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는 김동인의 소설을 읽고 있다. 동인문학상의 주인공인 그 김동인이다. 김동인은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여자 알기를 우습게 여겼다. 요즘 같으면 글 쓰는 사람 행세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김일엽이나 김명순 같은 초창기 여성작가들을 글에 써 놓은 걸 보면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산문에 써놓은 것과 소설에 써놓은 건 다르다. `눈을 겨우 뜰 때`에 나오는 보패 같은 여자, `대탕지 아줌마`에 나오는 다부꼬라는 여급에 대한 묘사, `감자`에 나오는 복녀 같은 여자 인물들에 대한 묘사를 보다 보면 김동인은 여성들의 삶을 냉정하게 측정하고 평가하면서도 그이들의 삶의 불행을 깊이 동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근 들어 나는 김동인 문학에 눈을 새로 뜨는 연습을 하고 있다. 보면 볼수록 김동인 같은 작가가 없었으면 우리 문학이 또 얼마나 빈곤했을까 생각한다. 이광수를 생각할 때 그 복잡다단한 인생과 문학에 연민을 품게 되듯, 한국전쟁기를 못 넘기고 세상을 떠난 이 천재 기질의 작가를 안타까워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국현대문학의 불행은 실로 한국전쟁기에 숱한 좋은 작가들을 분단으로 혹은 죽음으로 잃어버렸다는 사실에 있다. 김동인 문학의 좋은 특질이 어디에 있나. 나는 최근에`광염소나타`나 `광화사`같은 작품을 새로 읽으며 그가 문학의 보편성이라는 문제를 얼마나 깊이 고민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앞의 작품이 어느 천재 작곡가의 기행을 다룬 것임은 잘 알려져 있다. 또 뒤의 작품도 솔거라는 빼어난 화공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솔거라면 신라시대 얘기겠군. 하지만 아니다. 동인은 이렇게 썼다. 이름은 신라시대 화공 이름에서 빌려오고, 시대는 조선시대라 해두자. `광염소나타`도 이야기가 시작되면 이 얘기는 조선이라 해도 좋고, 일본이라도 좋고, 서양 어디라도 좋다고 한다. 시대도 어디라 해도 좋고 공간도 어디라 해도 좋다는 것은 그가 보편성이라는 문제를 얼마나 대담하게, 진취적으로 풀어나가려 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사실 지난 수십년간 우리는 동인의 존재를 잊고 동인문학상은 주면서도 그의 논지를 넓게 받아들이고 경청하려는 노력은 소홀히 해왔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수백년전 괴테의 논리를 답습하면서 동인식 보편성의 함의에 큰 주의를 기울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이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인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필요한 때이며, 이때 자기 것, 자기 전통, 자기 지역의 것이 보편성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새로운 방식의 보편성을 구축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할 때다.
나는 최근 작가들의 소설을 읽으며 이 작가들 대부분은 자기 전통을 말하면서도 정작 천착은 부족하고, 다른 소수의 작가들은 보편성에 대한 욕구 때문에 자기것을 차라리 버려야 할 것처럼 생각한다. 나는 동인이 그런 보편성을 실천에 옮기면서도 결국은 한국문학의 역사와 전통을 깊이 숙고하기도 했음을 본다. 과거로부터 배우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면서 동인처럼 거듭 새로움을 발견하게 되는 작가를 만나는 건 더욱 행복한 일이다.
나는 최근에 우리 옛 작가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또 얼마나 새로운 사람들인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문학이든 지식이든 이런 경지를 구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하게 된다. 이런 존재들 때문에 뒷 사람은 그것을 발판으로 조금씩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뉴튼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이다. 우리 현대인은 거인의 어깨위에 올라앉은 난장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