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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 선 순간이 아름다운 삶

등록일 2013-03-21 00:02 게재일 2013-03-21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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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바로 며칠 전 김연아 선수가 2년만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피겨 세계선수권 대회가 열리던 날, 나는 기차를 타야 했다. 중계시간은 점심이 가까울 무렵이었다. 나는 그때 서울역의 텔레비전 앞에 있었다. 하지만 김연아 선수가 연기를 하려면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텔레비전에서는 다른 외국 선수들이 연기를 펼치고 있었다. 나는 여유 있게 선수들이 연기를 펼치는 장면들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런데 왠지 갈증이 났다. 선수들의 연기가 하나같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왜일까? 아마도 김연아 선수의 존재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완벽한 연기를 맛본 사람은 그보다 못한 연기에서 감흥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옛날에 그 서양 선수들은 얼마나 멋있었던가? 어렸을 적 흑백 텔레비전 시대가 생각난다. 부친은 고등학교 체육선생님이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럭비를 했고, 태권도와 유도 유단자이기도 했다. 고등학교 선생님이 되서는 하키와 야구를 하는 학교에서 가르쳤고, 나중에는 체육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되기까지 했다. 부친은 스케이트를 선수들처럼 뒷짐을 지고 타는 분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집은 스포츠 중계를 빠뜨리지 않고 보는 집이었다. 그때도 피겨 스케이팅 중계를 해주었다. 서양 선수들은 어찌나 날렵하고 맵시있게 보였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제 다 큰 내 눈에 비친 서양 선수들은 아름답지 못하다. 아니, 아름답기는 한데, 어딘지 모르게 2~3% 부족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게 다 김연아 선수 때문인 것이 확실하다.

김연아 선수는 아직도 한 30분은 더 있어야 출연한다는 자막이 떠 있었다. 나는 결국 시간을 10여분 이상 남겨놓고 그냥 KTX로 향했다. 요즘 KTX 풍경은 전철 안이나 다를 바 없다. 우리나라는 얼마나 빨리 변하고 있는지 내가 KTX 안에서 와이파이가 된다는 것을 알아차린 때는 남들이 모두 그것을 제각기 즐기고 있는 한참이나 후였었다. 나도 이제 꾀가 생겨 스마트폰으로 김연아 선수의 연기를 감상할 참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스마트 폰 중계 화면이 버퍼링으로 인해 이따금씩 정지해 버리는 것이다. 걱정이 됐다. 김연아 선수가 나오면 이 버퍼링이 얼마나 심해질지 알 수 없었다. 아사다 마오, 그리고 캐나다 선수, 그리고 드디어 김연아 선수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김연아 선수가 나올 차례가 되자 광고 화면부터 버퍼링을 일삼는 것이다. 중계 화면은 한 동작 보여주고 끊어지고, 또 한 동작 보여주고 끊어지기를 지루하게 반복했다.

결국 나는 김연아 선수 연기를 기차 안에서 제대로 볼 수 없었음을 고백해야겠다. 대신에 나는 김연아 선수의 정지 동작들이나 감상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런데 이때 느낀 것 하나. 그것은 김연아 선수는 그런 정지된 화면 속에서조차 몸짓이 아름답고, 세련되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김연아 선수의 정지 화면은 연속된 동작 속에 감추어져 있을 법한 단점이나 결점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깨닫게 된 생각 하나. 멈춰 선 순간까지, 절개된 면까지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이라는 사실. 겉으로는 훌륭하고 고상해 보인다. 그런데 연속된 활동을 정지시켜 놓고 정지 화면 속에서 그 사람의 활동을 절개해 보면, 얼굴을 찡그리고, 몸의 균형이 흔들려 비틀거리고, 당황해서 갈피못 잡는 동작들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진정 무서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나의 연속적인 활동의 어느 한 장면을 잘라내서 너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 그때 나는 이렇소, 하고 김연아 선수처럼 아름다운 몸짓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나? 이것이 우리 삶의 가치를 재는 하나의 물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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