없기만 하다. 여기서 버스로 오대산으로 간다. 굽이굽이 강원도 옛길 대신 다시 쭉 뻗은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달리다 국도로 접어들었다. 요즘은 국도조차 왕복 4차선에 다리미로 쫙 펴놓다시피 해서 시골길 가는 향미가 다 날아가버리다시피 했다. 차창으로 펼쳐진 평창, 진부 푸른 산야가 한가닥 위안일 뿐이다.그러나 오대산 월정사 숲길은 역시 아름답다. 1킬로미터 남짓 전나무 숲길에 들자마자 피톤치드 향이 코를 찌른다. 이제 비로소 세속 떠나온 느낌이 든다. 걷는다. 나무향이 내 몸에 스미도록. 앉는다. 높디높은 나무 밑에. 오래 전에 길 떠나 지친 행인처럼.사람들이 월정사를 돌아보는 시간을 숲길에 바치고 시간에 맞춰 버스에 오르자 차는 이제 본격적인 강릉행이다. 먼저 커피 거리가 있다는 안목 항구로 간다. 나는 또 사람들과 헤어져 해변 가로 나가 어느 높은 건물에 있는 할리스커피로 들어간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커피숍이다. 사람 드문 커피숍 안락의자에 길게 앉아 머리뒤로 손깍지를 끼고 있으니 바다가 그렇게 편안해 보일 수가 없다.안목 항구 다음은 강릉역이다. 옛날에 청량리에서 강릉까지 기차로 떠나온 적이 있었던가. 버림 받은 것 같은 자그마한 역사를 보자 세상은 왜 그렇게 쉬이 변하는가 싶다. 유용하고 요긴하던 것들이 어느 사이에 흔적기관처럼 도태되고 마는 세상이다.살아남으려는 안간힘 때문에 바다열차라는 것도 생겨났다. 플랫폼에 나가 기다리자 곧 겨우 네 량만을 붙인 바다열차가 들어온다.차리느라고 차렸다. 바다열차 외벽에는 돌고래떼를 그려넣었고 전체적으로는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잠수함 설정이다. 앙증맞고 귀엽다. 그럼 선실 속으로 들어가 볼까.잠수함 속으로 들어가자 안쪽 벽에는 해조류들이 판박이처럼 붙어 있다. 해마, 소라, 물고기 같은 것들이 벽에들 다닥다닥 붙어 있다. 객실 안으로 들어가자 천정에는 선실의 형광빛 조명등이 붙어 있고, 비상용 하얀 구명대가 줄 지어 장식으로 붙어 있다. 객실 전체가 잠수함 선실 흉내를 내고 있어 바닷길 분위기를 자아낸다.한 시간 바닷길. 바다열차는 바닷가 선로를 따라 바다를 보여주고 숨기며 묵호, 정동진을 지나 추암이라는 간이역까지 간다.바다는 아름답고도 쓸쓸하다. 나는 요즘 바다만 보면 아이들 생각이 절로 난다. 몹시도 평화롭게 머리를 곱게 빗고 있는 것 같은 바다도 아이들을 잡아 가둘 수 있다.터널로 기차가 들어가자 선실 안은 갑자기 빨간 형광색 조명등이 켜진다. 나는 그것이 마치 잊을 수 없는 참사를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아 숨이 막히는 듯하다. 다행이 터널은 길지 않다.차창 바깥으로 수평선이 열린다. 오늘 바다는 울지 않는다. 아무 말도 없다. 나는 왜 내가 여기까지 와 있나 생각한다. 바다를 보아 무슨 위로를 얻으려 했나. 아이들은 동쪽 아니라 남쪽에 있다.추암역이다. 서울로 돌아가라는 곳이다. 세상으로 돌아가라는 풍경이다. 막걸리 한 통 사들고 발길을 돌린다.

2014-06-26

일본 문제에 관하여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지난 며칠 사이 일본 문제에 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사건들이 몇 가지 발생했다. 하나는 국무총리 인준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에 관한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제는 모두 일제의 식민 지배를 어떻게 보느냐에 관계되어 있다.또 요즘은 월드컵 시즌이기도 해서 한국과 일본이 모두 브라질에서 힘든 경기를 펼치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 한국은 러시아와 1대1로 비겼고, 일본은 코트디브아르에 2대1로 졌다. 일본 네티즌들은 한국의 조편성이나 대진운이 좋은 것에 화를 내고 있다. 일본이 졌을 때 한국에서도 꽤나 고소해 했을 것이다.이런 대중적인 감정들에 얼마간의 불편함을 느끼면서 도대체 일본과 한국 관계, 특히 구한말 이후 36년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그런데, 무엇인가에 관해 생각한다는 것은 그것을 위한 기준이나 방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불행한 과거를 어떻게 읽어내야 하나 할 때, 무엇보다 나는 우리가 일종의 `공리`에 입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위력으로 지배하는 것은 인류적 이상에 비추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구미 제국들에 의한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지배는 어떤 형태로든 정당화되어야 할 것이다. 또 그렇게들 지속적으로 정당화 해온 것이 사실이다.식민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고귀한 이상을 내세우기 좋아하는데, 그것은 때로 문명화, 때로는 기독교화, 때로는 경제 발전 같은 것으로 변주되곤 한다. 문명화란 그렇게 지배하지 않았다면 계속해서 미개한 채로 남아 있었을 것이라는 논리이고, 기독교화란 서구 기독교만이 인류를 구원해 줄 수 있다는 논리이며, 경제 발전이란 그렇게 식민지화 되고 나니 잘 살게 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이 셋 모두 지배받는 자들은 본래 무능력한 이들이고, 원조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라는 논리적 전제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셋 모두 가치에 대한 배타적 견해에 기초하고 있기도 하다. 서양이 문명의 표준이고, 기독교가 유일하게 가치 있는 종교이며, 사람은 무엇보다 잘 먹고 입고 살아야 그 다음에 문화도 있다는 것이다.문화나 종교의 가치 문제는 논의하기가 더 까다로운 신념의 문제이기도 한 까닭에 여기서는 먹고 입고 사는 문제를 중시하는 입장에 관해 간략히만 생각해 본다.과연 먹고 입고 산다는 것, 또는 경제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은 인간의 삶에서 얼마만한 가치 또는 비중을 가진 것일까.누군가에게 그것은 100에 90일 수도 있고, 비록 50을 차지한다 해도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50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후자 쪽은 일종의 본질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그것이 지극히 물질중심적, 육체중심적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물론 물질과 육체 없이 살아갈 수 없지만 동시에 정신, 의식의 존재다. 이것 없이 인간이 인간일 수 없다면 우리는 경제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전자 쪽, 그러니까 양적으로 생각해 보아서, 경제는 인간 삶의 질 전체에서 어느 정도 분량을 차지하는 것일까?일제시대에 어느 정도 경제 성장이 있었는가는 따로 따져보아야 할 것이지만, 멸시와 차별과 피억압 속에서 쌀을 몇십 그램 더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나 가치가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최인훈은 `화두`에서 말했다. 해방 되고 나서 가장 많이 바뀐 것 하나는 얻어맞지 않는 것이었다고. 인간의 존엄성이 유린되는 경제발전이라는 것이 과연 지고 또는 지선일 수 있는 걸까?

2014-06-19

점봉산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옛날에 점봉산 곰배령이 좋다는 말을 들었다. 토요일, 일요일 여정으로 곰배령으로 향했다. 동서울 버스 터미널에서 열 시 삼십 오분 버스, 연휴 길이 막혀서 두 시간 삼십 분. 강원도 홍천에서 버스는 내천 쪽 국도로 빠져 차량 드문 길을 굽이 굽이 돌아갔다. 현리는 그 끝에 있었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현리에서 점심을 가볍게 먹고 점봉산 쪽 도로를 따라 걷다가 시내버스를 타고 또 걸었다.이제 바야흐로 풀꽃세상이다. 계란꽃, 엉겅퀴, 붓꽃, 찔레꽃에 그윽한 산안개다.원래는 점봉산 안에 있는 민박집을 잡고 싶었지만 예약이 늦어 산 아래 민박촌에서 하룻밤을 쉰다.이제 하루가 지났다. 아침이다. 민박집에서 북어국으로 속을 달래고 오전 열 시에 들어가는 팀이 되어 안내소를 통과했다. 미리 입산 신고를 하고 신분증 가지고 가야 하는 산이다.산은 계곡 가파른 산도 있고 둥그스름한 곡선을 그리는 산도 있다. 이 점봉산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만하기만 하다. 처음에는 조그맣게 오르락내리락 하는 듯 하더니 아예 산책길처럼 느긋하게만 펼쳐진다.걷는다. 왕복 다섯 시간 거리. 활엽수림이 하늘을 가린 그늘 진 산길을 걷고 또 걷는다. 홀아비바람꽃, 괭이눈, 꿩의바람꽃, 현호색 같은 꽃이름 단 초지가 조븟한 오솔길 양 옆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펼쳐졌다.걷는다. 요즈음 나는 걷기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한 심정을 다스릴 길이 없다. 일행도 있고 관광객들도 많지만 나는 마치 산에 혼자 오르는 사람 같다.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일행은 저만큼씩 떨어져 걷고 나는 오로지 산의 아름다움만을 생각한다.염인증이라는 말이 있다. 염세증을 넘어 염인증이다. 사람끼리 어울려 만들어가는 일들이 어쩌면 그리도 끔찍스러울 수 있나.어느 산모롱이 돌아가는 곳에 함박꽃 두 송이가, 한 송이는 활짝 피고 한 송이는 이제 막 다 맺혀 피어나려 한다. 나는 함박꽃 숨막힐 듯 순결한 흰빛을 바라본다. 숨어서 피어 있는 사연을 알 것 같아 내 눈시울도 뜨거워지려 한다.이 숲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다. 옛날에는 이 길을 계속 가서 외설악 쪽으로 나갈 수도 있었다는데 지금은 막아놓고 가지 못하게 한다나.산끝이 가까워지면서 길이 늦게나마 산길 흉내를 낸다. 조금 가파른가 싶은데도 산길로서는 차라리 애교나 부린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이름 모를 고산풀들이 줄지어 이어진 끝에 이윽고 하늘이 보였다. 활엽수림이 뚝 끊기고 풀꽃밭이 환히 드러나 보이는 하늘밑이다.다 올라왔지만 역시 산속, 산 뒤에 산이요, 산 앞에 또 산이다. 이렇듯 속세에서 멀리 떠나온 것이 다행스럽다. 하지만 곧 내려가야 한다.온 길을 똑같이 되밟아 내려가 차편을 알아본 즉 버스가 끊겼다. 관광버스를 얻어타고 현리까지 나갈 재주도 없다. 세상으로 나가는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웬 자가용 차가 한 대 와 선다. 속초로 나가는 차란다. 현리나 홍천 쪽보다 차라리 서울 가는 차편이 많은 속초다. 가깝기도 해서 뒤로 가지만 앞으로 가는 격이다.차를 운전하시는 분과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 간다. 평생 안 해 본 일이 없는 것 같은 이 분의 최근 직업은 장의업이다. 일 년에 삼백 구씩 삼천 구를 직접 염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만져 보기만 하면 어떻게 죽었는지도, 한의 크기까지도 가늠이 된다고 한다.그럼 저는 지금 살아 있습니까? 한 번 봐주세요.차안 좌중이 모두 웃는다. 하지만 나는 웃을 수 없다. 나는 요즈음 정말 내가 살아가는지 죽어가는지 알지 못한다. 어둠이 깊디 깊은 우중 세상이다.

2014-06-12

안성에 다녀오다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경기도 안성에서 한낮을 보내자고 약속한 것이 벌써 두 달도 더 된 일이다. 그곳에 있는 오세영 시인의 시골집에서 시집 출판 기념 모임을 갖기로 한 것이다. 안성에 가려면 남부터미널이라는 곳에 가서 버스를 타야 했다. 오전 열 시 반에 터미널에서 만나 안성으로 내려가니 열 두시 남짓 되었다. 마중 나온 분이 있어 그분 차를 타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도중에는 길가 커피숍에서 잠시 쉬어가기도 했다.꽃양귀비라는 빨간색 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는 커피숍 파라솔에 앉아서 차를 마셨다. 꽂양귀비 꽃잎이 떨어져 있어 몇 잎 주워 책갈피에 끼워 두려는데,그 꽃잎들은 어찌나 얇고 부드러운지?6월의 첫번째 날은 좀 덥다할 만큼 화창해서 잔치집 나들이 하기에 안성맞춤인 날이다. 산빛은 연두빛 대신에 푸른빛 짙은 녹음으로 변해가고 있고 모내기 앞둔 논들은 풍요로운 내일을 약속하는 듯하다.작은 베르나 자동차 안에는 다섯 명이나 탔는데 저만치 경찰들이 검문 검색을 하고 있다.ㅡ무슨 일이지요?ㅡ안성에 구원파 교회가 있잖아.ㅡ금수원 있는 곳이 바로 여기야.ㅡ그렇군요.검문소에는 차단기가 이중으로 쳐 있고 젊은 경찰관 둘이 우리 차를 세운다. 차창을 내리도록 하고 차 안으로 얼굴을 들이밀듯이 우리 얼굴을 한 사람 한 사람 확인한다. 그렇게 검문소를 통과한 우리는 불과 오 분을 달리지 못하고 또 임시 검문소를 만나야 했다. 이번에도 검문은 똑같이 이루어졌다.ㅡ과연 유병언이 이쪽으로 올까요?ㅡ밀항이라도 하겠지.ㅡ벌써 밀항해 버린 게 아닐까요?ㅡ못 잡는 거야, 안 잡는 거야.ㅡ선거 전에 잡을까?ㅡ못 할 것 같아요.ㅡ그러다 말 수도 있고.ㅡ우리가 남이가가 뭐야. 무슨 뜻이야.ㅡ이건 무슨 선문답도 아니고.시집 출판기념 모임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 열 명 남짓이었다. 점심은 맛 있었다. 수제비가 들어간 메기 매운탕을 땀을 흘리며 먹고, 석남사라는 천년 고찰을 둘러 보았다. 선생님 댁에 가서 새로 나온 시집에 실린 시들을 돌려가며 읽고, 저녁에는 바베큐까지 해 먹었다.그러다보니 금방 밤이 되었다. 이제는 서울로 돌아와야 했다. 좋은 날이었지만 연일 많은 일을 처리해야 했던 나는 무척 피곤했다. 설상가상으로 요즘엔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세상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탓에, 나는 무슨 우국 처사처럼 밤마다 온갖 뉴스를 서핑해 보고, 널리 알려지지 않은 소식에까지 귀를 기울여 왔다.ㅡ또 검문이군.ㅡ그러네요.ㅡ젊은 사람들이 고생이네.ㅡ성과 없을 것 같은데.ㅡ그나저나 큰일이야.우리는 세월호며 유병언이며 지방선거 같은 일들에 관해 더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모두들 피곤한 데다가 서로들 너무 오래 이 사태에 직면해온 까닭이다.하지만 아무도 이 문제가 쉽게 마무리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나도 돌아오는 내내 잤다.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오자 밤이 깊었고 나는 이제 혼자였다.세상의 눈은 벌써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지 몰랐다. 선거가 닥치면 여당이 어떻고 야당이 어떻고 하는 말들이 나고, 조금 더 있으면 브라질 월드컵이 시작될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4월16일의 일을 아주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해마다 4월이 오면 나는 어쩌면 4·19보다도 먼저 4·16을 생각하게 될 것 같았다.밤이 너무 깊어서 나는 결국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집에 가서도 내 넋은 어제도, 그저께도 그러했던 것처럼 안식을 얻지 못할 것이었다.

2014-06-05

학교도 선거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어머니 말씀에 너는 목수로 치면 소목이니 큰 일에 참견하지 말라 하셨다. 대목이란 집 짓는 목수요 소목이란 가구 만드는 목수다. 문학이니 시니 하는 것이 아무리 크게 써도 기실 소목장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니 세상일에 과히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다.선생님 말씀에는 평생 보직을 갖지 말라 하셨다. 자기 공부나 하고 학생들 만나면 됐지 더 욕심 낼 필요 없다는 말씀이셨다. 맞는 말씀이기도 하다. 책을 읽을 수 있고 학생들 앞에 설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노스님께서는 몇 주 전에 학생들을 곡진하게 가르치라고 하셨다. 이 곡진하게라는 말씀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쏙 빠질 뻔 했다. 정성스럽게, 상세하게 가르치라는 말씀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선생이란 자에게 정말 아픈 말씀이 아닐 수 없었다.그런데도 때는 때다. 바야흐로 세상은 선거철을 맞았고, 마침 내가 몸담은 학교에서도 선거가 펼쳐진다. 조금 있으면 총장 선거도 치른다는데, 그건 아직 여유가 있는 듯하고 지금은 바야흐로 학장선거 주간이다. 이제 목요일이면 사람들이 떼를 지어 교수회의실에 모여 후보자들의 한 말씀들을 듣고 투표를 해야 한다.원래 이곳의 인문대학 학장은 어문 계열에서 한 번, 사학 및 철학 계열에서 한 번 하는 식으로 교대로 맡는 게 불문률이다. 지난 번 임기 때는 사학 및 철학 계열에서 학장을 냈으니 이번에는 어문 계열에서 학장을 낼 차례다. 그러니까 국문, 영문, 중문 등등의 학과들에서 학장 후보를 내게 되는 것이고, 사철 쪽에서는 나오고 싶은 분이 있어도 참아야 한다.이렇게 해서 선거에 입후보한 분이 모두 합해 세 분이다. 그러고보니 2~3주 전부터는 그냥 지나다니기만 해도 인물평 오르내리는 것을 얻어듣게 되었다. 10년 전만 해도 누가 누군지 아무 것도 몰랐을 텐데 지금은 나도 소위 관록이 붙었는지 다른 분들 말씀 안 듣고도 누가 누군지 안다.과연 어떤 분께 표를 드려야 하나? 하고 가끔 한번씩 생각하던 어느 순간 어떤 후보를 지지하는 선생님께서 전화를 해오셨다. 잠깐 얼굴 한 번 보자는 것이다. 원래 반갑게 인사하는 사이라서 쾌히 응낙하고 연못 가에서 만나기로 했다.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서는 조금 불안해졌다. 내가 제외시켜 놓은 분을 추천하시면 어쩌나 하는 마음이다. 그날 그분이 어느 분을 추천해 주셨는지는 물론 밝히지 못한다. 다만 마음이 통했다는 것뿐.어떤 분이 학장이 되셔야 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어떤 분은 아니 되셨으면 하는 판단은 있다. 도대체 선거에서는 누굴 `찍지` 말아야 하나?첫째, 직함을 권력자리, 올라갈 자리, 누려야 할 자리로만 보는 분은 사절하고 싶다. 봉사하려는 마음, 공동체 구성원들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둘째, 일을 벌여 세상을 쉽게 바꾸려는 분은 사절하고 싶다. 내가 이곳에 와서 보니 몇 번씩 슬로건을 달고 이 세계를 바꾸겠다는 일들이 있었다. 쉽게 바꾸려 하다 보니 하는 일마다 더 나빠지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은 일답게 정성을 들여 준비하고 실행해야 한다.마지막으로, 빈 말씀 하시는 분도 사절해야겠다고 생각한다. 현대는 말이 타락한 시대다. 이 자리에서 쉽게 꾸민 말로 사태를 모면하고 저 자리에 가서 똑같이 만든 말로 인기를 얻으려 하면, 바로 그것 때문에 신뢰의 위기가 심화된다. 신뢰를 가꾸고 키울 수 있는 분을 만나고 싶다.바야흐로 나도 한 표를 행사할 목요일,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이건 비밀이지만 우리 후보님들 가운데는 그런 분이 안계시다!

2014-05-29

서울 이모부 문병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어머니가 전화로 이모부가 많이 아프시다고, 한 번 찾아가 보라고 했다.어디 계신대요?영등포라시더라.가깝다.일산에 계셔도 꼭 찾아뵈어야 할 분이다. 하물며 차로 20분 거리야. 밤에 이종사촌형한테 병원 주소를 물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일정이 복잡해서 시간을 조정하기 어려운 날이었다.병원을 향해 차를 움직여 가면서 지나간 일들을 생각했다.내가 서울에 온 것은 대학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다행히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때는 공동세탁기조차 변변치 않았다. 그때 내게 서울은 크고 낯설었다. 나는 빨랫감을 싸들고 서울 이모집에 가곤 했다. 밥도 얻어먹고 이종사촌형, 누나들과 섞여앉아 놀기도 하고, 내친 김에 하룻밤 머물기도 했다.더 옛날 장면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외갓집 외삼촌 방에 이모부들이 모여 앉아 바둑도 두고 술도 치던 장면 같은 것들. 부드럽고도 아기자기한 어른들의 즐거움이 어린 내 눈에도 특별하게 비쳐오던 나날들.서울 이모부는 원래 학교 선생님이셨다. 나의 아버지와 같은 학교에 계셨고, 아버지는 체육, 이모부는 사회셨다.듣기에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결혼하게 된 것은 아버지가 외갓집 동네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했고, 아버지가 이모부를 통해 소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나중에 서울 이모부는 교편생활을 접고 서울에 가셨다. 형님인가의 사업을 돕기 위해서였다는데, 그때부터 이모부는 서울 이모부라는 별칭으로 통했다.한 5년전쯤 나의 아버지가 분당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대장, 신장에 동시다발적으로 암이 생겼던 것이다. 그때 서울 이모부께서 하루가 멀다 하고 문병을 오셨다. 마지막 퇴원 날까지 챙기셨던 걸 보면 손아랫동서인 아버지에 대한 우의가 자못 깊으셨다고 해야겠다.이제 병원 앞이다. 마트에 들어가 음료수를 샀지만 직접 드시지는 못할 것이었다.병원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이모부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자칫하면 간호사 앞에서 이모부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하는 수 없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고는, 참, 그렇지 한다.이제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 호실로 찾아간다. 503호실, 문은 열려 있고, 눈에 들어온 풍경이 5인실이다.그 가장 안쪽에 낯익은 얼굴이 모로 누워 계셨다.이모부. 민홉니다.이모부는 사람을 잘 못 알아보실 지경이 되셨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으셨다.고맙다.이모부는 본래 말수가 많지 않은 분이셨지만, 지금은 말씀을 길게 이어가실 상황이 못되었다. 마침 곁에는 아무도 없다. 이종사촌형은 오늘은 조금 늦는다고 했다.나는 이모부의 큰 손을 잡아드렸다. 손은 옛날에 백병원에 계신 이문구 선생을 마지막으로 찾아뵈었을 때 잡아본 손처럼 찼다. 나는 이모부 침대 옆에 앉아 나 혼자 이것저것 보고를 드리듯 이야기를 이어간다. 몇 년만에 뵙나 생각한다. 그동안 찾아뵙지 못한 게 죄송스럽기 그지없다.머리맡에 붙여놓은 환자 정보를 읽어본다. 이모부 이름이 써 있고, 90세라고 써 있다. 한 따뜻하고 자상하고 말 수 적은 사람이 지금 90년이라는 세월을 이어와 이 자리에 누워 있는 것이었다.생각해 보면 사람의 삶은 얼마나 장려한 것인가. 사람의 생명은 얼마나 그윽한 것인가.나는 긴 세월의 여정이 깊이 스며들어 있는 이모부의 주름 깊은 야윈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 순간 이모부의 두 눈은 물빛으로 맑게 물들어 있었다.

2014-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