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수덕사 법회

등록일 2014-08-21 02:01 게재일 2014-08-21 19면
스크랩버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점봉산에서 대학원생들과 작가들과 함께 곰배령에 오르고, 백담사 만해마을에서 무산 큰스님을 뵈옵고, 충남 예산 덕산 수덕사로 갔다. 집 떠난 지 사흘째, 덕산은 내 고향이다. 하지만 대전에서 크고 서울에서 살아 외할머니 돌아가신 후로는 몇 번 가본 적이 없다.

수덕사는 이 고향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곳. 옛날에 수덕사 비구니 스님들이 절 떠나 여행을 하시거나 돌아오실 때 외할머니 댁에 들러 하룻밤 묵고 가시기도 했다고 들었었다. 교통이 불비해서 버스가 몇 대 안 다닐 때의 일이다.

이 수덕사에 어머니가 다니던 얘기며, 김일엽 스님을 만나고 여승이 되어볼까도 생각해 보던 얘기며, 김일엽과 이광수의 삶과 소설들에 관한 얘기며, 외할아버지가 그 수덕사 밑에서 어렵게 살던 나혜석의 그림을 사주기도 했다는 얘기 같은 것들이, 내 문학의 깊은 원천이 되었음을 나는 아주 나중에야 깨달았다.

이 수덕사에 온 것이다. 김일엽의 저술을 영문으로 번역한 박진영 교수가 법회 중에 강연을 하기로 했다. 나나 유진월 교수, 김우영 선생 같은 김일엽 연구자들이 이 기회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일엽 스님의 4세손뻘 되는 경완 스님이 우리를 따뜻하게 환대해 주셨다. 국문학을 전공했고 비구니 스님으로 계시면서 또 중문학을 공부하시며 정진하고 계시다.

수덕사 환희대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법회가 열리고 있었다. 김일엽 생전에 수좌가 된 월송 스님이 대중들과 더불어 염송을 하신다.

월송 스님, 낭랑한 목소리로 경을 외시고 세상 떠난 이들의 영혼들과 그 자손들과 법회에 참석한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빼놓지 않고 불러가실 때, 나는 합장하고 삼배를 드리고 또 합장을 하기를 반복한다.

원컨대, 이 숙연한 법회에 모인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생사고락의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바로 그처럼 이 세상 사람들 하나 하나가 절망과 고통과 슬픔과 갈등과 상쟁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내가 읽은 소설 중에 이런 얘기가 있다. 부처님이 부처가 되신 것은, 전생에 나고 죽기를 수없이 거듭하는 그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서, 한 생에 오로지 한 사람만을 구하시기를 무수히 하심으로써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한 생에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하여. 이것은 내가 부질없이 의지해 왔던 세속의 사상들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이 세속에서 세상을 바꾸고 사람들을 구하겠다는 이들은 권력을 잡고, 제도를 바꾸고, 추상적인 계급, 계층, 지역, 성별, 연령을 위하여 일을 벌이되, 구체적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지는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일찍이 도스토예프스키가 자기 소설에서 말하기를, 추상적인 인류를 사랑할 수 있으되 살아 있는 그 사람, 내 바로 옆에서 숨쉬는 사람 하나 하나는 미워하다 못해 증오해 마지 않고 마는 것이다.

월송 스님이 법회에 모인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듯, 이 세상 사람들 하나 하나 그 낱낱의 생명 모두를 건져올려 구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종교의 이상이며, 또 이상이 되어야 한다.

벌써 20년 전에 수덕사에 한 번 들른 적이 있다. 어렸을 적부터 정든 만공 선사, 김일엽 스님의 체취 어린 소담한 산사의 정취 어디가고 한창 불사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그 서글픈 상실감을 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새로 수덕사에 드니 소나무, 꽃 향기 속에 그윽한 덕숭산 총림의 깊이를 실감한다. 멀리 낯선 곳 떠돌다 잊었던 고향에 돌아온 탕아의 심정을 맛본다.

법회가 끝나고 사람들 모두 흩어지고 덕산 옛날 비오는 거리를 걸었다. 옛날은 흩어져가고 현재는 쓸쓸하고도 번잡하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 모든 것에 다시 저 옛날이 스미리라. 우리는 다시 회복을 얻으리라. 사랑이 그것을 가능케 하리라.

방민호칼럼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