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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밤바다

등록일 2013-05-16 00:45 게재일 2013-05-16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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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여수는 여수를 불러일으킨다. 막상 그 머나먼 남쪽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자 맘이 편치 않았다. 이상문학의 삶과 죽음이라는 걸 쓰고, 곧바로 일제말기 김동리 문학의 의미로 나아가야 했다. 그러고도 백석과 러디어드 키플링의 관계를 다루는 일이 남아 있다. 3월, 4월부터 내 마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논문을 쓰는 일은 일종의 진입공포증을 불러일으킨다. 논문 쓰는 일은 일종의 노동이다. 정신적, 육체적 노역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당장 쓰고 있지 않을 때도 늘 심리적 부담을 머리 위에 이고 다니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 과연 여수까지 훌쩍 떠날 수 있을까?

그러나 가야 했다. 여수에서 나는 소설`담징`을 주제로 한 북콘서트에 참석해야 했다. 나는 이 책에 임권택 감독과 함께 표사를 썼는데, 그 덕분에 이 책을 주제로 한 콘서트에 함께 초정을 받은 것이다.

`담징`은 일본에 국사로 건너가 나라 호류사에 벽화를 그린 고구려 승려 담징의 생애를 그린 것이다. 김민환이라는 분이 작가인데, 오래전부터 임권택 감독과 시나리오 작업을 해왔다고 했다. 문장이 간결하고 승려 담징의 내면세계에 대한 묘사가 풍부하며, 당대 일본 사회를 흥미롭게 재현해 놓은 소설이다.

나는 먼저 용산 역으로 가서 예약해 놓은 KTX를 타고 서대전역까지 갔다. 좌석표를 여기까지밖에 예약하지 못해 여기서 여수까지는 역에서 직접 구입한 좌석으로 옮겨야 했다. 용산 역에서 출발하는 호남선, 전라선 KTX들은 전라북도 익산까지는 18량으로 가다가 거기서 두 쪽을 내서 하나는 목포를 향해, 다른 하나는 여수를 향해 간다.

여수는 멀구나. 저절로 이런 생각이 드는데, 익산부터는 정차하는 역도 늘어나는 것 같다. 기차는 순천을 지나 마침내 여수다. 여수의 기차역명은 아예 여수엑스포역이다. 나는 이런 방식의 역명은 처음 보았다. 당연히 여수 엑스포를 기념해 지은 역명일 것이다. 개찰구를 빠져 나오자 엑스포 건물들이 바로 눈앞에 보인다. 행사를 앞두고 새로 조성된 공간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지리를 전혀 모르는 나는 일단 택시 정류장에 가서 행사장 위치를 묻고 택시를 탄다. 도시 한쪽 끝에서 다른 한쪽 끝으로 가야하지만 거리가 얼마나 되랴 싶다. 하지만 도시는 길다. 긴 터널이 뚫린 외곽도로를 타고 달리는 택시비는 찰칵찰칵 잘도 올라간다.

앗, 바다다. 터널을 지나 도시 안으로 택시가 진입하자 바다가 보인다. 그와 함께 그림 같은 섬들이 눈에 들어온다. 연안 도시가 이렇게 호수처럼 아름다운 곳이 일찍이 없었던 것 같다. 오랜 시간 발전이 더뎌 공장이 없고, 한적한 동네로 남아있는 동안 자연은 그대로 여수의 것이 된 듯 했다.

행사 마치고 숙소에 올라가 보니 10층, 다시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밤이 되자 나는 임권택 감독 부부, 김민환 작가와 함께 `꽃마루`라는, 꽃차를 파는 곳으로 갔다. 2층 창밖으로 바다는 이미 캄캄하다. “여수 밤바다~” 하는 `버스커버스커`의 노래가 떠오른다. 꽃차는 홍화꽃차, 동백꽃차, 목련꽃차, 도화꽃차, 박태기꽃차…. 동백꽃차는 동백꽃만으론 맛이 부족해서 보리순을 함께 넣어 우려낸다고 했다. 꽃차를 차례로 마셔보고, 임권택 감독을 그토록 귀하게 여기는 이곳 사람들의 사인공세를 보고, 오디막걸리를 마시고, 차배순 교수, 박선희 교수 같은 사람들과 웃음꽃을 피우고 숙소로 돌아온다.

밤 열두 시. 1006호 숙소에는 나 혼자다. 나는 커튼을 열고 캄캄한 여수 밤바다를 내려다본다. 비록 윤선도의 보길도는 여기서 다시 멀지만 나는 벌써 어지간히 멀리 와 있다. 속세로부터. 이 해가 다가기 전에 김민환 작가가 살고 있다는 보길도에나 가야겠다. 삶이 이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해서야 어떻게 사나. 인공에서 떠나 자연에 한 발자국이라도 더 들어가야 할 때다. 여수 밤바다가 내게 더 들어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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