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각에서 `자전적 소설의 제 문제와 이광수 장편소설 세조대왕`이라는 발표를 한 날이다. 또 늦었군, 하는 한탄을 하며 롯데호텔 37층까지 택시 안에서도 뛰듯이 달려갔다. 고려대학교에서 이번 여름을 끝으로 정년퇴직을 하시는 선생님께 제자들이 기념문집을 만들어드리는 날이다. 이 책은 여러 시인들, 비평가들이 자신의 시를 싣거나, 그 선생님의 시에 관한 글을 싣거나 한 것이다. 나는 이 책에 `반구대 향유고래의 사랑노래`라는 시에 관해 썼다.
이런 행사를 정년퇴임 기념행사라고 하고, 제자들이 돈을 모아 치르게 되는데, 여러가지 이유로 국문학계에서는 급속도로 사라져가는 중이다.
무엇보다 당사자들이 이런 행사를 무척 부담스러워 한다. 제자들이 경제적, 심리적 부담을 짊어지는 게 싫을 뿐만 아니라, 이것으로 끝임을 드러내는 것도 싫다. 떠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싫은 것이다. 논리도 있다. 떠나는 사람이 소리소문 없이, 홀연히 사라져 주는 것이 옳지 끝까지 번거로운 행사까지 하며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 하는 것이 옳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선생님 제자들은 유별나서 굳이 봉정식을 마련하고 한 자리에 모였다.
빈 자리를 찾아들어 겨우 앉으니 좌중이 모두 조용하다. 홀 중앙에 설치된 스크린에 이 선생님이 걸어오신 지난 날들의 흔적이 슬라이드로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들이 몽타주 식으로 흘러가는 동안 다들 숨을 죽이고 이 분과의 인연을 되새기는 듯했다. 나 또한 이 선생님과 교분을 맺어온 지난 십 수년의 일들을 떠올리며 마음이 숙연해졌다.
슬라이드가 끝나자 다들 박수를 쳤다. 고려대 총장을 지낸 홍일식 교수를 비롯한 두어 분이 축사를 하고 정일근 시인이 축시를 낭송하고 제자들이 편집한 책을 드리고, 마침내 이 분이 인사를 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
이 선생님의 말씀은 주어진 시간이 5분이라 해서 그런지 길지 않았다. 그동안 함께 해온 사람들에게 두루 감사의 인사를 하고 나니 지나간 날들을 회상할 말들이 길지 않다. 뿐만 아니라 선생님은 잔뜩 긴장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적당한 말씀을 찾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나 어찌 됐든 무사히 다 치러내셨다. 나는 전날밤을 발표준비로 꼬박 새우다시피 한 까닭에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앉아 있는 것도 몹시 힘들었다. 박수도 제때 쳐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내 머리속에는 장려하게 끝내는 법이라는 말이 맴돌았다.
마침 내가 그날 발표한 논문의 주인공인 세조는 재위 14년만에 장려한 죽음을 맞고 있었다. 이광수의 `세조대왕`은 세조의 말년 3년을 그린 것이고, 마지막 장에 이르러 세조는 마침내 야망과 살육과 죄의식으로 점철된 인생의 고뇌에서 벗어나 삶을 마감한다. 논문을 쓰면서 나는 이광수가 세조의 최후를 쓸쓸하면서도 장엄하게 그려냈다고 생각했다.
원탁 테이블에 연세 지긋하신 선생님들 사이에 앉아서 나는 끝을 잘 맺는 것도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냥 홀연히 사라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어느 자리에 등장한 사람이 퇴장까지의 시간들을 묵묵히 감당해내고 끝을 알리는 자리까지 지켜내고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무대를 내려가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어떤 일이고 제대로 잘 갖추어 끝내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퇴임식도, 졸업식도, 장례식도 그래서 중요하다.
모처럼 제대로 갖추어진 퇴임기념식이었다. 나는 이 어려운 자리를 마련한 제자들과 끌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준 선생님 모두가 `장해` 보였다. 나는 이렇게 갖출 것을 갖추어 끝내는 일이 우리 사회에서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는 이 끝이 두려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