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왔다.
지난 한 주 춘한이 심하더니 드디어 봄은 한기를 밀어냈다.
월요일까지만 해도 어떻게 흐를지 불분명해 보이던 일기가 이제 완연히 따뜻한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오늘 학교에 오르다 진달래꽃이 교정에 피어난 것을 보았다. 남쪽에서는 꽃이 벌써 피어 흐드러졌겠지만 이제서야 활짝 피어난 꽃이 반가웠다.
점심을 먹으러 함바집으로 혼자 걸어갔다. 이런 날은 호젓한 기분으로 30년 전에도 있던 허름한 간이식당에 가 밥을 먹는 게 좋다.
올라가며 보니 또 진달래꽃이 피어 있다. 응달에 자리잡은 진달래꽃은 꽃이 전부 햇빛 받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
식당으로 가면서 내가 생각해 낸 이야기 하나를 오랜만에 새로 떠올렸다.
내가 자주가는 출판사 마당에 아름다운 장미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 꽃송이 빛깔이 심히 아름답다. 과연 이 장미나무엔 꽃송이가 몇이나 열려 있어야 가장 아름답게 보일까.
우리집 화병에는 벌써 몇 년째 꽃이 없다. 이 화병에는 장미꽃을 몇 송이를 꽂아 놓아야 가장 아름다울까.
어느 조용한 양옥집 어느 방 침대위에 장미꽃 한송이가 떨어져 있다. 꽃잎은 몇 잎이나 꽃송이에서 떨어져 나와 있어야 가장 아름다울까.
오늘 언덕을 올라가면서 비탈에 핀 진달래들을 보니 어느 것은 나이도 들고 또는 원래 타고나기를 그래서 가지도 많고 꽃도 수북이 피었다. 어느 것은 몇 점 애처롭게 피어 있다.
같은 진달래꽃이언만 그 아름다움이 같지 않았으니 흐드러진 쪽보다 겨우 몇 송이 피워올린 쪽이 훨씬 더 심미적인 기쁨을 주었다.
삶이라는 것도 심미적인 차원에서 보면 그와 다르지 않을 듯하다.
돈은 얼마나 가지고 있어야 가장 아름다울까. 지위는 얼마나 높아야 가장 아름다울까. 명예는 얼마나 있어야 가장 아름다울까.
이런 심미적 깊이는 많고 큰 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서 문제가 간단치 않다.
나는 모든 것이 적절할 때 아름다울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주 적어도, 작아도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무 비탈에 응달진 곳에 간신히 몇 점 피어난 꽃들은 그 처절함 때문에 더욱 아름답다.
그와 마찬가지로 생활에서도 작고 적게 가진 사람들은 감동을 준다. 그런 사람들은 존재 자체가 하나의 경이이고 그럼에도 생명을 지속해 가고 있음에 경탄할 만하다.
오늘 저녁, 연구실에 앉아 있는데 한 학생이 찾아왔다. 벌써 오래 전에 졸업한 학생이다.
성은 기억이 났지만 이름까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대학원 공부를 하고 싶노라고 했다. 오래 전에 학부를 졸업해서 나이가 벌써 서른 살이 넘는다.
나는 중도에 그만둘 공부라면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오랫동안 생각해 왔고 하다 말 생각은 하지 않겠노라고 한다.
학생은 잠시 후 돌아갔다. 늦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하는 아주 작은 희망만을 품고 오래전에 다니던 학교를 다시 찾은 학생을 생각하며 희망도 역시 크지 않아도, 많지 않아도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인생에 희망이, 또 다른 많은 것들이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있으랴. 그래서 부족하고 때로는 빈핍한 것이 정상이다. 이 정상의 아름다움을 인정하고 돌볼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