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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근대문학관 설립이라는 꿈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지난 6월25일 오후 1시30분부터 5시까지 국회에서는 국립 근대문학관을 설립해야 한다는 논의가 벌어졌다. `국립 근대문학관 조성을 위한 토론회`는 도종환 의원과 한국작가회의가 공동으로 주최하였고 평론가 임헌영 선생이 기조발제를 맡았고, 인천에서 근대문학관 관련 일을 하고 있는 이현식씨, 중앙대 교양학부 교수 오창은씨, 소설가 김형수씨 등이 발제를 했다고 한다. 주된 논의 내용은 필자가 직접 가보지 않아서 자세히 알 수 없다. 며칠 사이로`문학의 오늘` 편집장인 홍성식 씨에게 자료집을 얻어 보기로 했다. 필자가 시간이 맞지 않아 홍 편집장에게 꼭 가 보아 달라고 요청해 놓았었기 때문이다.홍성식 편집장의 전언에 따르면, 이 자리에는 이시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이 참석했다. 또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직접 참석하여 토론회 취지에 적극 공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문학이 문화예술의 원천이자 본류이므로, 우리 역사 속에서 창조된 문학 유산을 보존하여 후세에 잘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도움 발언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는 또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 위원회 위원장인 신학용 의원도 참석했다고 한다.나라가 주최가 되어 근대문학관을 설립해야 한다는 생각은 만시지탄의 감이 없지 않지만 적극 환영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이 논의가 시인으로서 국회의원이 된 도종환 의원을 중심으로 발의된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작가회의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토론회의 주역 가운데 한 축이 된 것은 이 문학인 단체가 지향해 온 방향을 감안할 때 의미 있는 일이기도 하다. 참고로 필자는 직접적인 활동은 잘 하지 못하고 있으나 매월 4만원씩 내는 이 단체 회원이기도 하다.근대문학관 논의를 보면서 필자는 몇 년 전에 썼던`근대문학관에 다녀왔다`라는 글을 떠올렸다. 그때 필자는 이렇게 근대문학관의 꿈을 이야기했다.“오늘은 오랜만에 한국 근대문학관에 다녀왔다. 개관식 때도 참석했고 그 직후에도 스케치 기사를 쓰러 다녀온 적이 있지만, 근 1년 만에 다시 찾은 문학관은 본모습을 갖추고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관광객들의 명소가 되어 있는 듯했다.찾아가는 길도 어렵지 않았다.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 매시간 출발하는 셔틀버스가 있어 문학 기념관을 방문하고 싶어하는 관광객들을 코앞까지 실어 날라주는 것이었다.3시40분쯤 광화문에 도착해서 기다리는데 의외로 문학 기념관을 구경하려는 관광객들이 많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초등학생을 동반한 한국의 어머니들과 단체로 모여 왁자지껄한 중국인 관광객들은 물론이요, 둘씩 셋씩 짝지어 소곤거리며 눈치를 보는 일본인 관광객들, 배낭을 맨 커다란 키에 달라붙은 두 눈으로 동양인들을 신기한 듯이 내려다보는 서양인들까지, 각종의 사람들이 함께 버스를 기다리는 것을 보니, 문학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한국근대문학관은 개관 1년 만에 명실상부 빼놓을 수 없는 서울의 관광 코스가 된 것이다.”이 글이 발표된 후 적어도 세 분 이상 내가 가상으로 꾸며 놓은 스케줄 때문에 직접 세종문화회관까지 오셔서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고생을 하신 분이 계셨던 것으로 안다. 그분들게 이 자리를 빌려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이 글을 쓴 때가 2002년경, 이 글이 평론집`문명의 감각`에 실린 때는 2003년이다. 이제 이 논의가 공론화 되는 것을 보니 우리도 이런 새로운 꿈을 현실화 해나갈 수 있게 된 것이 무척 기쁘다.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이 사업은 이념을 초월해야 한다. 둘째, 이 사업은 관광 상업적인 요소와 더불어 무엇보다 학술적인 가치를 중시해야 한다. 앞으로 이 논의가 더욱 활성화되기를 기대해 본다.

2013-07-04

갖추어 끝내는 법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규장각에서 `자전적 소설의 제 문제와 이광수 장편소설 세조대왕`이라는 발표를 한 날이다. 또 늦었군, 하는 한탄을 하며 롯데호텔 37층까지 택시 안에서도 뛰듯이 달려갔다. 고려대학교에서 이번 여름을 끝으로 정년퇴직을 하시는 선생님께 제자들이 기념문집을 만들어드리는 날이다. 이 책은 여러 시인들, 비평가들이 자신의 시를 싣거나, 그 선생님의 시에 관한 글을 싣거나 한 것이다. 나는 이 책에 `반구대 향유고래의 사랑노래`라는 시에 관해 썼다. 이런 행사를 정년퇴임 기념행사라고 하고, 제자들이 돈을 모아 치르게 되는데, 여러가지 이유로 국문학계에서는 급속도로 사라져가는 중이다.무엇보다 당사자들이 이런 행사를 무척 부담스러워 한다. 제자들이 경제적, 심리적 부담을 짊어지는 게 싫을 뿐만 아니라, 이것으로 끝임을 드러내는 것도 싫다. 떠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싫은 것이다. 논리도 있다. 떠나는 사람이 소리소문 없이, 홀연히 사라져 주는 것이 옳지 끝까지 번거로운 행사까지 하며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 하는 것이 옳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선생님 제자들은 유별나서 굳이 봉정식을 마련하고 한 자리에 모였다.빈 자리를 찾아들어 겨우 앉으니 좌중이 모두 조용하다. 홀 중앙에 설치된 스크린에 이 선생님이 걸어오신 지난 날들의 흔적이 슬라이드로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들이 몽타주 식으로 흘러가는 동안 다들 숨을 죽이고 이 분과의 인연을 되새기는 듯했다. 나 또한 이 선생님과 교분을 맺어온 지난 십 수년의 일들을 떠올리며 마음이 숙연해졌다.슬라이드가 끝나자 다들 박수를 쳤다. 고려대 총장을 지낸 홍일식 교수를 비롯한 두어 분이 축사를 하고 정일근 시인이 축시를 낭송하고 제자들이 편집한 책을 드리고, 마침내 이 분이 인사를 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이 선생님의 말씀은 주어진 시간이 5분이라 해서 그런지 길지 않았다. 그동안 함께 해온 사람들에게 두루 감사의 인사를 하고 나니 지나간 날들을 회상할 말들이 길지 않다. 뿐만 아니라 선생님은 잔뜩 긴장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적당한 말씀을 찾지 못하는 듯했다.그러나 어찌 됐든 무사히 다 치러내셨다. 나는 전날밤을 발표준비로 꼬박 새우다시피 한 까닭에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앉아 있는 것도 몹시 힘들었다. 박수도 제때 쳐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내 머리속에는 장려하게 끝내는 법이라는 말이 맴돌았다.마침 내가 그날 발표한 논문의 주인공인 세조는 재위 14년만에 장려한 죽음을 맞고 있었다. 이광수의 `세조대왕`은 세조의 말년 3년을 그린 것이고, 마지막 장에 이르러 세조는 마침내 야망과 살육과 죄의식으로 점철된 인생의 고뇌에서 벗어나 삶을 마감한다. 논문을 쓰면서 나는 이광수가 세조의 최후를 쓸쓸하면서도 장엄하게 그려냈다고 생각했다.원탁 테이블에 연세 지긋하신 선생님들 사이에 앉아서 나는 끝을 잘 맺는 것도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냥 홀연히 사라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그러나 어느 자리에 등장한 사람이 퇴장까지의 시간들을 묵묵히 감당해내고 끝을 알리는 자리까지 지켜내고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무대를 내려가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나는 어떤 일이고 제대로 잘 갖추어 끝내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퇴임식도, 졸업식도, 장례식도 그래서 중요하다.모처럼 제대로 갖추어진 퇴임기념식이었다. 나는 이 어려운 자리를 마련한 제자들과 끌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준 선생님 모두가 `장해` 보였다. 나는 이렇게 갖출 것을 갖추어 끝내는 일이 우리 사회에서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는 이 끝이 두려울 수 없다.

2013-06-27

힐링 멘토 처세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바야흐로 힐링 시대다. 치유가 시대의 화두로 떠오른 것이다. 몸도, 마음도 치유해 줘야 한다는 말이 홍수를 이룬다. 힐링을 위한 수련원이나 휴양지가 각광을 받고 이런 힐링 저런 힐링이 조수가 바뀌듯 밀려들고 밀려들고 한다.어떤 기자분이 내게 물었다. 힐링 열풍의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나는 이렇게 말했다.힐링은 나쁜 게 아니다. 하지만 힐링 열풍의 배후에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관심과 참여에 대한 실망감이 가로놓여 있다. 지난 30년간 우리들은 사회를 공동체로 바꾸려는 노력을 펼쳐왔다. 민주주의, 복지, 노동 조건 개선, 생활협동조합, 새로운 교육, 시민단체, 여성 인권, 귀농…. 이런 쟁점들이 우리 사회에 물결처럼 밀려와서 밀려갔고 또 그런가 하면 밀려가지도 않고 머물러 있기도 하다.그래서, 그렇게 해서 우리들은 행복해졌는가? 삶은 나아졌는가? 삶의 보람을 찾았는가?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부정하는 자가당착에 빠져야 한다.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가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모두 고통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는, 투쟁의 형태가 아니고는 이루어져 나가지 못했다는 것이다.변화를 추구하는 흐름과 본래 가치를 지키려는 입장 사이의 대립과 투쟁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지만, 우리 사회에 깊은, 집단적인 상처를 남겼다.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으며 바꾼다 해도 그 대가가 너무 크다. 또 그러는 사이에 숱하게 많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내가 소속한 사회를 바꾸려는 노력이 나를 힘들게 하고 병들게 한다.힐링 열풍은 그 결과 중 하나다. 시선을 사회에서 자기로 바꾸어 주고 그럼으로써 지치고 병든 나를 구제하려는 사회적 현상이 주류화 된 것이다. 그래서 힐링 열풍은 대규모의 사회적 흐름이지만 그 실천 단위는 개별자라는 독특한 양상을 띤다.힐링은 또한 우리들의 관심을 물질적인 것, 제도적인 것, 법률적인 것에서 정신적인 것, 무형의 것, 비공식적인 것 쪽으로 돌려나왔다. 물질적 조건의 개선을 위한 제도적, 법적 투쟁은 개인들의 삶을 위협하고 그들의 영혼을 짓밟고 일그러뜨렸다. 고귀한 이상이라고 믿었던 것이 자기를 망가뜨리고 흉칙하게 만들었던 경험을 우리는 수없이 겪어왔다. 이제 바뀌어야 하는 것은 그래서 사회가 아니라 자기가 되었다. 치유해야 하는 것은 자기, 나라는`사실`이 명백해졌다.힐링은 다시 멘토를 요청하게 됐다. 사회를 바꾸려는 집단적 흐름은 그 운동의 지도자를 요청한다. 이 지도자는 운동의 단위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지지만 그 단위를 벗어나면 영향력은 사라진다.멘토는 그와 다르다. 멘토의 치유적인 능력이 미치는 범위는 그 경계가 모호하다. 그 영향력의 정도도 불확실하다. 어떤 멘토의 지도력이 힐링을 요청하는 이의 삶에 얼마나 구체적인 힘을 행사하는지도 불분명하다. 그러나 그 힘은 폭넓고 유연한 지도력을 가진다. 개인들은 멘토를 자신의 삶의 개선을 위한 하나의 방법적 가능성으로 승인한다.이렇게 해서 힐링의 시대, 멘토의 시대가 도래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구원을 향한 여행을 떠난다. 자기 치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영혼은 그가 몸담고 있는 사회에는 없다. 그들의 진짜 자기는 그 공적 영역이 아니라 구도 여행 중인 여로 속에 있다.그러면 그가 떠나버린 사회 속엔 무엇이 남았나. 처세. 바로 처세가 남았다. 사회는, 공적 공간은 처세해야 할 곳일 뿐이다. 사회에서는 좋은 처세로 성공을, 진짜 자기는 구도자의 여행으로.지금 서점가는 힐링, 멘토, 처세가 키워드다. 이것은 어쩌면 이 사회가 겪고 있는 병의 깊이가 더 심각해졌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2013-06-20

글로벌리즘, 민족, 그리고 한국인의 자각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한국인으로서의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 것은 언제부터일까? 필자의 경우에는 197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애국가를 배우고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국기에 대하여 맹세를 하면서부터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중에 몬트리올 올림픽에 나간 양정모 선수가 우리나라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땄을 때도 한국인으로서의 뿌듯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 때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축구를 대단히 좋아해서 박스컵이나 월드컵 예선 경기가 있는 날은 전부들 텔레비전 앞에 모여들 있었다. 그땐 왜 그렇게 골을 넣기가 힘들었는지 모른다. 열렬히 응원을 해도 열에 여덟은 진땀을 흘리고 괴로워해야 하는 결말들이 많았다. 그래 전부들 열렬한 애국자였다.나이가 들어 대학교에 들어가 현실을 비판하는 법을 배웠다. `창작과 비평`이나 `사상계`영인본 전집을 사고, 김수영 시집은 꼭 들고 다녀야 대학생 같다고들 생각하는 풍조가 널리 퍼져 있을 때였다. 나라와 민족이라는 말은 추상적이고 그 내용적 실체는 국민, 그 중에서도 민중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들어 나라를 `들먹이고` 민족을 `파는` 사람들을 싫어하고 그런 추상적인 민족주의가 이 나라를 오히려 병들게 한다고 생각했다.나중에 대학원에 가서도 비판적 지성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까닭에 공부도 기초적, 기본적인 문학이론도 다 익히지 못한 주제에 사상이나 이념, 시각에 관련된 사회과학 책, 인문학 책을 탐독하면서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비평가가 되려고 했다.그러다가 1997년 2월 우연한 기회를 얻어 일본에 11박12일쯤 후쿠오카, 오사카, 교토, 도쿄로 연결되는 여행을 하게 됐다. 최원식 교수가 추천해 주셔서 일본국제교류기금의 초청을 받아 신경숙씨와 함께 일생에 두 번째 해외여행을 하게 된 것이었다.그때 필자는 깊은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본을 모르고 일본에 가본 적도 없고 오로지 우리를 식민통치한 나라라는 생각만으로 밉게 보고 얕잡아 보고 싫어하기만 했던 일본이 자기들 전통과 역사를 얼마나 열심히 가꾸고 있는지 알게 된 것이다. 필자 개인적으로 이때의 충격은 마치 김수영 시인이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쓴 조선 여행기를 읽고 `거대한 뿌리`라는 시를 써서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라고 했던 것에 비견될 만하다.그때 필자는 우리나라는 과연 전통과 역사를 얼마나 잘 보존하고 있는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필자는 비판적 지성이 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를 아는 것, 자기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비로소 나중에 박사논문이 된 채만식 연구의 싹이 움텄다. 채만식은 `조선적 근대문학`이라는 문제를 안고 고민한 작가였다.최근에 이숲이라는 작가가 `스무 살엔 몰랐던 내한민국`이라는 책을 냈다. 스웨덴 웁살라대학에서 영어로 운영되는 석사학위 과정에서 냈던 논문을 바탕으로 `한국인`에 대한 사유를 펼쳐놓은 것이었다. `내한민국`이라는 말이 아주 인상적이다. `나의 대한민국`이라고 풀이할 이 말은 저자가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 대한민국을 재발견하게 된 이야기다. 그녀는 일제에 의해 왜곡된 한국인의 이미지를 걷고 한국인의 참모습, 진짜 모습을 제시하고자 한다.그녀는 386세대의 일원이다. 그런 `비판적` 지성이 우리나라를 사랑할 수 있는 나라로, 우리나라 사람을 사랑받을 수 있는 덕성을 갖춘 사람들로 재발견하게 된 사연들은 감동적이다. 그래서 문화부 장관도, 조국 교수도 모두 그녀의 논의에 귀를 기울였는지 모른다.지금은 글로벌리즘의 시대다. 그러나 이런 시대일수록 자기를 제대로 알고 진정한 자기의식을 갖는 일이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저 일본에서 왜곡된 국가주의가 발호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에게는 우리의 자기 인식이 필요하다고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2013-06-13

영주 무섬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백석이 일제 말기에 러디어드 키플링의 단편소설을 번역한 의미를 논의하는 발표를 한 후 동서울터미널로 갔다. 서둘러 갔는데도 영주행 고속버스는 가까운 시간대 것은 좌석표가 매진이고, 여덟시 넘어서 떠나는 것만 자리가 있었다. 영주는 서울에서 두 시간 반은 걸리는 거리다. 막내 동생이 군대 갈 때 영주 근방에 한 번 가본 적이 있고, 대학 선배인 송명호 선생이 영주 근처에 산장을 마련해서 한 번 가본 적이 있으니 이번이 세번째라고나 할까. 이번 영주길은 문학잡지`문학의 오늘`을 펴내는 은행나무 출판사의 단체 여행에 편집위원들도 함께 참여하게 된 것이다. 무척 피로했던 탓에 까무룩 잠들었다 깨어나니 버스는 벌써 영주로 빠지는 톨게이트를 지난다. 버스에서 내려서는 줄지어 서 있는 택시를 타고 무섬으로 가자고 했다. 밤에 따로 가는 법이 없고, 택시로 들어가는 수 밖에 없다고 했다.무섬은`물섬`이라는 뜻이라는 데, 땅이름의 연유는 잘 알 수 없다. 밤에 시골 길 쪽으로 빠져 덜컹거리며 외길을 따라 들어가니 밤에도 달이 환하게 떠서 기와집들이 줄줄 늘어서 있는 게 보인다. 다 왔다. 주연선 은행나무 사장과 소설가 심상대씨, 이평재씨, 이명랑씨, 박사랑씨, 신주희씨, 그리고 영주문화연구회의 심득용 회장을 비롯한 영주 문학인들이 백포장을 친 마당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영주문화의 특성이 무엇이냐. 경주는 불교문화요, 안동은 유교문화라면 영주는 유불 통합이라고 했다. 영주에는 부석사가 있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인 676년에 한국 화엄종의 종주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한국 최초의 유교 사원인 소수서원도 영주에 있다. 1541년에 풍기 군수로 온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세워 이것이 1550년 이황에 의해 소수서원으로 됐다. 영주시 순흥면에 이 서원이 있다.소설가 심상대씨는 목하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 소설을 연재중인데 아직도`마르시아스 심`시대의 입담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묵호를 아는가`, `떨림`을 쓴 심 작가는 지금 대중과의 접점을 열심히 모색 중이다. 어찌나 유머 감각이 뛰어난지 좌중에 심상대씨가 없으면 모여서 노는 흥의 80%는 사라져 버린다고 해도 될 정도다.나는 너무 늦게 당도한 탓에 영주문화연구회 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언 새벽 세시가 되어서 잠자리를 찾아들었다. 심상대씨와 한 방을 쓰게 됐는데, 한옥 기와집 문간방이다.`문학의 오늘`편집을 맡고 있는 전직 기자 홍성식씨, 윤후명 전집 편집을 맡게 된 소설가 지망생 강건모씨와 밤인사를 나누고 잠자리에 들었다.맙소사. 아침 일곱시 반부터 일찍 일어나야 부석사도 보고 소백산 12자락길 산책도 한다고 깨우고들 야단이다. 문인들이 모이면 아침에는 느지막이 아홉시쯤 일어나 아침밥을 먹는둥 마는둥 담소나 나누다 서울로 올라오면 되려니 했는데, 그게 아니다.영주 문화를 소개해 주겠다는 영주 분들의 의향이 작용해서 아침을 제주산 복어집에 가서 먹고 부석사로 가서 이 오래된 고찰에 얽힌 이야기들을 듣고, 소백산`자락길`의 맨 마지막 길에 해당하는 12자락 길을 걸어보기 위해 좌석리로 갔다. 좌석리에 내려서부터는 걸었다. 제주도 올레길이나 지리산 둘레길처럼 소백산을 열두 자락길로 옛 길을 다 살려놓았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산길을 걸었다.걸으면서 영주 무섬 마을의 아침을 생각했다. 일어나서 보니 마을에 옛 삶의 향기가 가득하다. 어느 곳보다 한옥들이 잘 보존되어 있고, 어느 집 마당 앞에 흰 작약이 피어 있었다. 이렇게 운치 있는 마을도 보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영주 여행의 맛을 다시 한 번 실감한 하루였다.

2013-05-30

경남 하동 역마문학제에 가서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하동은 서울에서 버스로 네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다. 지난 금요일 하동에서 김동리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역마 문학제`가 있었다. 나는 김동리 선생 탄생 100주년 사업추진단에서 개최한 이 행사에서 김동리 문학에 대한 발표를 하기로 돼있었다. 버스는 압구정역 현대백화점 앞에서 예정된 8시30분에 맞추어 떠났지만 그날이 바로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버스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더디게 달렸다. 일곱 시간이 넘게 걸려 가게 되니 행사는 예정보다 두 시간 이상 늦어졌다.김동리의 단편소설`역마`가 화개장터를 배경으로 씌어졌다 해서 하동에는 역마공원도 꾸며져 있고, 몇 년 만에 보는 화개 장터는 놀랄 만큼 변모, 그야말로 번화하기 이를 데 없는 곳이 돼있었다.나는 그곳에서`김동리의 일제말기 넘어서기`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다. 내게 이 발표는 매우 중요한 생각의 전환을 가져다 준 것이다. 몇 년 전부터 나는 김환태의 순수문학론이나, 조지훈 또는 오장환의 일제 말기 행적이나, 작년에 백석의 일제 말기 번역 작업 같은 것에 관심을 가져 왔다.일제 말기라는 어려운 시대에 공동체의 운명에 대한 윤리적 감각을 저버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희생해서라도 문학적 순수성을 지켜나가고자 한 사람들의 행적과 작품을 살피는 것이 내 의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세상은 언제나 세속적인 욕망과 힘의 논리가 이끌어가는 것 같지만 그 흐름 밑에는 진정한 의미의 수류(水流)가 있음을 이들을 접하면서 나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김동리는 그런 내 공부길에 하나의 결정적인 포인트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 하다. 이로써 나는 역사와 문학을, 그리고 사람을 이데올로기에 비추어 판단하는 인습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올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김동리의 소설 가운데`두꺼비`라는 것이 있다. 이 작품은 이야기 중에 하나의 설화를 소개한다. 능구렁이에 잡아먹힌 두꺼비는 그 배속에서 알을 까서 종내 능구렁이 뼈 마디마다에서 새끼 두꺼비들이 벌개미들이 쏟아져 나오듯 쏟아져 나온다는 설화가 있다는 것이다. 김동리는 나중에 이 설화의 의미를 설명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에 따르면 이 두꺼비 설화가 우리나라 곳곳에 퍼져 있음은 그것이 우리 민족의 사고 방식이나 의지 같은 것을 대변해주기 때문이다. 그는 이 설화의 핵심적인 내용은 능구렁이 뼈 마디마디에서 두꺼비 새끼들이 알을 까고 나온다는 것인데, 그것은 두꺼비는 죽을지언정 두꺼비의 의지는 죽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다. 일제 말기에 민족은, 그리고 김동리 자신은 일본이라는 능구렁이에 잡아먹힐지언정 그 정신만은 죽지 않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고, 그는 그 어려운 때에 생각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해방 후에 김동리는 분단이 현실화 되고 좌우익 대결이 극심한 상황 속에서 순수문학론을 기치로 이른바 우익 문단을 이끄는`실권자`의 역할을 해냈다. 김동리의 이름은 이때부터 좌우익 대립이나 참여문학론, 순수문학론의 대결, 현실비판적인 문학과`어용문학`의 갈등 같은 이름들에 의해 오염됐다.그러나 일제 말기 김동리가 보여준 행적과 작품들은 그에게 있어 문학의 순수라는 것이 결코 무사상, 무정치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속류 정치보다 더 깊은 정치, 민족의 명운이 경각에 걸렸을 때, 자기 삶을 걸고 문학의 가치를 지키는 일을 해낸 사람이었다.하동까지 갔다 돌아오는 길 또한 멀고 멀었다. 나는 함께 갔던 일행들과 헤어져 구례구역에서 KTX를 타고 겨우겨우 서울로 혼자 올라왔다. 기차를 타고 피로에 지쳐 하면서도 나는 한 인간의 내부를 이렇게 알게 된 것을 기쁘고 다행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2013-05-23

여수 밤바다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여수는 여수를 불러일으킨다. 막상 그 머나먼 남쪽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자 맘이 편치 않았다. 이상문학의 삶과 죽음이라는 걸 쓰고, 곧바로 일제말기 김동리 문학의 의미로 나아가야 했다. 그러고도 백석과 러디어드 키플링의 관계를 다루는 일이 남아 있다. 3월, 4월부터 내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논문을 쓰는 일은 일종의 진입공포증을 불러일으킨다. 논문 쓰는 일은 일종의 노동이다. 정신적, 육체적 노역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당장 쓰고 있지 않을 때도 늘 심리적 부담을 머리 위에 이고 다니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 과연 여수까지 훌쩍 떠날 수 있을까? 그러나 가야 했다. 여수에서 나는 소설`담징`을 주제로 한 북콘서트에 참석해야 했다. 나는 이 책에 임권택 감독과 함께 표사를 썼는데, 그 덕분에 이 책을 주제로 한 콘서트에 함께 초정을 받은 것이다.`담징`은 일본에 국사로 건너가 나라 호류사에 벽화를 그린 고구려 승려 담징의 생애를 그린 것이다. 김민환이라는 분이 작가인데, 오래전부터 임권택 감독과 시나리오 작업을 해왔다고 했다. 문장이 간결하고 승려 담징의 내면세계에 대한 묘사가 풍부하며, 당대 일본 사회를 흥미롭게 재현해 놓은 소설이다.나는 먼저 용산 역으로 가서 예약해 놓은 KTX를 타고 서대전역까지 갔다. 좌석표를 여기까지밖에 예약하지 못해 여기서 여수까지는 역에서 직접 구입한 좌석으로 옮겨야 했다. 용산 역에서 출발하는 호남선, 전라선 KTX들은 전라북도 익산까지는 18량으로 가다가 거기서 두 쪽을 내서 하나는 목포를 향해, 다른 하나는 여수를 향해 간다.여수는 멀구나. 저절로 이런 생각이 드는데, 익산부터는 정차하는 역도 늘어나는 것 같다. 기차는 순천을 지나 마침내 여수다. 여수의 기차역명은 아예 여수엑스포역이다. 나는 이런 방식의 역명은 처음 보았다. 당연히 여수 엑스포를 기념해 지은 역명일 것이다. 개찰구를 빠져 나오자 엑스포 건물들이 바로 눈앞에 보인다. 행사를 앞두고 새로 조성된 공간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지리를 전혀 모르는 나는 일단 택시 정류장에 가서 행사장 위치를 묻고 택시를 탄다. 도시 한쪽 끝에서 다른 한쪽 끝으로 가야하지만 거리가 얼마나 되랴 싶다. 하지만 도시는 길다. 긴 터널이 뚫린 외곽도로를 타고 달리는 택시비는 찰칵찰칵 잘도 올라간다.앗, 바다다. 터널을 지나 도시 안으로 택시가 진입하자 바다가 보인다. 그와 함께 그림 같은 섬들이 눈에 들어온다. 연안 도시가 이렇게 호수처럼 아름다운 곳이 일찍이 없었던 것 같다. 오랜 시간 발전이 더뎌 공장이 없고, 한적한 동네로 남아있는 동안 자연은 그대로 여수의 것이 된 듯 했다.행사 마치고 숙소에 올라가 보니 10층, 다시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밤이 되자 나는 임권택 감독 부부, 김민환 작가와 함께 `꽃마루`라는, 꽃차를 파는 곳으로 갔다. 2층 창밖으로 바다는 이미 캄캄하다. “여수 밤바다~” 하는 `버스커버스커`의 노래가 떠오른다. 꽃차는 홍화꽃차, 동백꽃차, 목련꽃차, 도화꽃차, 박태기꽃차…. 동백꽃차는 동백꽃만으론 맛이 부족해서 보리순을 함께 넣어 우려낸다고 했다. 꽃차를 차례로 마셔보고, 임권택 감독을 그토록 귀하게 여기는 이곳 사람들의 사인공세를 보고, 오디막걸리를 마시고, 차배순 교수, 박선희 교수 같은 사람들과 웃음꽃을 피우고 숙소로 돌아온다.밤 열두 시. 1006호 숙소에는 나 혼자다. 나는 커튼을 열고 캄캄한 여수 밤바다를 내려다본다. 비록 윤선도의 보길도는 여기서 다시 멀지만 나는 벌써 어지간히 멀리 와 있다. 속세로부터. 이 해가 다가기 전에 김민환 작가가 살고 있다는 보길도에나 가야겠다. 삶이 이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해서야 어떻게 사나. 인공에서 떠나 자연에 한 발자국이라도 더 들어가야 할 때다. 여수 밤바다가 내게 더 들어오라고 한다.

2013-05-16

젊은이들에게 좋은 잠자리를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우리는 같이 북쪽으로 갔다. 서울의 북쪽. 양주 광릉 봉선사를 거쳐, 포천으로. 거기서 일박하고 양평의 소나기 문학촌으로, 그리고 다시 철원으로, 고석정으로. 학생들과 함께 답사 다니는 것은 실로 유쾌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이들과 어울려서 뭐 그리 좋은가. 이렇게 물으시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글쎄, 무엇보다 생각이 가벼워져서 좋다. 나는 답사를 2박3일을 가면서도 가방안에 컴퓨터며, 책이며, 밤에 입고 다음날 갈아입을 옷가지들을 쑤셔 넣어 도르레 달린 캐리어 말고도 배낭 하나를 더 가져가야 했다. 학생들은 다들 가뿐했다.꼭 짐 얘기가 아니란 걸 다들 아실 것 같다. 이네들은 이것저것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단순하고 투명하다. 그렇다고 생각이 얕다는 게 아니고 순수하다는 쪽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어른이 되어 덕지덕지 묻히고 다니는 낡은 인습과 편견, 세상에 대한 차별상들에서 조금이라도 더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 이것이 젊은이들의 미덕이다. 청년들에게 배우라. 이것은 수사가 아니다.다음으로, 생각이 젊어져서 좋다. 이네들은 활기차고 그만큼 생각이 민첩하다. 아직 때묻지 않은 기상이 가슴속에 꽉 차 있어 생기가 있다. 청년들과 어울리다 보면 내가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가 보이고 또 그런만큼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한 살이라도 더 적게 먹은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물론 나이가 드는 것은 나쁜 일만이 아니다. 어른들은 시간과 함께 점점 더 많은 경험을 간직한 백과사전이 되어간다. 아프리카 속담에 노인이 세상을 뜨는 것은 백과사전이 불타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공백의 힘으로 새로운 것을 힘차게 흡수해 들이고 새로운 창조를 열어가는 것은 옆에서 보기만 해도 신나는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비가 오고 바람이 불 것이라 했는데 날씨도 화창했다. 포천 지나 철원 근방에 가니 생전 처음 그곳까지 올라가서 그런지 지형이 독특해 보였다. 고석정이라는 곳은 낯설지만 계곡 단층을 따라 내가 흐르고 바위와 나무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었다. 임꺽정이 이곳에서 삶을 마감했다는 전설이 숨쉬는 곳이라 한다.고석정에 앉으니 무릉은 높은 곳에 있지 않고 낮은 곳에 있다. 고석정 경치를 만끽하려면 아래로 계단을 따라 이 백 미터 이상을 내려가야 한다. 내가 지금 디디고 서 있는 땅보다 더 아래 쪽에 아름다운 무릉이 숨어 있었다고 생각하니, 생각의 관습이 깨어져서 좋다.돌이켜보면 우리는 모두 낮은 곳에서 가장 완전한 상태로 태어났다. 아무 옷도 걸치지 않고 아무 생각도 없이 아무런 부족함도 느끼지 않고 오로지 생명의 원리에 맡겨져 어머니의 젖만 있으면 되는 애기들이었다.이 애기들이 크면서 타자를 통해 자연에 어긋난 욕망을 익히고 그것 때문에 비틀어진다. 어릴수록, 젊을수록 그들 스스로 느끼지 못하는 완전함이 크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그런데 둘째날의 숙소는 가평 어느곳의 유스호스텔이었다. 젊은이들, 청년들의 계절인지라 다른 곳에서도 봄나들이 온 학생들이 꽤 눈에 띄었다.좋고 또 좋은 봄의 답사. 이 여행에 단 한 가지 아쉬운 게 있었다면 공익적일 유스호스텔의 설비와 위생이 아주 낙후해 보였다는 점이다. 그곳은 젊은이들을 위한 숙박공간이다. 가진 것 없는 젊은이들이 심신을 수련할 만하기로는 자연만 한 것이 없고 여행만 한 것이 없다.이들에게 더 나은 공간을 허하라. 나는 우리나라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윤택한 경제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때 더 많은 것을 청년들에게 드리라. 이것이 우리 미래를 더 밝게, 활기차게 만들어 주지 않겠는가 한다.

2013-05-09

막막한 행선지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1일은 메이 데이다. 쉬는 날이다. 하지만 쉬지 않는 사람들, 쉬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학생들과 함께 답사여행을 떠난다. 늘 먼 곳으로 떠나곤 했는데 이번에는 가까운 곳으로 간다. 경기도 양주 봉선사와 광릉을 비롯해서 경기도 강원도 일대를 돌아다닌다. 아름다운 봄이다. 봄도 지금이 제일 아름다운 때다. 서울은 지금 벚꽃이 이제 막 한창이고, 나무도 가장 싱싱한 초록빛을 띠고 있다. 여기서 더하면 짙어질 것이요, 그러면 봄은 쇠어지고 늙어지게 된다.이 아름다운 때에 나는 가장 좋은 여행을 떠난다. 내 가방 속에는 김윤식 선생의 이상 연구가 들어 있고, 노트로는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답함`이라는 희유한 단편소설의 초고가 담겼으며, 너무 많은 희망을 가지고 있어 방향 모르는 현재 속에 꿈을 가진 학생들이 동행하게 된다.이런 날 아침, 나는 다섯 시 사십 분쯤 깨어나 이것저것 준비를 한다. 그런데 잠시 새벽바람에 출판사에 들러야 한다. 급히 처리할 일이 있고, 이때문에 동교동 로터리라는 곳까지 택시를 타고 가야 한다.시간에 맞춰 모이는 곳까지 가려면 멀지 않은 거리라도 택시를 타야 한다. 집에서 나와 신촌 연세병원 앞으로 가 택시를 기다린다. 온다. 마을버스 뒤를 따라 손님을 발견한 택시 한 대가 내 앞에 와 선다.“기사님, 동교동 로터리 가주세요.”“예.” 기사님은 50대쯤 되어 보인다. 대답은 시원스럽지만 어감은 그렇지 않다. 경상도 말에 와, 하면 오라는 말인지 왜, 라고 묻는 말인지 어세를 들어봐야 한다. 예, 라는 말에 담긴 감정은 더 미묘하다.단 한 마디 말인데도 그것이 기꺼운 감정을 담은 말인지 마지 못해 내놓는 긍정의 말인지가 그 어세에서 단박에 드러나는 것이다.택시로 가기에는 가까운 곳이라서 타고 있는 내내 미안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다. 앞에 붙여놓은 기사 신분증을 보니 회사택시다.서울의 택시 기본료는 2400원이다. 커피 체인점들의 기본 아메리카노 커피는 싸면 전철역에서 파는 990원 짜리도 있지만 대부분 3500원 이상이다.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택시 기본료 거리를 가자는 게 떳떳할 수 없다.더구나 아침 일찍이다. 평소 출퇴근 시간에 사오십 분 걸릴 거리도 20분 이내에 주파할 수 있다. 장거리 손님이 타야 한다. 주야간 12시간 교대하는 택시들이 대부분인 서울에서 주간 근무조는 사납금 채워넣기도 빠듯하다. 주간 근무 때는 겨우 사납금 채워넣고 야간 근무 때 가욋돈을 벌어 얄팍한 월급봉투를 보충해 가야 한다. 짧은 주행 끝에 나는 내렸다.“저 지하철역 4번 출구 앞에 내려 주세요.”“예.” 나는 고등학교 동창이 다니는 스마트카드 회사에서 만든 티머니로 값을 지불하고 내린다. 내리면서 보니 이 4번 출구, 동교동 로타리에는 사람들이 없다. 왕래하는 사람들 없는 곳에 손님을 내려주고, 이 택시는 또 어디 있을지 모르는 손님을 찾아 막막한 운행을 해야 한다.출판사를 향해 걸어가며 생각하니 일하는 사람에게 돈을 버는 일은 막막한 행로와 같다. 돈은 그냥 돈이 아니고 생활, 생명 영위의 매개 수단이다. 나는 이른 아침 기사분에게 남겨놓은 막막함을 생각하며 버스를 타고 있다.지금 이 순간, 내 절친한 친구, 시를 쓰는 택시 기사 하나는 메이데이 `덕분에` 주간 일을 쉬고, 강원도 인제로 선배를 만나러 가고 있다. 전화 통화나 한 번 해볼까. 돈을 버는 것도 좋다. 하지만 이 친구가 오늘 같은 하루 봄빛을 받으며 하루치기 여행을 한다고 생각하니, 그렇게 마음이 기쁠 수 없다.

2013-05-02

안전 불감증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부산 옆에 기장군에 문학 강연을 하게 되어 아침 일찍 떠났다. 전날 회식이 있어 열두시 넘어서까지 무리를 했지만 일은 해야 했다. 새벽 다섯 시에 서울 역으로 나가 다섯 시 삼십 분 KTX를 탔다. 어디를 가도 가볍게 다니지 못하는 악습을 고치지 못하고 이번에도 트렁크에 책을 잔뜩 구겨넣고 떠났다. 오가면서 책이라도 읽고 글이라도 쓰겠다는 욕심을 부린 것이다. 하지만 전날 무리한 때문인지 눈이 감겨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대전까지 그냥 잠만 자다 겨우 정신을 차렸다. 강연 때 쓸 원고를 정리하려고 스마트폰을 열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분명 이메일로 발표 원고를 부쳐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메일 받은메일함에는 한 페이지 남짓한 분량밖에 없는 미완성 원고가 첨부돼있다. A4 용지 4~5페이지 분량을 써놓았는데, 이럴 수가. 어떻게 해야 하나.고민해 봐야 소용 없다. 결국 나는 다시 써나가기로 했다. 다행히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세세한 주를 붙이지는 못할지 언정 다시 빨리 쓰면 될 것 같다. 노트북 컴퓨터를 열고, 제목부터 단 뒤 대전에서 부산까지 두 시간 반 동안 원고 쓰는 일에 매달렸다. 그러나 일은 기차가 역에 도착할 때까지도 끝나지 않는다. 도시철도로 갈아타서 서면 역까지 계속 노트북을 두드려서야 원고 작업이 겨우 끝났다.노트북에서 아래아 한글로 작성한 원고를 블루투스를 사용해 스마트폰에 보내고, 다시 이 원고를 스마트폰에 설치된 학교 메일을 통해 부치고 나니 겨우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원고가 잘 당도했는지 담당자와 전화까지 하고 나서 비로소 스마트 폰으로 뉴스를 검색해 본다. 원자력 발전소가 가동 정지돼 전력 준비령인가가 발동되었다는 소식이 메인으로 떠있었다. 사실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기장군이라는 곳이 고리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곳이라고 했었다. 사고가 난 원자력 발전소는 경주 쪽에 있는 것이라고 들었는데, 원자력 발전소 고장이다, 가동 정지다 하는 뉴스가 요즘 심심찮게 기사로 올라왔다는 생각이 든다. 원자력발전소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마음이 심히 불안해졌다.기장군청은 군민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군민대학이라는 것을 운영하면서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전문가들을 초청해 군민들과 만나도록 한 것이 그 하나다. 기장군이 이렇듯 재정적인 힘을 쏟아 부을 수 있는 것도 다 원자력발전소 덕분이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다. 하지만 원자력이라는 것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원리원칙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지극히 위험한 문명의 이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나는 우리나라가 안전 문제에 아주 둔감하고, 준비가 잘 안돼 있는 나라라고 생각한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는 육해공부터, 지하에까지 수많은 대형 안전사고가 일어나 아까운 인명들이 희생됐다. 그 후 많은 노력과 정비가 이루어져 그와 같은 참사들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지만 원자력 발전소나 핵은 우리 삶을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는 문제로 남아 있다. 최근 북한에서 핵실험 운운 하면서 남쪽을 위협하고 있다. 원자력이나 핵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잘 알고 있는 인류 사회를 향한 북한 정권의 도발에 우리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그렇다면 우리 내부에서 우리가 관리하고 있는 원자력 발전소들은 훨씬 더 엄정한 관리체계를 수립할 필요가 있다. 나는 1년 전에도 원자력 발전소 관리 문제를 논의에 올린 바 있는데, 그 무렵 상당한 문제 제기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자력 발전소 관리를 둘러싼 크고 작은 문제들이 부각되는 것을 다시 보게 된다.기장군청에 강의를 하러 가면서 궂은 날씨만큼이나 마음이 편치 못했다. 원자력이 돈이 되고 문화적 혜택이 되는 것을 홍보하고, 그것을 누리는 것도 좋다. 하지만 안전하지 못한 원자력은 재앙이 될 수 있다.

2013-04-25

아름다움의 기준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봄이 왔다. 지난 한 주 춘한이 심하더니 드디어 봄은 한기를 밀어냈다.월요일까지만 해도 어떻게 흐를지 불분명해 보이던 일기가 이제 완연히 따뜻한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오늘 학교에 오르다 진달래꽃이 교정에 피어난 것을 보았다. 남쪽에서는 꽃이 벌써 피어 흐드러졌겠지만 이제서야 활짝 피어난 꽃이 반가웠다.점심을 먹으러 함바집으로 혼자 걸어갔다. 이런 날은 호젓한 기분으로 30년 전에도 있던 허름한 간이식당에 가 밥을 먹는 게 좋다.올라가며 보니 또 진달래꽃이 피어 있다. 응달에 자리잡은 진달래꽃은 꽃이 전부 햇빛 받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식당으로 가면서 내가 생각해 낸 이야기 하나를 오랜만에 새로 떠올렸다.내가 자주가는 출판사 마당에 아름다운 장미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 꽃송이 빛깔이 심히 아름답다. 과연 이 장미나무엔 꽃송이가 몇이나 열려 있어야 가장 아름답게 보일까.우리집 화병에는 벌써 몇 년째 꽃이 없다. 이 화병에는 장미꽃을 몇 송이를 꽂아 놓아야 가장 아름다울까.어느 조용한 양옥집 어느 방 침대위에 장미꽃 한송이가 떨어져 있다. 꽃잎은 몇 잎이나 꽃송이에서 떨어져 나와 있어야 가장 아름다울까.오늘 언덕을 올라가면서 비탈에 핀 진달래들을 보니 어느 것은 나이도 들고 또는 원래 타고나기를 그래서 가지도 많고 꽃도 수북이 피었다. 어느 것은 몇 점 애처롭게 피어 있다.같은 진달래꽃이언만 그 아름다움이 같지 않았으니 흐드러진 쪽보다 겨우 몇 송이 피워올린 쪽이 훨씬 더 심미적인 기쁨을 주었다.삶이라는 것도 심미적인 차원에서 보면 그와 다르지 않을 듯하다.돈은 얼마나 가지고 있어야 가장 아름다울까. 지위는 얼마나 높아야 가장 아름다울까. 명예는 얼마나 있어야 가장 아름다울까.이런 심미적 깊이는 많고 큰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서 문제가 간단치 않다.나는 모든 것이 적절할 때 아름다울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주 적어도, 작아도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나무 비탈에 응달진 곳에 간신히 몇 점 피어난 꽃들은 그 처절함 때문에 더욱 아름답다.그와 마찬가지로 생활에서도 작고 적게 가진 사람들은 감동을 준다. 그런 사람들은 존재 자체가 하나의 경이이고 그럼에도 생명을 지속해 가고 있음에 경탄할 만하다.오늘 저녁, 연구실에 앉아 있는데 한 학생이 찾아왔다. 벌써 오래 전에 졸업한 학생이다.성은 기억이 났지만 이름까지는 기억나지 않았다.대학원 공부를 하고 싶노라고 했다. 오래 전에 학부를 졸업해서 나이가 벌써 서른 살이 넘는다.나는 중도에 그만둘 공부라면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오랫동안 생각해 왔고 하다 말 생각은 하지 않겠노라고 한다.학생은 잠시 후 돌아갔다.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하는 아주 작은 희망만을 품고 오래전에 다니던 학교를 다시 찾은 학생을 생각하며 희망도 역시 크지 않아도, 많지 않아도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사실 인생에 희망이, 또 다른 많은 것들이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있으랴. 그래서 부족하고 때로는 빈핍한 것이 정상이다. 이 정상의 아름다움을 인정하고 돌볼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하루다.

2013-04-18

휴대폰 인생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요즘 나는 소설 쓰는 일에 미쳐 있는 것 같다. 갑자기 이걸 안 쓰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은 생각이 나서 어느 날 문득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설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취미로 쓰는 게 아니고서야 제대로 쓰는 것도, 계속해서 쓰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함부로 시작할 수 없는 게 소설이다. 남의 웃음거리 되기 쉽고, 스스로도 염치없어 은근슬쩍 그만두게 된다. 두고두고 미루던 일을 갑자기 시작하게 된 건 한 달쯤 전이다. 지하철을 타고서 갑자기 문자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스마트폰 문자로 써서 자기한테 부쳐놓는 것이다.집에서 학교까지 가는데, 신촌에서 서울대입구역까지 40분 걸린다. 다른 때는 책을 읽거나 스마트폰 메모장에 이것저것 떠오르는 것들을 정리해 두곤 했는데, 이것이 소설 쓰는 일로 바뀐 것이다.혹시 스마트폰 문자를 더 이상 쓸 수 없다고 할 때까지 써본 적 있는 분 계신가? 꽉 차게 써서 내 메일 주소로 부쳐서 아래아 한글 파일로 만들어 문서정보를 보면 분량을 알 수 있다. 200자 원고지로 7매가 된다. 그러니까 그렇게 열 판을 쓰면 70매, 단편소설 한 편 분량이 된다.헌데 눈이 나빠지는 게 문제다. 스마트폰은 빛이 없으면 볼 수 없는 것이다. 까만 바탕에 흰빛을 내는 메시지란을 빼곡히 채우노라면 눈이 어리어리해지고 흐릿해진다. 또 작은 글씨를 계속해서 봐야 하니 그 피로감이 보통 이상이다. 최근에 들어 급격히 어지럼증이 는 것도 그 때문인 듯 했다.지난주에, 그때도 나는 남들이 보면 꼭 미친놈이라 할 정도로 지하철을 타자마자 핸드폰 문자메시지로 소설쓰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날 따라 숨이 답답했다. 춘한이 밀려온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요즘 몸이 썩 좋지 못했다는 생각에 내복까지 단단히 받쳐입고 나선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그 날 따라 지하철 안이 온도가 높았다. 문래역이 가까웠을 때 나는 잠시 내려 쉬다가려고 생각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구 쪽으로 나가섰는데, 갑자기 지하철이 서행을 한다. 그런데 이 속도변화를 내 몸이 감당 못하고 현기증이 일었다.순간적으로 나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누가 흔들어 눈을 뜨니 바로 앞좌석에 앉은 남자가 나를 잡고서 묻는다. 그 사이 시간이 1,2초나 되었을까. 그이가 우려된다는 듯 “어디 안 좋으냐”고, 자기 자리에 앉으라고 한다. 나는 “좋지 않다”고 대답하며, 그 자리에 일단 앉았으나 내리지 않고는 현기증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나는 문래 역에 겨우 내려 플랫폼 벤치에 길게 누워버렸다.그런데도 어지럼증이 가시지 않는다. 오히려 더 심해지는 것 같아 아무래도 역무원을 불러야 할 것 같았다.결국 그날 나는 지하철 역무실 구경을 단단히 하고, 거기서 바늘과 실을 얻어 엄지손가락을 따고서야 겨우 일어났다. 119를 불러 병원 응급실에 가야할지 고민할 정도로 전에 없는 기현상을 겪은 것이다.나이 때문이냐. 스마트폰 소설 쓰기라는 유례없는 미친 짓 때문이냐. 물론 둘 다겠다. 스마트폰이 내 생활 속으로 얼마나 깊이 들어와 있는지 실감하게 된다. 이제는 웹하드에 들어가 내가 내야할 책의 표지 디자인을 보는 일까지 스마트폰으로 한다. 컴퓨터로 하던 많은 일들을 엄지족이 되어 처리하고 있으니 격세지감이란 이런 걸 두고 말함인가.사실, 이 글도 나는 지금 스마트폰으로 쓰고 있다. 지난번에 이어 두번째다. 시간이 컴퓨터에 비해 오래 걸리지만 대신에 켜고 끄고 로그인하는 불편함이 없고 무게가 안 나가 좋다. 고민이다. 이렇게 계속 하다가는 아무래도 눈과 머리가 거덜날 것 같은데. 낡은 엄지족의 새로운 탄생은 이렇게 진통이 크지 않을 수 없다.

2013-04-11

김동인을 만난 기쁨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요즘에는 김동인의 소설을 읽고 있다. 동인문학상의 주인공인 그 김동인이다. 김동인은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여자 알기를 우습게 여겼다. 요즘 같으면 글 쓰는 사람 행세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김일엽이나 김명순 같은 초창기 여성작가들을 글에 써 놓은 걸 보면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하지만 산문에 써놓은 것과 소설에 써놓은 건 다르다. `눈을 겨우 뜰 때`에 나오는 보패 같은 여자, `대탕지 아줌마`에 나오는 다부꼬라는 여급에 대한 묘사, `감자`에 나오는 복녀 같은 여자 인물들에 대한 묘사를 보다 보면 김동인은 여성들의 삶을 냉정하게 측정하고 평가하면서도 그이들의 삶의 불행을 깊이 동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최근 들어 나는 김동인 문학에 눈을 새로 뜨는 연습을 하고 있다. 보면 볼수록 김동인 같은 작가가 없었으면 우리 문학이 또 얼마나 빈곤했을까 생각한다. 이광수를 생각할 때 그 복잡다단한 인생과 문학에 연민을 품게 되듯, 한국전쟁기를 못 넘기고 세상을 떠난 이 천재 기질의 작가를 안타까워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한국현대문학의 불행은 실로 한국전쟁기에 숱한 좋은 작가들을 분단으로 혹은 죽음으로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있다. 김동인 문학의 좋은 특질이 어디에 있나. 나는 최근에`광염소나타`나 `광화사`같은 작품을 새로 읽으며 그가 문학의 보편성이라는 문제를 얼마나 깊이 고민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앞의 작품이 어느 천재 작곡가의 기행을 다룬 것임은 잘 알려져 있다. 또 뒤의 작품도 솔거라는 빼어난 화공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솔거라면 신라시대 얘기겠군. 하지만 아니다. 동인은 이렇게 썼다. 이름은 신라시대 화공 이름에서 빌려오고, 시대는 조선시대라 해두자. `광염소나타`도 이야기가 시작되면 이 얘기는 조선이라 해도 좋고, 일본이라도 좋고, 서양 어디라도 좋다고 한다. 시대도 어디라 해도 좋고 공간도 어디라 해도 좋다는 것은 그가 보편성이라는 문제를 얼마나 대담하게, 진취적으로 풀어나가려 했는지 알 수 있게 한다.사실 지난 수십년간 우리는 동인의 존재를 잊고 동인문학상은 주면서도 그의 논지를 넓게 받아들이고 경청하려는 노력은 소홀히 해왔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수백년전 괴테의 논리를 답습하면서 동인식 보편성의 함의에 큰 주의를 기울이지는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무엇이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인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필요한 때이며, 이때 자기 것, 자기 전통, 자기 지역의 것이 보편성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새로운 방식의 보편성을 구축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할 때다.나는 최근 작가들의 소설을 읽으며 이 작가들 대부분은 자기 전통을 말하면서도 정작 천착은 부족하고, 다른 소수의 작가들은 보편성에 대한 욕구 때문에 자기것을 차라리 버려야 할 것처럼 생각한다. 나는 동인이 그런 보편성을 실천에 옮기면서도 결국은 한국문학의 역사와 전통을 깊이 숙고하기도 했음을 본다. 과거로부터 배우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면서 동인처럼 거듭 새로움을 발견하게 되는 작가를 만나는 건 더욱 행복한 일이다.나는 최근에 우리 옛 작가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또 얼마나 새로운 사람들인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문학이든 지식이든 이런 경지를 구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게 된다. 이런 존재들 때문에 뒷 사람은 그것을 발판으로 조금씩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뉴튼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이다. 우리 현대인은 거인의 어깨위에 올라앉은 난장이들이다.

2013-04-04

공부하는 사람을 만나다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필자가 하고 있는 일 가운데 하나는 춘원연구학회라는 학술단체 일을 함께 해나가는 것이다. 이 학회는 이름이 말해주듯이 춘원 이광수와 그의 문학을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본래 대학교에서 정년 퇴직을 한 선생님들이 주축이 되셔서 결성했고, 지금은 윤흥로 선생님께서 회장을 맡고 계시며, 이광수의 장녀인 이정화 교수도 힘을 보태고 있다.춘원연구학회에서는 학술지도 내지만 뉴스레터라고, 소식지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틀이 완전히 잡히지 못해서 여러 가지 보완할 것이 많다. 몇 분들이 모여 뉴스레터를 어떻게 활성화 할 것이냐 하는 고민을 하다가 생각한 것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 중에 학회에 관련된 분들을 인터뷰하자는 의견도 있었다.그 첫 대상으로 거론된 분이 서강대학교를 정년퇴직한 이재선 선생이다. 비교적 근년에 `이광수 문학의 지적 편력`(2010)이라는 저서를 내기도 했고, 또 1936년생으로 학계 원로이시기 때문에 첫 대상으로 손꼽힐 수 있었던 것이겠다.그러나 나는 인터뷰를 전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선생님이 내신 저서를 화제 삼아 이야기를 나누면 되겠고, 또 뉴스레터 지에 실을 수 있는 내용이 원고지 분량 20매를 넘지 못할 것 같으니 한 30분만 인터뷰를 해도 필요한 원고량은 충분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그래서 질문지를 다섯 개쯤 만들어 보내드렸는데, 돌아온 답변이 의외였다. 이미 2,3년전에 출간한 책을 가지고, 그것도 그때 이미 춘원연구학회에서 소개한 적도 있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다시 인터뷰를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었다.말씀은 편하게 하셨지만, 그 행간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뭔가 새로운 이야기도 할 수 있는데, 왜 이미 일단락된 것을 가지고 재론하게 하느냐는 불만 같은 게 담겨 있었다. 그리고 더 들어가 보면 나, 그렇게 한 권 냈다고 만족하고 쉬고 있는 사람 아니라는 자신감 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음도 알 수 있었다.부랴부랴 좀더 현재진행형에 진취적인 질문으로 수정해 보내 드리고 약속 된 날 점심 때 선생님을 뵈러 지도학생 하나를 데리고 나갔다.필자가 준비해 간 첫 번째 질문은 `이광수 문학의 지적 편력`을 내신지 세월이 또 많이 흘렀다, 지금은 어떤 공부를 하고 계시느냐, 하는 것이었다. 애초에 준비했던 질문은 `이광수 문학의 지적 편력`을 통해서 무엇을 밝히려 하셨느냐 하는 것. 그러니 필자로서는 아주 다른 각도에서 질문을 던진 셈이고 또 그만큼 선생님에게 하실 말씀이 준비되어 있어야 할 어려운 질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출생연도로 보면 선생님은 이미 78, 9세의 학계 원로시다. 통상적으로 생각해서 공부가 빠르게 진척되어 갈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연세시다. 그런데 웬일인가. 선생님은 필자의 질문 다섯 개에 A4용지 여섯 장 분량의 메모를 해갖고 나오신 것이었다.지금 `테마틱스`라고 해서 한국소설의 주제학에 관련된 저술을 하고 계신데, 이미 2개월만 있으면 보통 책 분량으로 5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또한 고소설사를 쓰고 계시다고 했다. 예전에 개화기 소설사를 써놓은 게 있으니 여기에 이어 그 이전의 소설들의 역사까지 아울러 정리하시겠다는 것이었다. 우리 소설사를 과거는 모르고 현재만을 아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우리 소설의 전통까지 밝게 살펴야 한다는 뜻이었다.이런 저런 말씀을 듣는데, 나는 문득 이 분과 똑같은 연도에 태어난 김윤식 교수를 떠올렸다. 생각하건대 두 분은 학문의 류가 다른 분들이었다. 이재선 선생님은 영미 비평이론에 아주 조예가 있고, 김윤식 선생님은 일본문학 및 사상사에 밝으시다. 그러나 두 분이 통하는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두 분 모두 시간이 어떻게 흐르든 공부를 놓지 않는 분들이라는 점이다.

2013-03-28

멈춰 선 순간이 아름다운 삶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바로 며칠 전 김연아 선수가 2년만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피겨 세계선수권 대회가 열리던 날, 나는 기차를 타야 했다. 중계시간은 점심이 가까울 무렵이었다. 나는 그때 서울역의 텔레비전 앞에 있었다. 하지만 김연아 선수가 연기를 하려면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다른 외국 선수들이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나는 여유 있게 선수들이 연기를 펼치는 장면들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런데 왠지 갈증이 났다. 선수들의 연기가 하나같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왜일까? 아마도 김연아 선수의 존재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완벽한 연기를 맛본 사람은 그보다 못한 연기에서 감흥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옛날에 그 서양 선수들은 얼마나 멋있었던가? 어렸을 적 흑백 텔레비전 시대가 생각난다. 부친은 고등학교 체육선생님이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럭비를 했고, 태권도와 유도 유단자이기도 했다. 고등학교 선생님이 되서는 하키와 야구를 하는 학교에서 가르쳤고, 나중에는 체육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되기까지 했다. 부친은 스케이트를 선수들처럼 뒷짐을 지고 타는 분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집은 스포츠 중계를 빠뜨리지 않고 보는 집이었다. 그때도 피겨 스케이팅 중계를 해주었다. 서양 선수들은 어찌나 날렵하고 맵시있게 보였는지 모른다.그런데 이제 다 큰 내 눈에 비친 서양 선수들은 아름답지 못하다. 아니, 아름답기는 한데, 어딘지 모르게 2~3%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게 다 김연아 선수 때문인 것이 확실하다.김연아 선수는 아직도 한 30분은 더 있어야 출연한다는 자막이 떠 있었다. 나는 결국 시간을 10여분 이상 남겨놓고 그냥 KTX로 향했다. 요즘 KTX 풍경은 전철 안이나 다를 바 없다. 우리나라는 얼마나 빨리 변하고 있는지 내가 KTX 안에서 와이파이가 된다는 것을 알아차린 때는 남들이 모두 그것을 제각기 즐기고 있는 한참이나 후였었다. 나도 이제 꾀가 생겨 스마트폰으로 김연아 선수의 연기를 감상할 참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스마트 폰 중계 화면이 버퍼링으로 인해 이따금씩 정지해 버리는 것이다. 걱정이 됐다. 김연아 선수가 나오면 이 버퍼링이 얼마나 심해질지 알 수 없었다. 아사다 마오, 그리고 캐나다 선수, 그리고 드디어 김연아 선수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김연아 선수가 나올 차례가 되자 광고 화면부터 버퍼링을 일삼는 것이다. 중계 화면은 한 동작 보여주고 끊어지고, 또 한 동작 보여주고 끊어지기를 지루하게 반복했다.결국 나는 김연아 선수 연기를 기차 안에서 제대로 볼 수 없었음을 고백해야겠다. 대신에 나는 김연아 선수의 정지 동작들이나 감상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런데 이때 느낀 것 하나. 그것은 김연아 선수는 그런 정지된 화면 속에서조차 몸짓이 아름답고, 세련되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김연아 선수의 정지 화면은 연속된 동작 속에 감추어져 있을 법한 단점이나 결점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깨닫게 된 생각 하나. 멈춰 선 순간까지, 절개된 면까지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이라는 사실. 겉으로는 훌륭하고 고상해 보인다. 그런데 연속된 활동을 정지시켜 놓고 정지 화면 속에서 그 사람의 활동을 절개해 보면, 얼굴을 찡그리고, 몸의 균형이 흔들려 비틀거리고, 당황해서 갈피못 잡는 동작들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이것이 진정 무서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나의 연속적인 활동의 어느 한 장면을 잘라내서 너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 그때 나는 이렇소, 하고 김연아 선수처럼 아름다운 몸짓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나? 이것이 우리 삶의 가치를 재는 하나의 물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13-03-21

`무정`과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이광수 장편소설`무정`이 한국에서 근대문학의 중요한 버팀목이 됐다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이 소설을 새롭게 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국문학 연구자로서 내가 가진 가장 큰 불만은 도대체가 이 소설의 새로운 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이 소설에는 잘 알려진 대목이 하나 있다. 이 소설 남자 주인공은 `형식`이라는 경성학교 영어 선생인데, 자기가 가정교사로 있던 김장로 집 딸 `선형`이를 데리고 유학길에 오른다. 그런데 이 기차에는 어렸을 적 `형식`의 정혼녀였던 `영채`가 병욱이라는 여성과 함께 동행하고 있다. 배학감에게 정조를 유린당할 뻔한 죄책감에 `형식`의 곁을 떠나 평양으로 죽으러 갔다 이 여성에게 설득되어 새로운 공부를 하러 유학을 떠난 참이다.일행은 경부선 기차가 삼랑진에 다다랐을 때 수해를 만나게 되고, 수재민들을 돕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겨우 사태가 진정되었을 때 세 사람의 여성 앞에서 `형식`은 배워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이 말에 세 여성은 마치 어미 새가 모이를 가져다 주기를 기다렸다 다투어 작은 입을 내미는 것처럼 화답한다. 교육과 실행으로 조선을 바꿔 놔야 한다는 것이다.바로 그 장면 때문에`무정`은 외국 유학과 신교육을 통해서 조선을 바꾸어 놓자고 주장한 소설로 평가돼왔다. 그것이 `무정`연구사의 대체적인 해석 방향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인직의`혈의누`가 이미 말해놓은 것이 아니던가. 그곳에서도 청일전쟁 평양성 싸움의 와중에서 부모와 헤어지게 된 옥련이가 우여곡절 끝에 미국 유학을 떠나 공부하고 돌아오지 않던가.나는`무정`의 새로움은 유학과 신교육 사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운명 앞에서 고뇌하는 `형식`의 내면 세계를 깊이있게 드러낸 것이라고 보았다. 그것이 이 소설을 명실상부한 근대소설로 만들어 주었다고 본 것이다.앞에서 말한 기찻간 장면에서 형식은 영채가 한 기차에 탄 것을 알고 생각한다. 선형과 영채를 사이에 두고 번민하던 형식은 자신이 사랑도 모르고 현실도 알지 못하는 어린애라고 생각한다. 이 장면을 곱씹으면서 나는 문득 칸트의 짧은 글`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을 떠올렸다. 형식이 말하는 어린애란 칸트가 그 글에서 말한 미성년이 아니더냐. 칸트는 말했다. “계몽이란 우리가 마땅히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년 상태란 무엇이냐. 그것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다. 그러면 미성년 상태를 왜 스스로 책임져야 하느냐. 그것은 미성년 상태의 원인이 지성의 결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도 지성을 사용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를 가지지 못한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몽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자신의 지성을 스스로 발휘해 진리와 빛을 찾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를 알아가는 능동적 과정이며, 자기의식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또 그런 의미에서 계몽이란 선생이 학생을, 제국이 식민지를, 어른이 아이를 가르치는 일방향적, 하향식 주입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알아야 할 것을 터득하는 과정을 의미한다.자, 이렇게 보면`무정`에서 형식은 왜 유학을 가는가? 그것은 서구나 일본 같은 남한테 배우러 가는 게 아니다. 아니, 그들에게 배우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가진 것을 넙죽넙죽 받아먹으려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서 터득하기 위한 것이며, 자기에 대한 자각을 얻기 위해서다.나는 그저께 이 문제를 가지고 논문을 하나 완성했다. 국문학 공부하는 한 사람으로서`무정`같은 작품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수립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기쁨이 결코 작을 수 없는 일요일 밤이었다.

2013-03-14

환대하는 힘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평소에 내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 사람 안색이 별로 편치 않았다. 당연히 왜 그런지 물어볼 수밖에 없다. 그 사람 말이, 학교에서 늘 보는 사람이 있는데, 인사를 해도 아는 척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물었더니, 일이 없지는 않았더라고 한다. 사람을 새로 들이는 일이며, 학사 일정이나 업무 처리에 관해서 상의하는 중에 의견 충돌이 꽤 자주 있었다는 것이다.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사람끼리 만나서 인사도 하지 않게 됐냐고 했더니, 그게 자기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인사도 하고 말도 붙여 보고 해도 영 반응이 없다는 것이다. 며칠 전에는 건물 복도에서 서로 마주쳤는데, 안녕하세요? 하고 큰 소리로 인사를 했건만 아예 쳐다도 안 보고 지나치더라는 것이었다. 그럼 당신이 잘못을 해도 크게 잘못한 게 있는 게 아니냐고 또 물었더니, 대답인즉슨 처음부터 그렇게 뻣뻣하고 매사를 늘 명령조로 처리하는 사람이었는데, 자신이 한두 가지 일에 대해 의견이 다른 것을 내비쳤더니 슬슬 어긋나기 시작한 게 이 지경까지 왔노라고 한다.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 때 그 사태의 원인이 어느 한 쪽에만 있는 경우는 없다. 어느 쪽이 더 잘못하고 있다 해도 그 잘못을 받는 사람이 그것을 잘 받아내서 원만하게 처리하거나 새로운 관계로 이끌어 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안 좋은 일이 두고두고 반복되는 일이 많다.그러나 사람의 일에는 어느 한 쪽이 더 잘못하는 경우가 확실히 많다. 지나가는 사람이 무심코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 경우가 있듯이 한쪽에서는 늘 자기 하던 방식대로 했건만 당하는 사람은 애꿎은 불행을 겪게 되는 일이 많다.그런데 이런 일은 우리는 사회생활을 해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중심에 있는 사람과 주변부에 있는 사람, 윗사람과 아랫사람, 힘 있는 사람과 힘 부족한 사람 사이에서 벌어질 때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듣고 보니, 나도 옛날에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때는 1990년대 초반이었다. 나는 무슨 일인가로 대학원에 동년배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늦게 들어가게 됐는데, 이미 들어가 있는 동기와 후배, 선배들 가운데 유달리 초심자를 박대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후배가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사실은 대학 학부 생활을 할 때 같은 하숙집에서 한솥밥을 먹기도 한 사람이었다.그런데 만나도 아는 척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대학원에 먼저 들어와 공부를 하고 있었고, 나는 늦게 들어온 게 죄라면 죄인 건지? 그러나 세상에 그런 죄는 없다. 나는 내가 그에게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게 없는지 곰곰 따져 보았는데, 그런 일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또 무심결에 저지른 어떤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나는 자그마치 1년을 두고 이 일을 고민했다.사람이 이유도 모르면서 다른 이에게 그런 냉대를 받는 일은 도무지 견디기 힘든 것이고, 또 그것이 자신이 별로 좋지 않은 상황에 놓여 있다고 생각할 때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자꾸 움츠러들 수 밖에 없다. 고민 끝에 나는 국어학 공부를 하는 여자 동기생에게 이 일을 대체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친구 대답이 걸작이다. “뭘 그걸 고민해? 너도 똑같이 해줘.”그로부터 세월이 많이 흘렀다. 그동안 세상을 살아오면서 느끼는 것 하나. 사람은 자기를 환대해 주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고 또 그 사람을 위해서 마음을 쓰게 된다는 사실이다. 세상이 많이 변했는데도 언제나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가 보다. 그러나 세상은 역시 그렇게 차가운 사람들이 아니라 남을 환대해 주는 따뜻한 사람들이 만들어 간다.

2013-03-07

새 시대, 어떤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하나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소설이라는 말은 그 쓰임이 아주 오래되었다. 옛날 중국에서부터 쓴 말이다. 그때 소설이라는 말은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는 역사적인 서술 가운데 믿을만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말한다. 제왕이나 영웅들의 이야기는 정사 속에 들어가는데 반해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긴요치 못한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을 써놓은 것이 소설이다.다른 하나는 사상 가운데 중요치 못한 것들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다. 중국은 풍요로운 사상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유가니, 도가니, 법가니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그런 사상의 계보 가운데 소설가라는 게 있다. 이것은 말하자면 어엿하지 못한 사상이다. 그럴 듯한 체계도 없고 힘써 의지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런 사상가가 바로 소설가다.그러니까 고대 중국에서 소설이니 소설가니 하는 말은 다 하급의, 중요치도 않고 믿을만하지도 않은 역사적 기술이나 사상을 가리키는 뜻을 갖고 있었다.그런데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소설은 그 나름의 존재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나는 그것이 일종의 문화의 숨통이었다고 생각한다.잘 짜여진 역사적 기술의 방법과 체계, 또 잘 구비된 사상적 체계들에 들어가지 못하는 모든 것이 다 소설이 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소설은 일정한 형식을 주장하지도 않고 특정한 내용을 지칭하는 것도 아니었다. 체계 바깥에 잉여물로 존재하는 게 바로 소설이었고, 바로 그 잉여적인 성격 때문에 소설은 세월을 두고 이어져 오늘에 와 닿을 수 있었다.나는 우리 문화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우리 문화는 마치 소설과 같이 어떤 특정한 체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은 것들, 잉여적인 것들에 고루 역할과 의미를 부여해 주어야 한다.사실, 문화라는 말의 용례가 어떻게 보면 소설의 용례와 비슷하다. 문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삶의 양식이다. 그런데 이 삶의 양식은 정치니, 경제니, 사회니 하는 것들로 나뉜다. 법률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들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문화는 그 모든 것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그것들에 포괄되지 못하고 남게 되는 그 모든 것이다.그래서 문화는 아주 고급한 것도 있을 수 있지만, 아주 저급한 것도 문화가 될 수 있다. 또 균형과 질서, 통일을 이룬 것은 응당 문화가 되지만, 찌그러지고 혼란되고 어수선한 것도 문화의 일부가 될 수 있다.그런데 우리들 삶의 본질은 잘 만든 문살처럼 규격을 가진 데 있지 않다. 우리들의 마음 세계를 보라. 과연 조화로운가? 우리들의 몸을 보라. 과연 고요하기만 한가? 우리들 사회를 이루는 사람들의 삶은 고전주의적 질서를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것에 합류될 수 없는 잉여물들을 가진다.나는 이 잉여물을 잘 다룰 줄 아는 문화가 진짜 좋은 문화라고 생각한다. 잉여에 관대한 문화, 잉여를 허용하는 문화, 잉여 때문에 더 재미있게 살 수 있게 되는 문화가 좋은 문화인 것이다.소설이 교훈적이기만 하다면 왜 사람들이 그것을 읽게 될까? 소설엔 사랑이 있고 욕망이 있고 혼란과 비밀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손을 탄다. 문화도 마찬가지다. 만약 어떤 문화가 스파르타식 체계만을 고집한다면 그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질식될 수밖에 없다.옛날에 나는 어떤 소설이어야만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지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각각의 소설가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그러나 그 안에 자기 세계를 철저하게 쌓아올린 소설이라면, 다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떤 소설을 좋아한다면 다른 사람은 다른 소설을 좋아할 수도 있어야 한다.관용과 허용, 그리고 자유. 새 시대 문화는 이런 덕목들을 구비해야 한다.

2013-02-28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사람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며칠 전에 나는 선배와 함께 어떤 회의를 하기 위해 대전에 갔다. 대전은 내 고향이지만, 그 날은 이 선배가 대전에 있는 대학에 재직하고 있기에 그곳에서 회의를 하기 위해 간 것이었다. 그날 회의 시간이 바뀐 이유도 있지만 밤새 회의 준비를 해 놓은 것을 깜박 잊고 나오는 바람에 집으로 되돌아갔다가 서울역으로 가느라 예정시간보다 한 시간 늦었다. 이 시간이 내게는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선배가 늦은 나를 보고 크게 꾸짖을 것 같지 않은 분이었기 때문이다. 이 선배는 나와 어떤 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고, 그 후 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 시간은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데 충분한 시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 시간이 결코 짧지 않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이 선배와 나는 지금도 그렇게 가깝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동안 우리는 어쩌면 그 이전에 비해 훨씬 더 가까운 사이가 됐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나는 마음이 급한 나머지 KTX 안에서도 숨을 헐떡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겨우 대전역에 당도해서 뛰듯이 택시를 타고 선배가 계신 대학교로 갔다. 그곳은 역에서 2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었다. 선배는 택시를 타고 내린 내 전화를 받고 회의실이 준비돼 있는 곳으로 나를 안내해 주었다. 늦은 것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없었다.추운 회의실 같은 곳에서 회의를 하다 보니 어느새 난방이 들어왔는지 실내가 따뜻해졌다. 나는 회의 준비도 충분히 하지 못한 것 같았는데, 선배의 가르침대로 문제를 만들고 고치고 하다 보니 뜻밖에 수월하게 일이 풀리는 것 같았다.회의 시간도 길었지만 저녁식사 시간은 더 길었다. 나는 선배의 안내로 대학에서 그리 멀지 않은 포항 물회집으로 갔다. 포항 물회집은 포항에 있는 곳이라야 제맛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곳 포항 물회집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선배는 물회가 맛을 제대로 내려면 무 대신에 배를 썰어 넣어야 한다고 했다. 그 집은 선배가 미리 칭찬한 대로 맛집 중 맛집이었다. 물회에 충청도 대전 소주`린`을 맛나게 걸치고는 물곰탕을 더 시켜 먹었다. 물곰탕도 동해안 속초나 포항 같은 곳이라야 맛이 좋은 법인데, 이 집은 물곰탕 끓이는 솜씨도 만만치 않았다.어느새 소주가 세 병. 조금 있으니 대전의 다른 대학에 다니는 후배가 합류했다. 이 후배와 나는 최근에 서로 편치 않은 문제를 처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으나, 내게 아무런 불편한 내색도 보이지 않았다. 내 고향 친구까지 포함해 일행은 넷이 됐다. 네 사람은 당구를 치러 갔다. 진 팀이 당구비도 내고, 2차 술값도 내기로 했다. 나와 고향 친구가 한 팀이 되고, 나의 선배와 후배가 다른 한 팀이 되었다. 우리 팀은 400을 놓고, 저쪽 팀은 350을 놓았다. 이 점수는 당구를 쳐 본 사람이어야 어떤 점수인지 안다. 누가 이겼을까. 물론 우리 팀이 이겼다. 왜냐. 내 고향 친구는 나와 당구를 쳐서 한 번도 `물려`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당구가 `짠` 인물이기 때문이다. 저쪽 팀에서 당구비를 냈지만, 처음 약속과 달리 2차 술값은 내가 냈다. 선배의 마음이 내내 고마웠던 때문이라고나 할까.사람은 살아가면서 서로 대립적인 위치에 서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지금껏 그와 같은 상황에 직면해야 할 때가 많았다. 어느 때는 같은 시험을 보면서 누구는 떨어지고 누구는 붙어야 하는 경쟁을 해야 했다. 어느 때는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두 사람, 또는 세 사람이 운명적인 위치에 함께 서 있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이런 악연을 악연 그대로 남겨두지 않고 새로운 관계로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은 결국 사람의 마음이다. 나는 그날을 함께 보낸 선배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내가 그분을 이해하려고 하는 만큼 그 분 또한 나를 내내 이해해 주려고 노력해 왔음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2013-02-21

오래된 가르침

▲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신정을 멀리하고 음력설을 지키는 나다. 그래서인지 설이 되면 인생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때이기 때문이다. 설은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느낌이 난다. 어렸을 때 공주 봉황동 산동네에서 갖가지 명절놀이를 즐기던 기쁨은 사라졌다. 하지만 차츰 나이가 들어 인생의 곡절이 많아질수록 설은 가슴에 와 닿는 세시풍습이 된다. 집에 가면 연로하신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다. 옛날에는 집에 가도 부모님 아랑곳하지 않고 고등학교 동창들과 어울려 밤늦게까지 놀았다. 언젠가부터 그렇게 되지 않는다. 나가면 친구들과 점심이나 하고, 차나 한 잔 하고 들어와 일을 돕거나 부모님 옆에 앉아 있게 된다. 올해는 아버지가 좀처럼 입에 올리시지 않던 학창시절 이야기를 하셨다. 아버지 인생 중엔 내가 모르는 `비밀`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수학과정이었다. 어떻게 공부하게 되었는지, 그것이 늘 불분명했다. 소학교에 들어가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인천공고에 들어갔고, 거기서 공부도 하고 럭비도 해서 서울사대 체육과에 들어가신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국민학교 졸업 후에 어떻게 고등학교까지 갔나? 아버지는 이 대목을 늘 인천으로 가출하다시피 해서 공부를 했노라 하셨다. 충남 서산에서 인천은 뱃길로 왕래하는 곳이어서 그곳으로 갔다는 말씀이었는데 그 과정이 늘 불분명한 채로 남아 있었던 것인데, 이번에 그것을 알게 된 것이다.거실 한 쪽에는 아버지가 써놓으신, 일본어 시구 같은 것에 한글 번역까지 함께 해 놓은 A4 용지 몇 장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여쭈어 보니, 누군가 일본 여행 갔다 온 분이 레코드를 한 장 선물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듣고 그 뜻을 알고 싶어 하셔서 번역을 해주신 것이라 한다. 아버지는 옛날에 국민학교 마치고 진학할 수 없게 되자 물지게를 지고 농사일을 도우면서도 혼자 일본어책을 읽으며 공부를 하셨다고 했다.집 한쪽 벽에는 어머니가 옛 분답게 펜으로 세로쓰기로 써놓으신 문장이 있다. 어머니는 이렇게 쓰셨다. `福은 검소함에서 生기며 /德은 겸양에서 생기며 /道는 安定에서 생기며 /命은 화창에서 생기느니라 /재앙은 물욕에서 생기며 /허물은 경망에서 생기고 /罪는 참지 못하는 데서 생기느니라.``법요집`에 들어 있는 문장이다.어머니가 종이로 써서 붙여놓으신 이 문장은 벌써 이십 년쯤 그곳에 그대로 붙어 있었을 것이다. 종이가 누렇게 변색이 되고, 네 모서리가 모두 들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 그것을 처음 보는 듯 새로운 눈으로 글귀 하나 하나를 내게 비춰 보며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다.나는 검소하지 않았다. 학창시절부터 없이 사는 것이 습관이 돼, 있으면 쓰는 생활을 이어왔다. 나는 겸양에서 들쑥날쑥했다. 어떤 때는 나 자신을 한 없이 낮게 생각하고, 어떤 때는 내가 잘난 곳이 있으려니 했다. 내 삶은 결코 안정되지 못했다. 어느 노사가 지어주신 내 호는 운형(雲兄), 그것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내 습성을 정확히 갈파한 이름이었다. 성품에서 화창하지도 못했다. 내 타고난 명랑함은 반대편의 우울에 침습을 받는다. 조울증의 기운이 없지 않다. 나는 물욕과 경망함과 참지 못함을 가진, 사람의 아들, 남의 성스러움을 부러워하지만 내 자신은 결코 그렇지 못한 사람이었다. 오래 전에 붙어 있던 글귀를 통해,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반추해 보려 애썼다. 생활이 심안을 흐리게 만들어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잘 알 수 없게 했음을 비로소 또렷이 알 수 있었다.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내가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지,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래서 설이 좋다. 돌이켜 보면 뜻 모르고 놀던 옛날 옛적 일들이 아스라이 멀다. 옛날 가르침이 이렇게 비 온 후 앞산처럼 선득 다가오다니. 이제 다음에 올 설은 또 얼마나 새로울 것이냐.

2013-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