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 소설 중에 `카인의 후예`라는 것이 있다. 제목부터 매우 종교적인 인상을 풍기는데, 해방 후 북한 지역의 토지개혁을 배경으로 지주 집안의 후예 박훈과 마름의 딸 오작녀의 삶의 행로를 그린 것이다.
왜 제목이 `카인의 후예`이어야 했나, 하고 물을 때 우리는 성경 속에 등장하는 카인에 관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카인은 아담과 이브 사이에서 난 맏아들이다. 그는 농사를 지었고, 동생 아벨은 양치기였다. 두 사람은 하느님께 공물을 바치는데, 아벨의 것은 기쁘게 받으면서 카인의 것은 받지 않았다. 이에 질투를 이기지 못해 카인은 아벨을 죽이고, 하느님의 저주를 받아 떠돌아 다니다 에덴의 동쪽 놋땅에 정착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에서 황순원이 자신의 소설을 `카인의 후예`라 한 것은 우리 한민족이 농경민들임을 상징적으로 지칭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우리들은 땅에 붙박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카인의 후예들이다. 그러나 카인의 후예라는 말은 우리가 단지 농사 짓는 민족인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 속에서 카인은 최초의 살인자다. 그는 질투심으로 동생을 죽이고 떠돌다 자신의 죄를 받아들이고 겨우 정착해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이 카인의 아들이 에녹이요, 이로부터 많은 자손이 생겨났다. 에녹은 그가 건설한 도시의 이름이기도 하다. 따라서 카인의 후예란 죄를 짓고 그 죄에 기반해서 문명을 이루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부언하면, 이로부터 존 스타인벡의 거작 `에덴의 동쪽`이 나왔고, 이것이 다시 영화화되어 제임스 딘이라는 불멸의 청춘 초상을 낳았던 것이다.
이야기를 조금 더 진전시켜 보면, 카인의 아들 에녹은 수많은 자녀를 갖게 되고, 그중에 유목민의 아버지인 야발도, 대장장이의 조상인 두발카인도, 최초의 음악가인 유발도 나오게 된다. 그런데 이 유목이며, 대장장이며, 음악이라는 것은 곧 문명을 이루는 원초적인 것들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결국 문명은 죄로부터, 죄의 인식으로부터 생겨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문명을 이루며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인정하며, 그 기반 위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자신의 죄를 부인하는 태도로부터는 진정한 자기 향상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카인에 관한 어떤 책 가운데서 전후의 일본과 독일을 비교하는 구절을 발견하게 된 것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거기서 이렇게 썼다. “문명이 건설된 것은 잘못을 인정했기 때문이 아닐까? 역사가 불행한 반복에 의해 피로 물들지 않게 된 것은 범죄가 저질러졌다고 인정한 사실에 의해서가 아닐까?”
전후에 독일은 자신의 죄를 근본적으로 반성했던 데 반해 일본은 그것을 부인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어제 신문에 네덜란드에서 일본의 고노 담화 검증을 비판하는 시위가 있었다고 났다. 일본은 세계제2차대전 중에 네덜란드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뒤 네덜란드 사람들을 11만명이나 수용소에 가뒀고, 이 가운데 1만3천명이 죽고, 200명은 위안부로 끌려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 위안부가 수천 명이나 된다는 기록도 있다. 또 최근에는 그 생존자들 몇 사람의 증언을 담은 책이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 일본 문제는 단순히 한중일 3국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일본이 자신의 과오를 승인하고 이를 성찰하려 하지 않는 한 진정한 문명국의 위상을 확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집단 자위권이라는 미국, 한국, 일본 삼각동맹의 필요성에 기대어 과거를 부정, 부인하려 드는 것은 큰 나라로 가는 길을 스스로 막는 우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