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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이모부 문병

등록일 2014-05-22 00:49 게재일 2014-05-22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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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어머니가 전화로 이모부가 많이 아프시다고, 한 번 찾아가 보라고 했다.

어디 계신대요?

영등포라시더라.

가깝다.

일산에 계셔도 꼭 찾아뵈어야 할 분이다. 하물며 차로 20분 거리야. 밤에 이종사촌형한테 병원 주소를 물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일정이 복잡해서 시간을 조정하기 어려운 날이었다.

병원을 향해 차를 움직여 가면서 지나간 일들을 생각했다.

내가 서울에 온 것은 대학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다행히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때는 공동세탁기조차 변변치 않았다. 그때 내게 서울은 크고 낯설었다. 나는 빨랫감을 싸들고 서울 이모집에 가곤 했다. 밥도 얻어먹고 이종사촌형, 누나들과 섞여앉아 놀기도 하고, 내친 김에 하룻밤 머물기도 했다.

더 옛날 장면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외갓집 외삼촌 방에 이모부들이 모여 앉아 바둑도 두고 술도 치던 장면 같은 것들. 부드럽고도 아기자기한 어른들의 즐거움이 어린 내 눈에도 특별하게 비쳐오던 나날들.

서울 이모부는 원래 학교 선생님이셨다. 나의 아버지와 같은 학교에 계셨고, 아버지는 체육, 이모부는 사회셨다.

듣기에 내 어머니와 아버지가 결혼하게 된 것은 아버지가 외갓집 동네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했고, 아버지가 이모부를 통해 소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나중에 서울 이모부는 교편생활을 접고 서울에 가셨다. 형님인가의 사업을 돕기 위해서였다는데, 그때부터 이모부는 서울 이모부라는 별칭으로 통했다.

한 5년전쯤 나의 아버지가 분당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대장, 신장에 동시다발적으로 암이 생겼던 것이다. 그때 서울 이모부께서 하루가 멀다 하고 문병을 오셨다. 마지막 퇴원 날까지 챙기셨던 걸 보면 손아랫동서인 아버지에 대한 우의가 자못 깊으셨다고 해야겠다.

이제 병원 앞이다. 마트에 들어가 음료수를 샀지만 직접 드시지는 못할 것이었다.

병원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이모부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자칫하면 간호사 앞에서 이모부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하는 수 없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고는, 참, 그렇지 한다.

이제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 호실로 찾아간다. 503호실, 문은 열려 있고, 눈에 들어온 풍경이 5인실이다.

그 가장 안쪽에 낯익은 얼굴이 모로 누워 계셨다.

이모부. 민홉니다.

이모부는 사람을 잘 못 알아보실 지경이 되셨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으셨다.

고맙다.

이모부는 본래 말수가 많지 않은 분이셨지만, 지금은 말씀을 길게 이어가실 상황이 못되었다. 마침 곁에는 아무도 없다. 이종사촌형은 오늘은 조금 늦는다고 했다.

나는 이모부의 큰 손을 잡아드렸다. 손은 옛날에 백병원에 계신 이문구 선생을 마지막으로 찾아뵈었을 때 잡아본 손처럼 찼다. 나는 이모부 침대 옆에 앉아 나 혼자 이것저것 보고를 드리듯 이야기를 이어간다. 몇 년만에 뵙나 생각한다. 그동안 찾아뵙지 못한 게 죄송스럽기 그지없다.

머리맡에 붙여놓은 환자 정보를 읽어본다. 이모부 이름이 써 있고, 90세라고 써 있다. 한 따뜻하고 자상하고 말 수 적은 사람이 지금 90년이라는 세월을 이어와 이 자리에 누워 있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사람의 삶은 얼마나 장려한 것인가. 사람의 생명은 얼마나 그윽한 것인가.

나는 긴 세월의 여정이 깊이 스며들어 있는 이모부의 주름 깊은 야윈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 순간 이모부의 두 눈은 물빛으로 맑게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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