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명량`

등록일 2014-09-04 02:01 게재일 2014-09-04 19면
스크랩버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

역사라는 것은 참 무정하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제때 그대로 주는 법이 없다. 몽골 초원에서 일어난 칭기스칸은 몽골 제국을 일으킨 대영웅이었지만 역사는 몽골인들에게 그와 같이 위대한 인간을 단 한번밖에는 그 출현을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 몽골은 반은 중국 영토가 되어 내몽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중국 글자와 전통적인 몽골 문자를 섞어 쓰고 있으며, 나머지 절반인 외몽골만이 몽골로 독립하여 알파벳을 활용한 문자 운용 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 두 몽골이 하나로 돌아가는 일은 역사상에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현대는 현대 이전보다 훨씬 가혹해서 한 번 기회를 상실한 민족에게 또 다른 가능성을 부여해 주지 않곤 한다.

역사가 가혹할 정도로 기회에 인색하다 함은 한국문학의 영역에서도 드러난다. 우리는 러시아 문학이 가진 도스토예프스키를 가졌는가? 톨스토이를 가졌는가? 영문학이 가진 토마스 하디를, D.H. 로렌스를, 버지니아 울프를 가졌는가? 할 때, 그 훌륭한 작가의 수효가 많지 못한 한국현대문학의 영세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뭐니뭐니 해도 탁월한 이야기꾼이었던 이광수 같은 작가를 한국문학사는 몇이나 품고 있는가? 아마도 그는 50년 혹은 100년에 한 번 날까말까 한 작가라고도 할 수 있다.

최근에 빅 히트를 기록하고 있는 영화`명량`을 보면서 나는 다시 한번 이 역사의 가혹함을 생각하게 된다.

그때 이순신은 이 나라에 존재할 수도 있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역사는 아주 관대하게도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하여 이 나라에 존재하도록 하는 행운을 베풀었다.

명량해전을 앞두고, 임금을 향해, 자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노라고, 바다를 지키게 해달라고 진언을 올릴 수 있었던 이순신의 존재로 말미암아 조선 반도는 더 이상의 도륙을 면하고 사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이순신은 역사상에 몇 년만에 한번씩 나는 인물인가? 하면, 내 생각으로는 500년에 한번 날까 말까 하다. 살려 하면 죽을 것이요, 죽으려 하면 살 것이라는 불굴의 의지와 용기로 전대미문의 전란을 헤쳐간, 그리고 그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같은 인물을 우리는 그 이후의 역사 속에서 더 만나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많은 인물들을 가상적으로 떠올려 보지만 그 멸사봉공의 뜨거운 정신에 버금갈 인물을 나는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바로 그 이순신과 같은 인물을 목마르게 갈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초인이 역사와 민중을 구제해 주리라는 엘리트 역사관에서가 아니라 헌신적이고도 희생적인 참된 정신의 소유자만이 우리로 하여금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게 해줄 것이라는, 구원을 갈구하는 마음에서다.

말과 글, 뉴스들이 실로 수없이 교차하는 오늘날 그것들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영웅의 이미지를 간단없이 제공해 주고 있으나, 정작 그 허상 아래 감추어져 있는 실제 인물의 실체는 초라하고 보잘 것 없다. 진짜 영웅은 없고 영웅의 분식된 이미지만 있다.

김수환 추기경이 돌아가실 즈음의 일들이 생각난다. 이미 병이 깊어 임종을 앞에 둔 추기경께서 아마도 그때는 추기경직을 내놓고 요양하고 계셨던 때였던 것 같다.

어느 오솔길을 허적허적 걸으며, 예수의 형상 아래 늙고 지친 몸을 엎드리고 신의 뜻을 묻는 노추기경의 모습에서 나는 황야를 헤매는 신의 아들의 이미지를 언뜻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은 누가 성스러운지 나는 잘 알 수 없다. 그분을 만나고 싶다. 가장 낮은 곳에 엎드리는 자가 가장 높은 사람일 텐데, 지금 우리는 다들 너무 높다. 자기를 바쳐 남을 구할 이순신을 만나기 어려운 시대다. 그래서 우리의 병이 이다지도 깊은 것인지도 모른다.

방민호칼럼 기사리스트

더보기
스크랩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