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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신뢰의 위기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모 작가 선배와 서울에서 오랜만에 자리를 같이 했다. 작가며 평론가는 본래부터 말이며 글로나 먹고 사는 실없는 존재들이다. 그게 글쟁이들의 슬픈 운명이다. 그 날도 평론가 격의 나와 작가 격인 모 선배는 세상 일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갑론을박했다.때마침, 그 무인기의 정체에 관한 국방부 발표가 있었다. 북한에서 보낸 게 확실하다는 것이다. 뉴스를 접하고는 우리는 세상에서 듣고 본 이야기를 나눈다. 장난감이라느니, 진짜라느니, 말들이 많았다.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데 판단이 같지 않다. 한 사람이 더 끼어드니 이제는 바야흐로 삼파전이 된다.요즘 우리 사회 모든 일을 놓고 서울은 이렇다. 왜 하필 서울이냐 하면, 다른 곳들은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생각들이 겉으로 대립하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그게 더 위험할 수도 있다. 큰 위험은 예고가 없다.세월호 사태를 놓고도 양상은 똑같다. 정부 발표나 해경 발표를 턱 믿고 싶어도 사태 첫날부터 몇 날 몇 일 동안 보고 들은 것하고는 너무 다르다. 공영방송이며 공중파 방송이며 각각의 신문들을 다 올려 놓고 봐도 이미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이 있어 곧이곧대로 들어오지 않는다.뿐만 아니다. 겉보기에는 몇몇 주요 신문, 방송밖에 없는 것 같아도, 유튜브니 뭐니에서 키워드만 넣어 보면 제각기 각도와 해석을 달리하는 자료들이 하나둘 아니다. 그런 것들이 조회수가 많게는 수십만 회까지도 된다.사람들은 눈 바보, 귀 바보가 아니다.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하는 사람들은 나이 많으신 어른들이요, 세상 풍파 많이 겪어 이러니 저러니 해야 소용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다. 세상에는 생각 다른 사람, 기질 다른 사람이 하나둘 아니다. 갖가지 사람들이 모여 이 사회라는 것을 이루어 나간다.생각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다. 관점이 다른 것도, 누가 옳다고,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게 남의 것인 한 쉽사리 관여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어떻게 이 사회를 함께 만들어 갈 수 있나?나는 그것이 기본적인 신뢰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해석이나 관점은 달라도 기본적인 정보만은 함께 나눠야 한다. 이도 아주 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사실, 진실에 가능한 한 가까운 정보가 가급적 많은 사람들에 의해 공유되어야 한다. 이 기본적인 요건이 그럴듯하게라도 갖추어진 후에야 갑론도 의미 있고 을박도 의미 있다.우리는 너무 오래 불투명하고 베일에 가려 있고 또 일방적인 설명들뿐인 일들을 접해 왔다. 사태의 시말이 어떠한지,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도를 닦아야 하겠느니 한다. 일이 터질 때마다 무서운 세상이었느니 한다. 다들 믿을 건 부모 자식뿐이라고, 몸 단속, 입 단속 하느라 바쁘다. 빤히 앞에 앉았는 사람, 꽤나 간담상조하느니 하던 친구 사이도 정말 믿을 수 있나, 한다.정부가 국민을 믿지 못해 유언비어 엄단을 말하고, 국민이 정부를 못 믿어`음성` 매체를 찾는다. 유족이 정부를 믿을 수 없어 항의방문을 하고, 정부가 유족을 못 믿어 순수 운운 한다.이쪽이 저쪽을, 저쪽이 이쪽을 못 믿는 풍조가 사회 깊이 뿌리를 내렸다. 서로 믿을 수 없는 데서 오는 고통과 아픔이 간단치가, 만만치가 않다. 가히 우리 모두의 불행이라 할 만하다.우리는 사회 공동의 구성원들이다. 이런 우리가 이토록 서로를 믿을 수 없다는 느낌에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는 모두 패배자요, 허무한 생애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치도, 선거도, 갈등도, 불행도, 슬픔도, 다 공동의 인식이 있고서야 의미가 있지 않을까. 어느 쪽이 이겼다 졌다 하기 전에 우리 모두 잃어버린 신뢰를 찾아 나서야 한다.기본적인 사실, 진실의 공유. 이것부터 시급히 준비해야 한다. 그러면 이것은 누가 먼저 나서야 하는 일인가?

2014-05-15

이 슬픔과 죄를 함께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과이 사태 속에서 기성세대치고 죄인 아닌 이들이 있을 수 있겠는가. 죄의 뿌리는 우리들 모두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 386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우리 세대의 잘못이 아주 크다고 생각한다. 이 세대는 1980년대의 민주화 과정에서 큰 몫을 해냈다. 이들이 대학과 산업 현장에서 일으킨 민주화 운동은 대통령 직선제라는 정치적 개혁으로 귀결되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그때껏 독재에 시달려 온 것을 감안하면 아주 크고 귀한 결실이었다.하지만 그것은 또 하나의 출발점이 되어야 했다. 이 새로운 시작점을 어떤 종착점처럼 착각한 것은 이 세대의 커다란 약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기는 이 그룹에 속하는 몇몇 소수자들은 그것에 이어지는 또다른 혁명을 꿈꾸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대개 구식 마르크스주의 같은 저열한 이론에 입각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미래가 없었다. 그것은 그 지독한 변종 괴물인 주체사상이 보여주듯 또다른 야만의 얼굴이었다.지혜롭지 못했고 세계사를 꿰뚫는 식견을 갖추지 못했던 이들 세대에게 1987년 체제는 하나의 종착역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더 나아가야 할 이상이 없었으므로 이들에게는 이제부터 적응해야 할 매커니즘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다들 열심히 살았다. 아마도 착하게도 살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느 단체에서 내걸었는지 모르는 열심히 살자, 착하게 살자에는 푯대가 없다. 푯대 없는 열심히 살자는 마키아벨리즘에 빠지기 쉽고, 푯대 없는 착하게 살자는 사람을 현재에 귀착시킨다.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오히려 열심히 살아서도 안되었고 착하게 살아서도 안되었는지 모른다. 그 대신에 우리는 천천히, 사색하고, 더 나은 미래를 모색하며 살아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적응하려 애쓰며, 살아남으려 애쓰며 살아왔다. 우리가 깨지 못한 구체제의 근본적 구조가 그렇게 명령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싸움을 배웠고, 서로 돕는 것보다 더 많이 경쟁을 배웠다.모든 것이 수치로, 그리고 0과 1로 환원되어 추상화 되었다. 정치적 민주화 이후에 세상은 더 물질주의적으로 급속히 개편되었다. 경제성장과 인간 경영과 인간 공학과 목표의 초과 달성이 미덕이 되고 인문학과 예술학은 루저들이 마지 못해 살아가는 영지가 된 듯했다.우리 사회처럼 종교가 번성하는 곳도 없지만 바로 그 종교의 이름으로 무신론적인 물질 숭상이 이토록 심하게 거행되는 곳도 없다.이 세대는 지금 드디어 마름들의 위상을 획득했다. 구각을 벗지 못한 체제를 떠받치는 중간 관리층으로서 그들이 한때 저항했던 악을 당연시하고 그것에 편승하여 더 높은 곳으로 비상하고자 한다. 비도덕적인 특권층의 악덕에 눈감고서라도 더 많은 기회를 타내고자 한다.그러는 사이에 이 사회는 진실과 거짓을 가르는 법을 잃어버리고, 공허를 화려하게 치장하는 화장술을 발전시켰다. 이것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이가 드물다. 많은 이들이 머리 속에서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 미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곧장 숫자로 환산되어 추상적으로 떠오를 뿐이다. 우리는 앞으로 소득 몇만 불 시대에 살게 될 것이라는 식으로 말이다.세월호 참사를 들여다 보면 우리가 정말 결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가 어렴풋이, 아니, 명료하게 보인다.우리는 삶을 실체로서 이해하는 법을, 타인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법을, 생명의 가치를 다른 무엇보다 먼저 생각하는 법을 잊어 버렸다.오늘의 이 슬픔을 우리 같이 나누어 져야 한다. 우리들의 죄를 서로 같이 가엾어 해야 한다.

2014-05-01

우리 모두의 책임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슬프다. 아이들이, 내 자식 같은 아이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이 세상을 떠났다. 바다에 수장되고 만 것이다. 처음에 바쁜 일중에 언뜻 인터넷에서 조난 사고 단신을 보고는 그렇고 그런 사고려니 했다. 밤에 다시 접한 소식은 참혹했다. 이럴 수는 없다. 이렇게 잘못될 수는 없다. 이렇게 무력할 수는 없다. 다른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그냥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만 했다.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사흘이 가고, 나흘째가 되자 사태가 분명해졌다. 국가며, 정부며, 언론이며, 이 모든 잘난 기구들, 위엄 있는 기구들이, 6천825t짜리 배 하나를 건져 올리지 못하는 헛것이었다는 사실. 아니, 그전에, 기울어져서, 서서히 침몰해 가는 배안에 갇힌 아이들을 단 한 아이도 꺼내오지 못할 유령이었다는 사실.조난 신호를 제 때 받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지? 기울어져서 바닷물 속으로 꺼져 들어가는 배를 왜 그렇게 보고만 있었는지? 구원을 위한 조치들은 어쩌면 그렇게 엉성하다 못해 엉망진창이었는지? 그리고 우리는 왜 그렇게들 스스로 부끄러운 줄 모르는지?이 참혹한 사태 앞에서 가장 꼴불견이었던 것은 차라리 언론이었다. 언론은 일제히 선장을, 선원들을, 사주를, 총리를, 장관들을, 해경을, 정치인들을 비난해댔다. 무엇들 하느냐고,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뭘 하고 있었느냐고.하지만, 그러면, 언론은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나? 정치 권력을 둘러싼 쟁투와 게임 속에 스스로 몸을 담그고, 이 편이 좋다, 저 편이 나쁘다, 편가르고 싸우는 주역이 되어 지난 모든 나날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던가?아무리 참혹한 일을 당해도 냄비처럼 끓어올랐다 제 풀에 식어버리는 것은 바로 언론이 아니던가? 카메라 앞에서의 그 분노한 포즈들은 뭔가? 그것은 다 가식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던가?그리하여, 우리는 이 사회를 이끌어 가는 우리들 기성세대 모두가 죄인임을 깨달아야 한다. 정부도, 정치 집단도, 기업도, 언론도, 학교도, 당신도, 나도, 모두 치명적인 병세 감염되어 있음을, 사태의 본질, 저변에 바로 우리들 기성 세대의 병든 가치의식, 병든 생리가 자리잡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우리들은 지금 모두가 화려한 물질적 메커니즘의 수치를 향유하며 살아간다. 단군 이래 이런 번영은 없다고들 한다. 무역 수지가 어떻다고, 성장률이 어떻다고 한다. 더 많은 수치, 더 높은 수치를 겨냥해서, 더 빨리, 더 일사분란하게 나아가야 한다고 한다. 더 많이 만들고, 더 많이 써내라고 한다. 목표를 이루는데 거리적거리는 것은 무시하라고 한다. 방해가 되는 요인들은 제거해 버리라고 한다.대한민국도 비유하면 한 척의 배다. 거대하고 복잡하지만 배라면 배다. 세월호도 그 앞에 서면 위용을 부러워할 만 했다. 대한민국호도 지금 위용을 떨친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안전한 것일까? 섰다 가다를 반복하는 원자력발전소들은 과연 안녕할까? 북한의 핵실험이며, 전쟁 위협은 일상의 하나일 뿐이라고 무시해도 되는 걸까? 공장들은, 생산의 현장들은 과연 지금 안전할까?이 작은 반도의, 그것도 절반밖에 안 되는 땅, 한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 모든 곳으로 단 번에 퍼져나갈 이 땅에서, 우리는 정말이지 너무들 태연하게, 무시하고 외면하며 살아가고들 있는 게 아닌가?지금 남의 탓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본다. 슬프다는 말보다도, 참괴하지 않은가? 수장된 아이들이 우리들에게 우리들 자신의 발뿌리를 보라고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수학여행을 떠난다고, 엄마들, 아빠들에게 웃으며, 즐거워하며, 재잘거리며 떠난 꽃송이 같은 우리의 아이들.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말아야 한다. 이 나라, 이 사회를 끌어가는 메커니즘, 가치의식, 생리를 근본적으로 되돌아 보지 않으면 안된다. 다른, 더 나은 작동 원리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 우리 자신을 탓해야 한다.

2014-04-24

컴퓨터·휴대폰 피로사회

출근해서 무슨 일이든 하려면 컴퓨터를 켜야 한다. 인터넷을 연결해야 한다. 누구나 꼭 먼저 접속해야 하는 사이트가 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곳의 홈페이지일 것이다. 접속에는 로그인이 필요하다. 로그인 작업은 어렵다. 아이디를 입력하고 비밀번호를 또 입력해야 한다. 이 작업은 간단치 않다. 아이디는 대개 영문이기 때문에 영어 자판을 제대로 누르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비밀번호는 더 어렵다. 영문과 숫자를 조합해 놓았기 때문에 자판 두드리는데 더 신경 써야 한다. 이제 됐다. 하지만 꼭 읽어야 할 메일이 들어와 있는지 봐야 한다. 메일에 안 읽은 편지의 숫자가 표시되어 있다. 오늘은 1179개의 안 읽은 메일이 있다. 자기에게 할당된 저장 용량이 곧 바닥이 날 것 같다. 지난 번에도 98%를 사용중이라고 했다. 메일들 지우는데 진땀을 흘렸다.나는 옛날 실학자 이름을 딴 그 연구소 메일을 받겠다고 한 적이 없다. 나는 그 정치색 강한 목사에게 아침마다 편지를 받겠다고 약속한 적도 없다. 나는 또 그 금연클리닉 두번째 프로그램이 시행된다는 편지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서른일곱 살 때쯤 담배를 끊었다. 왜 인천 문화를 위해 일하는 곳에서 내게 소식지를 보내겠다고 하는 걸까? 혹시 3주 전에 인천 영종도 삼목선착장에서 신도 가는 배를 탄 게 알려진 것일까? 출판사들에서도 고맙게도 책의 존재를 알려주는 광고를 보내줬다. 하지만 나는 그 책이 필요 없다.무슨 교육재단에서도 나를 잊지 않았다. 그곳에서 내가 필요한 이유는 자신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필요한 꼭 그만큼의 이유 때문이다.이메일을 정리한게 얼마나 됐나? 석 달은 된 것 같다. 오늘은 이 1천개가 넘는 메일을 다 선별해서 쓰레기통에 집어넣을 여유가 없다. 100개나 200개쯤이라도 지워서 여유공간을 마련해야겠다.메일 정리를 하고 있는데 문자가 온다. 핸드폰을 들어 문자 보낸 번호를 본다. 모르는 핸드폰 번호다. 켜보고 싶지 않지만 하는 수 없이 열어본다. 꼭 필요한 문자인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하지만 한숨이 난다. 대리운전 광고 문자인 때문이다. 오늘은 술 마실 필요가 없건만. 내가 운전면허를 딴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또 술 마시고 운전은 안 하기로, 선량한 시민 되기로 생각한 걸 어떻게 알았는지. 하지만 내게 문자를 보내는 알 수 없는 곳에서는 내가 선량하지 않다는 걸 안다.최근에는 무슨 포커를 하라는 문자가 핸드폰 번호를 달리 해서 연달아 여섯 개 인가가 왔다. 나는 아주 선량하지는 않지만 그렇게까지 무료하지는 않은데 말이다. 대출 이자 싸다고 하는 문자도 한두 번 아니었고. 휴. 이것들을 언제 다 지울 수 있을까. 어제 이 문자들을 200개쯤 지웠지만 아직도 휴대폰에는 500여개의 처리해야 할 문자들이 있다.고마운 것도 분명 있다. 오늘 우편물이 배달될 거라는 임상복님의 문자. 오늘 그 우편물을 밤에 경비실에서 찾아와야겠다.하지만. 이 분은 이 모든 우편물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입력을 해아 했을까? 전산으로 자동처리되는 일이기를 바랄 뿐이다.자동차의 모드 액츄에이터인가를 고치러 서비스센터에 갔었다. 정비기사 분이 차문을 열고 눕다시피해서 고장 난 부품을 갈아주었다. 하지만 그분에게 일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컴퓨터에 입력을 해야 했다. 자세히 살펴보지는 못했다. 필시 내 이름, 그날 날짜, 교환한 부품 종류와 수량, 가격 등을 꼼꼼하게 기입해야 했을 것이다. 또 그 관리 프로그램에 자신의 실적을 남기기 위해 로그인을 해두었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아침부터 벌써 지쳐 버렸다. 커피를 마시지 않고는 잔뜩 안개가 낀 이 머리 상태를 되돌릴 수 없을 것 같다.

2014-04-17

나혜석과 페미니즘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나혜석(1896~1948)은 최초의 한국근대 여성 화가였다. 그녀는 매우 똑똑해서 일찍부터 공부에 두각을 나타냈다. 서울 진명여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 도쿄 사립 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그러나 재주 많은 사람의 운은 그다지 좋게 타고 나지 못하는 법인가 보다. 그녀는 게이오대학에 유학했던 최승구와 연애했으나 그는 조혼하여 아내가 있었고, 또 폐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나혜석은 그가 죽기 직전 고향에서 정양 중인 최승구를 방문하여 열흘 가량 머물렀는데,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이라 해서, 아무리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이라고 해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이런 일들 때문에 아마도 나혜석은 통상적인 결혼은 할 수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는 1920년 4월10일에 오빠 나경석의 친구인 김우영(1886~1958)과 결혼했는데, 이것은 예술의 길을 걷기 위한 현실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그는 교토제대를 졸업한 변호사에 일본 외무성 외교관이 되기까지 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1927년 6월19일에 나혜석은 세 아이를 시가에 맡겨두고 구미 시찰을 떠나는 남편을 따라 소련을 거쳐 프랑스 파리로 갔다.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를 여행했고, 파리에서 야수파 화가 비시에르의 화실에 다니며 그림을 공부했다. 이때 남편 김우영은 법률 공부를 위해 독일에 잠시 가 있었는데, 그 사이에 천도교 지도자인 최린과 만나 급기야는 그해 11월20일에 셀렉트호텔에 함께 투숙하게 된다.한 달 후 나혜석은 남편이 있는 베를린으로 갔고, 이탈리아, 영국 등을 여행하고 이듬해 8월에 파리로 돌아왔다. 9월에는 미국으로 건너갔고, 거기서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등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하와이, 요코하마, 부산 여정으로 1929년 3월12일이었다.조선에 돌아오니, 최린과의 연애 사건이 떠들썩한 스캔들이 되어 있었다. 1930년 내내 스캔들과 남편의 이혼 요구에 시달리던 나혜석은 그해 말인 11월20일 끝내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고 만다. 그 후 나혜석의 삶은 간난신고의 그것이었다고 해야 한다.남편으로부터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쫓겨나온 나혜석은 여관의 투숙객으로 살아가야 했다. 1932년에 나혜석은 금강산 해금강에 가서 그림을 30, 40점이나 그렸는데, 집에 불이나 10여점밖에 건지지 못했다고 한다. 몸이 좋지 않아진 그녀는 1933년경에는 수전증으로 왼팔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가 되었다. 1934년에 그녀는 최린을 상대로 정조 유린의 위자료로서 1만 2천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으니, 그 생활난과 심리적 불안 상태, 복수욕 따위를 능히 짐작케 할 만한 사건이었다.그 후로도 남편 김우영이나 한때의 애인 최린은 건재했으나 나혜석은 방랑과 가난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야 했다. 1935년에는 수원, 1937년에는 김일엽이 머물고 있던 수덕사 견성암 아래 수덕여관, 1938년에는 해인사 아래 홍도여관, 1939년에는 다시 수덕여관, 1944년에는 수덕여관을 떠나 서울 오빠 집으로, 양로원으로 전전한다. 1947년경에 나혜석은 안양에 있었다. 1948년 12월10일, 그녀는 서울 원효로의 시립 자제원에서 세상을 떠났다.그녀의 10년 결혼 생활은 어떤 것이었을까? 나혜석은 끝내 현실적인 생활에 안주하지 못하고 결혼의 울타리 바깥으로 잠시 외출했던 탓으로 끝내 사회로부터 `추방`당한 여성이었다.그러면 이 `추방`은 정당했을까? 나혜석 생일이 다가오는 지금,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어찌 되었든 화가이자 문필가였던 나혜석의 불행한 삶의 편에 서야겠다고 생각한다.

2014-04-10

인식의 그림자를 버리고 앞으로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그림자는 참 귀찮은 존재다. 태양 아래서 살고자 하는 한 떼어버릴 수가 없다. 어둠 속으로, 캄캄한 곳으로 들어가면 없어진 것 같다. 없애버리는데 성공한 것도 같다. 그런데 아니다. 형체를 없애버린 줄 알았는데, 버젓이 살아나서는 자기와 꼭 붙어서 돌아다닌다.인식의 그림자도 그와 같은 것이라 생각된다. 이제 나는 새 사람이다, 하고 마음 속으로 선언하고, 새 사람이 품을 법한 생각이나 하려 하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내가 품어온 생각의 그림자 때문이다. 어제까지 품어온 생각을 버리는 일은 뼈속에 든 인을 파내는 것처럼이나 불가능에 가깝다. 나는 지난 삼십 년 동안 단 두 번 생각을 바꾸려고 애쓴 적이 있다. 한 번은 실존주의를 버리고 `공동체` 사상을 받아들이고자 한 때다. 막 대학에 들어와서 시작된 이 과정은 대학생활 내내 계속되었다.인간은 본질적으로 고독하다는 게 실존주의의 대체적 가설일 것이다. 인간은 저마다 고독한 존재로 태어나며, 태어나자마자 자기 아닌 타인들에 둘러싸이게 되고, 이런 실존적 상황을 자기 투기 또는 기투로써 헤쳐나가게 된다는, 고독한 자유의 합리화가 바로 실존주의 계통의 철학일 것이다.대학에 들어가면서 나는 인간의 존재 조건으로서의 사회성이라는 명제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적 동물이 되었어야 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자족적인 완전한 존재로서의 개인이란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가 고등학생 때 심취해 있던 실존주의를 기각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이런 생각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주 힘들었다. 이미 자족적인 존재처럼 성장해 버린`나`의 완전한 고독 대신에 거추장스러운 사회성을 승인하고 그에 따른 도덕적, 정치적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 삶의 변화를 끌어내기란 쉽지 않다.그러나 나는 해냈다. 지극히 불철저했고 비논리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간의 사회성을 승인하는 쪽으로 움직였고, 그러한 인식 아래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문제들을 회피하지 않고 상대해 보려 했다.하지만, 대학을 나와 대학원에 진학할 때쯤 나는 새로운 변화를 요구받았다. 그것은 내가 짊어지려 애써온 인간의 사회성에 대한 새로운 의문 때문이었다. 과연 `나`라는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명제 수용이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 사회성을 고도로 강조하던 1980년대의 시대적 추세가 썰물이 되자, 나는 다시 한 번 자기 삶의 주역으로서의`나`라는 문제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그러나 이번에도 나는 `완전한` 나로 돌아오지 못했다. 사회적인 존재로서의`나`라는 과거의 인식이 완전히 새로운 생각으로 옮겨가고자 하는 내 자신의 의지를 시험하며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던 것이다. 그래도 변화는 어떻게든 있었다. 나는 다시 새로워졌다.그렇다. 내 사유의 궤적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새로운 인식, 의식을 갖는 일은 불가능하다 해도 좋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인식의 그림자를 버리고 자유롭고자 하는 노력이 언제나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한 태도를 가리켜 옛 시인 김수영은, 시란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 했다. 그냥 새로운 생각에 바탕해서 시를 쓰라고 하지 않고 온몸으로 밀고 나가라 한 것은 과거와의 단절 의지를 그만큼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말하자면 자신의 과거의 그림자를 떼어버리고 새로운 땅위에서 새로운 문학을 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나는 요즘 우리 사회가 지식인들, 시민들에게 새로운 생각을 요청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동북아시아가 숨가쁘게 변모해가고 있다. 우리들 삶의 토대도 격변중이다. 만물을 새로운 눈으로 보라. 과거의 인식의 그림자를 버리고. 그래야 새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2014-04-03

창조의 동력학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다윈의 `종의 기원`은 기념비적인 저작으로 알려져 있다. 1859년에 출판된 이 역사적인 저술은 현대인들에게 가장 넓고도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책일 것이다.사람은 원숭이와 같은 조상에서 뻗어 나왔다는 충격적인 종의 진화의 이론은 종은 신의 피조물로서 불변하는 것이라는 창조설의 진리성을 그 근저에서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신이 세계를 창조했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문제는 근원적인 질문이며, 사람들의 존재론적 위치를 재설정하게 하는 것이다.혹자는 이 진화론을 악마의 사상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창조설이 진리라면 그것은 어떤 시험에도 굴하지 않는 논리를 구축해야 하며, 때문에 진화론은 역설적으로 창조설로 하여금 논리를 강화시킬 수 있는 풍토를 조성해 주는 셈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조물주에 의한 우주 창조를 기대하면서도 다윈적인 진화론에 푹 빠져 있는 듯하다.이 다윈이 종의 기원을 저술할 때 자연과학들, 생물학이나, 유전학이나, 지질학은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말하자면 그때 지구의 나이는 가장 선도적인 학자조차 9만년을 헤아릴 정도였고, 진화의 계단을 연결해줄 생물 화석들의 발견도 지극히 부분적이었다.아주 많은 것들이, 따라서 다윈의 창조적 상상력에 의해 채워져야 했다. 질리언 비어라는 사람이 쓴`다윈의 플롯`이라는 책에 따르면, 종의 기원은 이론적 저술일 뿐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던 시대의 여러 첨단적 학설들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야기의 뼈대를 세우고, 빈 데를 채워 넣어 플롯을 짜 맞추고, 세목들에 살을 붙여, 자기 당대의 수준을 넘어서는 진화의 이야기를 창조해 놓았다.이 `종의 기원`과 다른 여타의 생명력 있는 저작들을 살펴보면, 좋은 저술이나 이론이라는 것은 그때까지의 지식들을 얼마나 요령껏, 체계적으로, 자세하게 모아놓았는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요, 당대 지식의 결핍 지점을 메울 수 있고, 또 그 학설이라는 `이야기`의 결말까지도, 혹은 그 너머의 이야기까지도, 풍부한 상상력과 통찰력, 예지력을 발휘하여 내다볼 수 있는 창조력에 의해 나타나게 됨을 확인할 수 있다.나는 이 창조력을 따라서 기존의 것을 종합하면서 그 수준을 뛰어넘는 비약을 가능케 하는 힘으로 재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이러한 창조력에 의해서 나타나는 새로운`발명품`은 무엇보다 외견상 모순되는 논리들이 혼거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예를 들어,`종의 기원`에서는 자연선택의 원리로서의 생존경쟁을 고도로 강조하고 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상호 의존에 대한 설명도 함께 존재함을 볼 수 있다.마치 삼각기둥에 사각기둥을 겹쳐 놓을 때 생겨나는 논리의 빈틈 같은 것이 발견되는 것인데, 나는 이것을 창조적 빈틈, 비약을 위한 빈틈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종의 기원`을 문제작으로 만들어주며, 이 바탕 위에서 크로포트킨처럼 상호부조를 강조하는`만물은 서로 돕는다`같은 저작도 나올 수 있었고, 최근 들어서는 페미니즘과 진화론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려는 시도로 연결되기도 한다.`참된` 창조적 비약은 빈틈, 여백을 갖는 논리의 탄생일 수밖에 없고, 이 이야기의 결핍된 부분을 메우고자 할 때 비로소 인간은 새로운 창조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된다.본래의 자기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태도로는 결코 참된 창조를 이룰 수 없으며, 논리의 상충과 모순을 감당하면서 상상이 가능한 최대치를 모색하는 행위 속에서 비로소 새로운 계단의 창조가 가능한 것이다.두려움 없이 종합하고, 접합시키고, 접붙일지어다. 혼란과 혼돈 위에 새 질서가 싹틀 것을 믿고. 이것이 창조의 동력학이다.

2014-03-27

루저 의식의 시대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산에서 내려오면서 우리는 요즘 젊은이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대 청년들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뜨거운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대화는 갑자기 음성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식들 얘기를 한다. 대학을 대학 같지도 않은 곳에 보내려니 보람이 안 느껴진다는 것인데, 그것도 등록금을 자기가 대주지 못하고 아내가 벌어 대는 형편이라 도대체 말발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그런 대학을 가느니 차라리 일찍 공무원 될 수 있는 길을 찾아보라 해도 아들도 안 듣고 아내는 언제나 아들 편이라는 것이다. 요즘 대학 등록금이 말이 아니기 때문에 집안에 대학생 하나 나오면 허리가 부러질 지경이고 보면, 이름값 없는 대학 다니는 것보다 실속 있는 직업을 찾아보는 게 현명한 일인 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우리의 산행은 남자들의 등산이 으레 그렇듯이 막걸리집으로 이어졌다.또 한 사람이 젊은이들 삶의 풍경을 날카롭게 진단하기 시작한다. 자기가 생각하건대 진짜 문제는 공부 잘 못하는 그 아들이 아니라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성장해서는 공부도 적당히 잘해서 대학에 가고, 또 거기서 어떻게든 사회에 성공적으로 진입하는 길을 택해서 사회의 중간 관리계층으로 편입되는 청년들이 더 문제라는 것이다.왜냐. 예나 지금이나 마름이 더 무섭고 끔찍스러운 법인데 요즘 그런 친구들은 자기 생각을 계발하도록 인도되기보다는 주어진 사회체제에 적당히, 아니, 어떻게든 적응하도록만 길러지는 까닭에 정의나 부정의에 대한 감각도 결핍되기 쉽고,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이 정상적인 것, 표준적인 것,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여기면서, 타인들에 대한 관심은 희박해져버린다는 것이다.결과는? 이제 그런 청년들이 사회 중추세력으로 성장한 사회는, 그 사회의 작동 메커니즘에 대한 성찰이나 이상 사회에 대한 사유를 권장하는 대신에 주어진 규칙에 따를 것을 일방적으로 요구하게 될 테고, 그 속에서 무감각, 비정의 관리층이 위와 아래를 자동적으로 조절하는 현상이 만연하리라는 것이다.나는 듣고 또 한 사람이 말한다. 이런 청년들이 지금 목하 학교 체제 아래서 성장하고 있는데,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이른바 루저 의식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루저라니? Loser. 패배자로서의 의식 같은 것 말이다. 지금 젊은층을 들여다보면 공부 잘 하는 아이도, 잘 사는 집 아이도, 그 루저 의식에 감염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을 루저라고 인식하는 절박감 속에서 어떻게든 그런 상태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거나, 어떻게 해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고통스러운 심리가 작용하고, 이 때문에 타인이나 주변에 시선을 돌리고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공고해서 다른 방식으로는 진화할 것 같지 않은 세계에 어떻게서든 적응해서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바로 지금의 기성세대 그 자체일 것이다. 만약 젊은 세대가 루저의식을 가진다면 그것은 윗세대의 의식에 감염된 탓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루저의 루저들은 삶을, 사회를 미래적으로 펼쳐가기에는 언제나 무거운 지붕이 짓누르고 있는 부담감에 시달린다. 어떤 슬픔과 원한으로 인해 구성원들은 유대와 결속보다 불신과 고립의 감정에 더 익숙해진다. 상호 원조를 통해 사회의 진보를 이루어가는 대신 경쟁과 도태로 이끌어지는 사회는 윤기가 부족하다. 물질이 상대적으로 풍부하다 해도 그것이 정신의 건조함을 메워줄 것 같지 않다. 좋은 학교에, 좋은 직장에 가도 이미 루저가 되어 있을 청년들을 상상하는 산행객들의 저녁 자리는 우울했다. 윗세대의 사회운영 원리보다 나은 메커니즘 속에서 삶을 영위하게 할 수 없나?비록 이름이 높지 않을망정 대학에 들어간 젊은이를 축하해 주자면서 우리 3인은 서울 주점에는 오로지 한 가지밖에 없는 승리한 막걸리 잔을 높이 치켜 들었다.

2014-03-20

자유의 `이행` 문제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1967년, 1968년 얘기를 지금 재론하는 것은 과거에 머무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가 자유에 관한 것이라면 경우가 달라진다고도 할 수 있다.그때 이어령과 김수영 사이에 이른바 불온시 논쟁이 있었다. 수십 년만에 다시 들여다본 불온시 논쟁은 그 당사자들이 무엇을 염려하고 있었는지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그때 김수영은 자기한테 써놓지 않고 발표하지 않고 있는 시가 여럿 있노라고 했고, 또 신춘문예에 응모해 온 불온시 같은 것도 발표되어야 우리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라고 했다.이어령은 문제틀을 바꾸어, 당신의 그 서랍속에 들어 있는 불온시를 좀 내놓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써놓고 발표하지도 못하는 시라면 위대한 문학이 될 수 없으며, 지금(그러니까 당대의) 문학의 부진 상태는 정치적 부자유보다도 문학인들의 창작의식의 결핍 탓이라고 했다.김수영이야 그때 바야흐로 참여문학의 대변인 격으로 `승격되고` 있었던 형편이었기에, 이어령은 그를 향해 당신은 정치적 문학, 정치적 환경이나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문학을 하자는 것이 아니냐, 그런 류의 문학이 한국문학을 위대하게 만들어 줄 수는 없었던 것이 아니냐고 힐난한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의 근저에는 당신의 그 참여문학의 배후에는 일종의 사회주의를 향한 은밀한 지향 같은 게 숨어 있는 게 아니냐는 비난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기도 했다.그러면 문제는 이제 김수영이다. 논쟁 과정을 들여다보면 김수영은 아주 쩔쩔 맸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좌익 사회주의자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전위문학이니, 실험문학이니 하는 말을 도입해 가며 이어령의 비난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시도해마지 않았다.그리고 이 논쟁의 여운이 가시지도 못한 상황에서 김수영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김수영은 참여문학의 희생자가 되고, 그로써 일각으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그의 이른바 온몸시론, “시여 침을 뱉어라”는 시인이라면, 문학인이라면 몸부림을 쳐서라도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 같은 그릇된 후광에 감싸여 오늘에까지 왔다.그러나 그가 죽음에 다다랐을 무렵, 그는 공산권에서의 문학인의 좌절을 다룬 글을 쓰고 남기고 있다. 소련 사회주의 체제 아래서 `닥터 지바고`의 파르테르나크를 비롯한 문학인들이 어떻게 좌절했으며, 쓰고도 서랍 속에 넣어두어야 할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느냐는, 그 경위를 설명하는 글이었다.이 글에 그러니까 써놓고 발표하지 못하는 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를 이른바 불온시 논쟁에 연결지어 보면, 김수영은 당시 한국에서의 자유의 문제를 소련에서의 자유의 문제에 비추어서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그때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김수영은 “자유의 이행”, 즉 어떤 두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즉각, 더 많은 자유가 필요하다고 쓸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기실은 더 많은 자유라기보다는, 절대적인 자유에 대한 요청이었으니, 말하고 쓸 수 있는 자유가, 절대적으로 주어져야 함을 김수영은 주장하고 싶어했다고 볼 수 있다.이 생각은 공상적인 것일까? 또는 이 절대적 자유는 그것을 허용한 사회를 위태롭게 만드는 것일까?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사실 이어령이 주장했듯이 이 땅에서 위대한 문학이 출현하지 못한 것은 자유의 결핍 때문은 아닌지도 모른다. 소련에서는 솔제니친이며 파스체르나크가 나오지 않았던가.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구가할 수 있는 자유의 총량, 또는 그 허용치가 얼마냐 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두통거리라 할 수 있다.하지만 어떤 불합리한 체제의 존재를 명분 삼아 자유의 크기를 제한하는 논법은 이미 낡았고 설득력이 부족해졌는지도 알 수 없다. 자유를 이행하라. 이것은 어떤 문학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 공동의 인식이 되어야 한다.

2014-03-13

위안부 문제에 관하여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바로 어제다. 아침방송에 김복동 할머니가 출연했다. 이금희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프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올해 89세. 열다섯 살 나이에 위안부로 끌려가 고귀한 생명을 짓밟힌 그 분이 텔레비전에 나와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정부가 앞장서서 해결해 달라고 했다.그리고 오늘, 한국의 외무부장관이 처음으로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공식 제기한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위안부 문제를 직접 언급하는 대신 우회적인 표현을 써왔으나 이번에는 직접적이면서도 명시적인 표현을 담아 국제사회의 지지를 이끌어냄과 동시에 일본정부가 문제해결에 나설 것을 촉구하리라는 것이다.며칠 전 일본의 문부과학성의 사쿠라다 요시타카 부대신은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 운운은 거짓말이자 날조라고 떠들었다.한국 정부가 이렇듯 최근 들어 계속되고 있는 일본 정부쪽 도발에 대해 대응 수위를 높이기로 했다는 것이지만, 국민적 감각으로는 아직도 우리 정부가 역사 문제를 미온적으로 처리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지난 십 년 가까이, 국내에서는, 한·일 근대사 관계를 둘러싸고 이상한 인식이 일로 확산되어 왔다. 그 가장 단적인 예가 바로 역사교과서 문제의 처리다.이른바 교학사 교과서를 둘러싸고 정부 일각에서는 마치 그것의 채택 여부가 교과서 제도의`정상성`여부를 판단하는 척도라도 되는 듯이 움직인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런 흐름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의 채택은 거의 무산되다시피 했지만, 그러자 이번에는 장노년층의 보수적인 계층들에 호소해서 책을 사주자는`운동`을 벌이고 있는 징후들이 보이기까지 한다.도대체,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 것이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식의`자학적`논리를, 우리 학생들이 배우고 떠받들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런 수치 경제학은 지나간 일제강점사를 몰인간적 시각으로 재단하게 한다.텔레비전에 출연한 김복동 할머니는 그녀가 경험한 일제말기가 어떠했는지 증언했다. 그것은 폭력과 강제와 동원과 협박으로 점철된 시대였다.또, 작가 최인훈은 장편소설`화두`에서 그가 경험한 해방 전 시대가 육체에 가하는 폭력의 시대였음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어디서나 때렸다는 것이다.“일본 점령자들은 그것이 군대건 경찰이건 면사무소건 심지어 병원 진찰실에서건 자기 권위 아래 놓인 불쌍한 피점령자를 그것이 노인이건 갓난아이건, 남자건 여자건, 건강한 사람이건 아픈 사람이건,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무엇보다 먼저 귀싸대기를 눈에서 불이 번쩍 나게 올려붙이고 동시에 발길로 내지르고 보는 것이 기본동작이었다.”(2002년판`화두`1, 40쪽)매일“귀싸대기”를 얻어맞더라도, 철도 연장이 늘어나고, 곡물생산량이 늘고, 학교들이 무척 지어졌으니 좋은 게 아니냐는, 기이한 양자택일 논법을 왜 우리 학생들이 받아들여야 하나?일본 쪽에서도 이른바 우익교과서라는 후소샤 교과서가 제작되어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지만, 그것은 그래도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를 가리고 호도한다는 점에서 일본의 자기 본위라는 명분에 만큼은 기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우익`교과서는 이상한`자학사관`에 물들어 있다.역사를 상고해 볼 때, 해방 후 분단과 대한민국의 단독 수립은 불가피한 국제적 과정의 산물이었다. 이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오늘 여기에 이르렀다.하지만 대한민국을 강하게 긍정하는 것이 왜 일제의 식민통치를 수긍하는 것에 연결되어야 하나?정부는 지난날의 소극성을 버리고 일본에 물을 것은 물어야 한다. 따질 것은 따져야 한다. 한맺힌 위안부 할머니들의 인권을 지금이라도 지켜내야 한다.

2014-03-06

지금 우리 문학과 지성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누가 물었다. 한국 문학의 문제점이 무엇이냐고. 나는 잠시 생각했다. 문제를 하나부터 열까지 낱낱이 세서 말할 수도 있고 단 한 가지만 들어 말할 수도 있다. 둘 다 가능하고 나쁘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는 후자의 방법을 취해 본다. 언젠가부터 나는 이런 본질주의를 싫어하게 되었지만. 도무지 사상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사상이라고 말하면 또 다들 깜짝 놀랄 수도 있다. 그러니까 그건 좌익 사상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냐고 말이다.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단 하나의 사상을 말하는 게 아니다.우리에게는 지금 1945년 해방 때로 돌아가는 회상력이 중요하다. 그때 사상은 오로지 단 두 가지만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두 가지 사상은 각기 자기 존립의 절대성을 주장했으므로 그때 사람들 각자가 주장한 것은 오로지 한 개의 사상밖에 없었다. 내가 보기에 바로 이 상황이 부조리한 것이었다. 남북한에 각기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북한의 침공으로 전쟁이 벌어지고 휴전이 성립하자, 남과 북에는 바로 그 단 하나의 사상들이 지배권을 가졌다.그러나 사상이란 것이 본디 우주와 사물과 인간을 보는 각도의 차이들에서 저마다 각기 다르게 개진되는 것이라면, 그 사상은 많고도 그 많은 것이 각기 깊어야 좋지 않겠는가?하지만 우리 역사와 현실은 이 다양성과 깊이를 장려하지 못했다. 이것이 아니라면, 그럼 저것이란 말이냐고 으름짱 놓기 바빴다. 대립하는 두 극단을 상정하고 이항대립과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사회는 깊어질 수 없다. 자기 사상에 대한 성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물론 이 남쪽은 북쪽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유를 누렸다. 저것만 아니라면 다른 사상이야 얼마든지 추구해도 좋다는 허락이 있었다. 그러나 양 극점의 자장이 워낙 강했던 탓에 다른 사상들은 마치 이 두 극점을 잇는 직선상의 어느 지점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은 착시 현상이 작용했다. 이 효과 탓에 사상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개성과 가치를 충분히 발양시키지 못했다.예를 들면 농본주의는 어떨까. 나는 가끔 농본주의야말로 현대인들이 잊어서는 안되는 귀중한 뿌리의 사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광수가 장편소설`흙`을 썼을 때, 그 주인공 허숭은 농촌을 계몽하기 위해 고향 살여울로 간 것만은 아니다. 이 소설을 다시 읽으면 허숭의 선택의 배경에 작용하고 있는 당대의 농본주의의 흐름을 포착할 수 있다.이 농본주의는 지금 퇴행적, 복고적 사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이 사상이 우리 사회에서 면면한 흐름을 형성하면서 자기 진화하는데 미흡한 점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또 나는 세계시민주의 같은 것은 어떻겠느냐고 생각한다. 아니면 반대로 지독한 개체주의 같은 것을 밀고 나가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예술지상주의의 21세기판 같은 것은, 무정부주의의 최신판은, 환상에 매달려 보는 것은, 우주론적 통찰을 현대 물리학의 가르침에 연결지어 풀어보는 것은 어떻겠는가, 하고 생각한다. 영원한 여행자의 사상을 구축하는 방랑의 문학가는 없어도 되는가, 왜 이 문학은 지금 사상의 강도와 열도가 이리도 약하단 말이냐. 이러고도 세계의 문학이라 할 것이냐.이렇게 쓰고 있으니 최인훈이며, 박상륭이며, 이청준 같은 작가들의 이름이 불현듯 그리워진다. 그대들이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들이 그립답니다.작가들아. 자기만의 사상의 싹을 키우라. 젊을수록 더 고독한 사상을 준비하라. 소외된 음지의 작가일수록 그 그늘을 녹일 사상을 만들라.이것이 바야흐로 남북의 문이 열리고, 통일을 대비하는 시대를 위해 작가들이 쌓아가야 할 자기만의 몫이다.지금 한국문학은 지성을 회복해야 할 때를 맞았다.밤에 좀더 많은 책을. 술잔 대신 책을.

2014-02-27

그것은 인생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트랙 길이 111.12m. 짧다. 짧아도 너무 짧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트랙에 매달린다. 너무 짧아서, 그들은 돌아온다. 처음 출발했던 자리로 돌아오고 또 돌아오고 해야 한다. 하지만 똑같이 돌아오지 않는다. 있던 그 자리로 돌아오는 것 같으나, 매번 다르게 돌아온다. 더 지쳐서, 더 절박해져서, 그래서 더 큰 갈망을 품고, 힘겨워하며, 그래도 돌아오지 않을 수 없는 원리에 순응하여, 마지막 골인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그들은 매번 돌아오지 않을 수 없다.누군가는 이기고 많은 이들은 진다. 결승선에 바짝 다가설 때까지 정말 누가 승자인지 판가름할 수 없다. 심지어는 다 달리고도 최후의 심판을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그때까지는 다들 포기하지 못한다. 끝까지 승자가 되려고들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다 달리고난 그들 사이에서 누군가는 이기고 누군가는 진다. 지는 자들이 더 많다. 이긴 자도 누구나 다시 질 수 있다.실력대로, 정성대로 귀결되지 않는다. 가장 열심히 달린 사람이 패자가 된다. 잔꾀가 밝은 사람이 승자가 될 수도 있다.뜻하지 않은 사태가 발생하면 누군가는 반드시 그 스피드의 희생양이 된다. 빠르게 달려온 만큼 쓰러지는 충격도 크디크다. 그 쓰러지고 엎어진 자에게 시간은 다시 기회를 주지 않는다. 좀처럼, 아주 좀처럼 말이다. 거의 모든 경우에 그는 그 레이스를 초라하게 마치지 않으면 안된다. 후회하고, 원망해도 소용없다. 아, 그런데, 운명의 수레 바퀴가 문득 다시 한번 그에게 기회를 선사한다. 앞서 달리던 자들까지 모든 쓰러뜨리고, 신은 다시 한번 먼저 쓰러진 자에게 속삭인다. 일어나 달려라. 다시는 그렇게 쓰러지지 말아라.남의 잘못으로 내가 무너질 수도 있다. 내가 지은 잘못이 아닌데도 운명의 신은 잔인하다. 신은 결코 공평하지 않다. 내가 자기도 모르게 남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그것은 윤리의 전락이지만, 이 전락이 승리를 가져다 주기도 한다. 때로는 내가 원한 게 아니었다고 변명도 해본다. 하지만 이미 지나가버린 그 순간은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쓰러뜨린 자는 다시 일어나 옳게 달리지 못한다. 모든 잔인함을 감수하고도 나는 끝까지 달려가야 한다.돌고 돌아, 이기고 진 것도 끝이 아니다. 레이스를 끝내고 승자와 패자가 갈리고도, 마지막까지 지켜본 자들, 응원해 준 자들, 저주를 퍼부은 자들의 마지막 판정이 기다리고 있다.이긴 자도, 진 자도, 다시 한 번 웃고 울어야 한다. 동정과 찬사와 비난과 탄식이 그들을 기다린다. 누군가는 이기고도 비난에 직면한다. 누군가는 지고도 사랑에 휩싸인다. 이긴 것이 초라해지고, 진 것이 영예가 될 수도 있다. 끝난 것은 다 끝난 것이 아니다. 그들이 관계해 온 모든 시선이 그들을 마지막까지 따라다닌다.돌고 도는 그 레이스는 하지만 향연이다. 한밤에 터지는 폭죽놀이다. 캄캄한 밤하늘에 반짝 하고 섬광이 일고, 그 빛이 사방 허공으로 흩어진다. 넓게 퍼져 가며 빛살들은, 빛점들은 스러진다. 모든 것이 끝났는가 하면 또 다시 연달아 빛이 번쩍이고 허공을 울리는 빛의 폭음이 밤하늘을 수놓는다. 터지고 또 터진다. 시간을 모르는 아이들은 이 폭죽의 향연이 한밤 내내 계속될 것을 믿고 잠든다. 하지만 모든 놀이가 끝나는 최후의 시간이 있다. 섬광도, 폭음도, 함성도, 환호와 아우성이 사라지고, 밤은 이제 고요로 가득하다.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는 밤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말없이 반짝인다. 어디선가 이 모든 것을 감각과 감정을 가지고 느낄 수 있는 생명적 존재가 새로 태어나기를 기대하며.돌고 또 돌아야 하는 트랙에서 복수를 꿈꾼 한 사나이의 복수는 완성된 것 같다. 하지만 모든 승리에는 그 승리를 위한 패배가 숨어 있다. 그는 승자일뿐만 아니라 패자였다. 나는 그의 운명을 그렇게 읽었다.

2014-02-20

올림픽으로 세상 보기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소치에서 희소식이 날아왔다. 이상화 선수가 여자 스피드 스케이팅 500m 경주에서 금메달을 땄다. 나 또한 밤 늦게 집에 들어가 몇 번씩 리플레이 되는 경기 화면을 눈 크게 뜨고 지켜 보았다. 그녀는 당당했다. 어느 뉴스 기사는 그녀를 여제라고 칭하고 있었다. 정말 그랬다. 보는 사람들은 가슴을 졸였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전혀 떨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달리는 모습에서, 그 긴 스트로크에서 완벽하게 준비된, 그리하여 타고난 자신의 재능을 완전히 발화시켜 낸 사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이런 당당함은 또 피겨 스케이팅의 김연아 선수에게서도 발견된다. 나는 벤쿠버 올림픽이 끝나고 소치 올림픽이 오도록 그 4년 동안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때면 김연아 선수가 벤쿠버에서 마지막 프리 연기를 펼칠 때의 동영상을 인터넷에서 찾아보곤 했다. 그녀는 지금 훨씬 더 강해졌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여왕이라고 부르지만, 그때는 더욱 순수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으며, 그 아름다움의 정수는 혼신의 연기를 마친 후 그녀가 흘린 눈물에 있었다. 나는 모든 연기를 마치고, 그리하여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완벽하게 감내한 끝에, 그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황홀한 슬픔과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장면을 앞으로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이상화나 김연아 같은 사람들의 존재는 현재의 나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인생은 덧없고 그 덧없음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핑계거리, 명분 같은 것이 필요하다. 내가 하고 있는 문학이라는 것도 사실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빌미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중국 작가 위화가 말했다.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사는 것뿐이라고. 어떤 고통과 슬픔, 좌절 속에서도 사람들은 여간해서는 그 삶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데, 그것은 사람이란 삶을 살아가라고 이 세상에 왔기 때문이다.하지만 이 세상의 삶에는 더 아름답거나 덜 아름다운 삶들이 있다. 살아 존재하는 것은 나무 뿌리조차 모두 아름답고,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존재하기만 하는 것도 아름답지만, 더 아름다운 것은 역시 뜨겁게 무엇인가를 완성하려고 무서운 집념을 발휘하는 사람의 모습이요, 그 삶이다. 나는 이상화나 김연아의 오늘의 모습에서 오로지 자기를 완성하기 위해 절차탁마해온 위대한 인격을 발견한다. 그래서 오늘의 나 자신을 생각하며, 그들의 경기를 보고 또 보고 하는 것이다.그러다가 이제는 삶은 또 얼마나 다면적인 것이냐고 생각한다.나는 문학을 합네 하고 육체라고는 등산 갈 때나 쓰고 숨쉬기를 운동인 줄 착각하며 살아가건만, 그네들은 육체의 완벽한 완성 끝에 고도의 경지에 선 정신의 자태를 드러내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이렇게 극단적으로 대조적인 일들 말고도 세상에는 그야말로 수없이 많은 삶의 방식들이 있다. 다들 살아가려고 세상에 왔지만 그 삶의 형식들은 그 사람들의 수효만큼이나 많고 이질적이다. 그중에 공통적인 것을 우리는 정치다, 경제다, 하고 부르지만, 세상에는 이렇게 일반화할 수 없는 삶의 형식도 무수히 많다.이상화나 김연아는 이 삶의 무한한 다양성에 눈뜨게 한다. 그리고 그 다양한 것들의 가치의 동등성에 눈 열리게 한다. 올림픽은 우리가 어떤 것 때문에 슬퍼할 때도 다른 어떤 것 때문에 기뻐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정치도, 경제도 어려운데, 우리는 지난밤에 정녕 기뻐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가.나는 과연 다른 사람들이 나로 하여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일하고 있는지, 정말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중요한 것은 내가 종사하고 있는 일의 종류가 아니다. 그 일을 해나가는 내 진심 어린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 내가 내 일에 정말 그렇게 매달릴 때 세상은 그 나의 존재로 하여 조금은 더 기쁜 곳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2014-02-13

일을 일답게 한다는 것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최근에 나는 일본에서 출판된`이광수 장편소설 연구`라는 책의 한국어판을 내는 일에 나날을`빼앗기고` 있다.`빼앗기고`는 있으나 이것은 물론 만해 한용운이 시에서 자신은 자유보다 복종을 좋아한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스스로 나서서 시간을 투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이 책은 일본의 여성 한국문학 연구자가 쓴 것인데, 일종의 한국판 `다윈의 플롯`이라 할 만하다. 내용인 즉슨, 이광수의 장편소설들, 특히 `무정`이며, `재생`이며, `흙`이며, `사랑` 같은 작품들 속에는 서구 진화론, 퇴화론 담론들을 의식하면서 시대의 약자이자, 퇴화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조선 민족의 생로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이것을 입증해 가는 저자의 태도는 아주 성실하고도 집념이 강해서, 당대 일본에 수용된 진화론, 퇴화론 줄기들은 물론이고, 서구와 북미의 이 담론의 흐름을 다양하고도 복합적으로 조명하면서, 이것이 이광수 문학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가를 치밀하고도 광범위하게 서술해 나간다.그러면서 저자는 한국의 현대문학 연구자들에게 묻는다. 왜 당신들은 한국의 근대문학인들을 일본과의 관계라는 협애한 틀 속에 묶어두려 하십니까? 그 시대의 한국문학인들은 일본과의 관계틀을 넘어서는 근대문학의 길을 개척하려고 고심참담한 길을 걸었고, 그러한 문제의식 때문에 일본어 아닌 외국어를 숙달될 수 있을 정도로 공부해 나갔건만, 왜 당신들은 그런 선배 문학인들의 고민을 조명하는 대신 일본에서 가공된 문학사 이론이나 담론에 값싸게 의존해서 그들을 설명하는 데 만족하고 계십니까?이광수문학은 저자가 식민지 시대 한국문학에 대한 자신의 판단과 평가를 뒷받침하기 위해 선택한 재료로서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이 재료는 정작 우리 한국 사람들에 의해서는 손쉬운 이데올로기적 재단의 대상일 뿐인 경우가 많은데도, 저자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광수 소설 텍스트들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집요하게 몰고 나가고 있다.나는 이 저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세 번씩이나 읽고, 저자 스스로 번역한 문장을 다듬고, 문장과 어휘의 약물들을 바로잡고, 한국에서 불필요하거나 반대로 필요한 표현들을 빼고 넣고 하면서, 내 자신이 지금 좋은 경험을 하고 있음을, 단순히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게 결코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이 책은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접해본 한국문학 연구서 가운데 가장 주밀한 책이고, 그때문에 나는 지금 어떤 태도로 일하고 있는가를 심각하게 되돌아보게 하는 책이었다.그로부터 생각하게 되는 것 하나는, 과연 일을 일답게 한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일본에서의 출판 부호들과 한국의 그것은 유사하면서도 달라서 숱하게 많은 것을 바꾸고 뒤집고 하면서도 나는 기꺼이 때려도 때려도 머리를 내미는 너구리들 같은 교정, 교열 거리를 기꺼이 잡고 또 잡고 한다.왜냐. 이 책의 저자가 한국문학에 보여준 성의만큼의 대가를 나 또한 이 책에 되돌려주고 싶은 까닭이다.연구나 공부도 하나의 일이라고 보면, 일을 일답게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이 저절로 움직일 정도로 일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 사회에는 그런 일다운 일꾼들이 많아져야 한다. 출판에 관심을 갖다보면 교정, 교열에도 숱한 급수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이 분야에서 최고라는 평가를 듣기는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데, 왜냐하면 이 분야는 그 최고의`달인`이 될 때까지 결코 만족스러운 보상을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그럼에도 그런 이들이 있다. 그런 이들을 존경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나는 우리에게 일꾼다운 일꾼들이 더 많아지기를 고대해본다. 이 혼란스러운 현대사회를 정돈해 줄 이들은 바로 그 장인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2014-02-06

나무처럼 살라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겨울이 깊어 서울은 눈도 내리고 기온은 영하 10도까지도 내려간다.새벽에 길을 나서면 몸이 더 춥다. 산나무들도 다들 추울 것이다. 잎사귀를 다 떨어뜨리고 오로지 줄기와 가지만으로 묵묵히들 서 있는 나무, 나무들.푸르스름한 새벽빛 속에 말없이 서 있는 나무들은, 사람에게, 저와 같이 살라고 속삭이는 듯하다.나무처럼 살라.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말이냐.나무는 남을 먹지 않고 스스로 먹이를 만들어 살아간다. 뿌리로부터 무기물을 흡수해서 양분을 만든다. 햇빛을 받아 광합성으로 삶을 이어갈 에너지를 창조한다.사람 또한 모름지기 스스로 만들어 살아갈 일이다. 남을 해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위한 먹이며 재화를 만들어갈 일이다.나무는 또 향상하는 마음이 있다. 위를 향해 뻗어나가는 저 나무들과 같이 사람도 자신의 자아를 고양시켜 나가며 위를 향해, 위를 향해 살아갈 일이다.또 나무는 제가 뻗어가고픈 곳이면 어디로든 가지를 내뻗는 자유를 품고 있다. 그가 움켜쥐는 허공이 그대로 그 나무의 영토가 된다.그러면 사람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 말하고 행동하고 싶은 것을 행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어느 영화를 보았다. 세 아들 중 하나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예의를 지키며 할 말을 하지 않느니 예의를 지키지 않겠습니다. 이런 사람의 말과 행동은 귀하고 자유롭다.나무는 또 저마다 서로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혼자 살아간다. 그 나무 어느 것도 다른 나무의 삶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우리도 그와 같이 서로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갈 일이다. 자기 삶의 범위를 지키며 남의 삶의 방식을 논단하지 않으며 나는 나대로 살겠다. 당신은 당신대로 살라. 햇볕을 쬐고 싶소. 조금 몸을 비켜주지 않겠소?존 스튜어트 밀의`자유론`을 보면 사람이 누려야 할 자유가 몇 번에 걸쳐 나무에 비유되고 있음을 본다. 밀보다 후대 사람인 오스카 와일드에게서도 초목에 관한 비유를 읽은 기억이 있다.우리나라에서는 요절한 작가 이효석이 그런 사유들과 공명하고 있었다.그의 소설 중에 아주 짧은 `산`이라는 게 있다. 지주 집에서 머슴 살던 중실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다. 그는 주인인 김영감의 첩을 건드렸다는 오해를 받고 쫓겨난다. 7년만의 일이다.그러면 어디로 가야 하나? 여느 사람 같으면 우선 다른 머슴집을 찾아볼 일이요, 다음으로 촌에서 떠나 도시를 찾아갈 일이다.하지만 중실은 이 둘 중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는다. 그는 대신에 산에 들어가 산다. 산에서 잠자리를 찾고 먹을 것을 찾는다. 소금이나 구하러 산아래로 내려갈 뿐 그는 이제 산을 집 삼아 살아간다. 산을 집 삼아 살아가는 것은 나무, 그는 낙엽을 잠자리 삼아 별을 헤면서 살아간다. 산에는 나무들, 나무들. 나무들 속에서 그는 나무가 되는 것 같다.두 발은 뿌리요, 두 팔은 가지다. 살을 베면 피 대신 나무 진이 흐를 것 같다.`산`은 읽는이들에게 산위와 산아래를 구별하게 산다. 산위, 나무들 세상은`자연`이요, 산아래 사람들 세상은`사회`다.이제 사람도`자연`처럼, 나무처럼 살아갈 일이다.겨울이 깊었으니 이제 봄이 가까웠다. 마치 죽은 듯 말없는 나무들. 하지만 봄은 저 헐벗은 나무들에 윤기를 준다. 잠자는 생명은 기지개를 켜고 저 나무들에 초록옷을 입혀준다.지금은 음력 섣달도 다 저물어 가는 때. 이제 정월은 봄이나 한 가지. 새 생명을 입고 새로 깨어날 저 나무들처럼, 사람도 나무처럼 깨어날 일이다. 나무처럼 깨끗하게, 아름답게 살아갈 일이다.

2014-01-23

대학원 생활 요강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을 반갑게 맞이하면서 이제부터 이곳에서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 제 생각을 말씀 드려보겠습니다.무엇보다, 대학원의 석사 및 박사 과정은 전문적인 연구 능력을 함양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이곳에서의 모든 것은 이 공부, 연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대학원에 일단 들어 왔으므로 이제까지의 과거는 일단 접어두고 학문의 연마를 중심으로 자기 자신을 평가하고 타인과의 관계를 형성해 나가야 합니다.대학원도 물론 하나의 사회입니다. 우리 사회는 지연, 학연, 인연을 중심으로 이합집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저는 대학원만큼은 그런 낡은 관행을 벗고, 공부하는 사람답게 공부를 중심으로 사람 관계를 맺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러면서도 저는 여러분이 자기 자신의 가치와 존재 의미를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이 사회에 나가 직업을 가지고 보수를 받으며 자기 실현을 맛볼 때 그 기회를 반납하고 공부를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비록 월급도 받지 못하고 장학금을 비롯한 지원들도 충분치 못하지만, 여러분이 지금 가고자 하는 길은 이 사회의 유지와 존속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사람들로서 자기 가치를 믿고 자신에 대한 긍지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다음으로 저는 우리가 자기 중심적인 편협성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공부를 해나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기가 읽은 책, 축적한 지식, 쌓아올린 학문세계에 애착을 갖게 되고 그것을 믿고 의지하게 됩니다. 바로 이 때문에 나와 타인의 생각이 다를 때는 타인을 배척하고 자기 세계에 갇히기 쉽습니다.그런데 이런 자아의 편협성이야말로 우리 공부의 의의와 가치를 훼손시키는 독입니다. 우리는 공부하는 사람의 자긍심을 버리지 않되 타인의 생각, 타인의 경험이 나보다 언제나 나을 수 있다는 것, 또 타인과의 대화야말로 우리의 세계를 보편적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신의 가치의식에 충실하되 그것을 바꿔나갈 수 있는 용기와 결단, 개방적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또한, 우리는 우리가 하는 공부가 근본적으로 인간 공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은 사람의 삶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고, 또 근본적으로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 대해 경외감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탐구의 원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저는 우리 대학원생들이 어깨를 움츠리고 있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어깨와 가슴을 펴고도 예의를 지킬 수 있습니다. 대학원 역시 위계질서가 있는 곳임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진리, 진실은 세속적 힘을 상대화시킬 수 있는`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고, 우리 자신의 공부를 창조적으로 만들어 갑시다. 타인에게 관대하고 우리 자신에게 엄정한 사람이 됩시다. 갈등을 내가 먼저 푸는 사람들이 됩시다.여기는 우리가 평생에 걸쳐 이어갈 관계를 쌓는 곳입니다. 서로를 위하며 함께 나아갑시다.지금까지 쓴 것은 제가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몇 년 동안 생각해 온 것들입니다.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그 생활에 임하는 기본적인 태도 같은 것이 필요한데 우리는 그런 것 없이 새 출발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나 학생들이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어떤 지침 같은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어느 곳이나 새로운 시작을 위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겠습니다. 지금은 아직 1월입니다.

2014-01-16

베트남 감상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베트남 호치민이다. 호치민대학에서 주최하는 학술대회,`아시아적 시각에서의 한국문학`에서 발표를 하기로 되어 있다. 베트남은 그럭저럭 다섯번째다. 처음에 베트남에 대한 인상은 알파벳을 쓰고 있다는 데서 오는 충격이었다. 동아시아 나라이고, 한자 문화권의 일부이니만큼 한문은 아니어도 뭔가 다른 문자가 있으려니 했었다. 하지만 베트남은 알파벳으로 문자 생활의 현대화를 이루어냈다.두번째로 인상 깊었던 것은 집들이다. 우선 색상이 다들 파스텔 톤으로 밝고 투명했다. 그리고 더워서 그렇겠지만 벽돌을 한 겹으로 얇게 쌓아 올려서 간단한 축조법을 쓰는 듯했다. 서구적인 느낌이 가미되어 있는 가옥들은 전쟁을 겪은 나라답지 않게 미래가 기약되어 있음을 느끼게 했다.그 다음에는 호치민, 곧 옛 사이공의 선상 유람선이다. 베트남에 처음 왔을 때 사이공 강에서 배를 타고 식사를 하고 베트남 가수의 노래를 들었다. 그때 노래 가사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 전쟁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오자이를 입은 가수의 아름다운 노래와 사이공 강의 바람에 몹시나 취했었다.그후 학교 선생님들, 학생들과 함께 오기도 했고, 박태준 평전이 베트남어로 번역되었을 때 저자인 이대환 선배와 같이 오기도 하고, 포스코 청암재단에서 지원해 주는 `아시아` 잡지 문제로 오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에 왔으니 외국으로서는 여러 번 온 셈이다. 하지만 베트남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베트남어라고는 인삿말 `신차오`밖에 모른다. 베트남문학이라고는 `전기만록`과 `전쟁의 슬픔`과 `쭈옌 끼에우` 밖에 모른다. 베트남 사람이라고는 한국에 유학했던 사람밖에, 평전으로 읽은 호치민밖에 모른다. 이대환이나 김남일이나 방현석 같은 작가 선배들 덕분에 베트남을 이해해야 한다는 의식을 버리지 않고 있을 뿐이고, 이것을 위해서 실제로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없다.이번에 다시 호치민, 옛날의 사이공에 왔다. 그러면 이제 무엇이 보이나?여전히 빛깔이다. 식사를 하러 레스토랑에 들어가 쌀국수 퍼에 월남쌈을 먹는다. 희고 투명하고 녹색 빛깔과 연주황 빛깔의 먹거리들이다. 쌀의 희디흼이 우리나라 국수보다 희고, 푸성귀의 푸르름이 우리나라 상추빛보다 연푸르다. 퍼 국물에 짜넣는 라임의 연노란 푸르름이여. 가로수 화립의 작게 노란 잔주름 간 꽃들이여.가늘디 가는 국수 가닥들이여. 무슨 빛깔이든 물에 풀어 헹궈놓은 것 같은 아오자이의 빛깔들이여. 그 옷감에 휘감긴 국수가닥처럼 가는 베트남 여자들의 기다란 몸매여. 길가에 펴져 있는 작아서 앙증맞은 탁자들, 걸상들이여.이번에도 첫날 저녁은 사이공 강에서의 선상유람선이다. 딤썸에, 닭고기에, 야채에, 베트남식 전골이라고 해야 할까. 이것저것 넣어 끓여 먹는 요리를 마시며 배를 타고 바람에 가볍게 떠밀리듯 어디론가 흘러간다. 배 안에서는 플루트와 기타 연주, 그리고 서양춤이 있고, 마술사가 있다. 나는 요리와 놀이에 취했다 밤하늘의 달을 본다.강위에는 내가 떠가고 밤하늘 강에는 달이 떠간다. 쪽배를 꼭 빼닮은 달이다. 쪽배 달은 기우뚱거리며 물결을 타듯 왼 쪽에서 오른 쪽으로 흘러간다. 물길이 필시 그렇게 나 있는 듯하다. 어라. 달이 높은 빌딩 꼭지에 걸리는 듯하다. 하지만 무사하다. 그 뒤로 사라졌다 다시 모습을 나타낸다.이 베트남에서는 달도 노란빛에 흰빛이 돈다. 희끄무레한 달이다. 물살에 헹궈놓은 달이다.좋은 나라다. 보이는 것들마다 여유가, 풍요로움이 스며 있다. 돈으로 만들지 못할 귀한 습성의 작용이 있다. 이곳에서 역사는 흘러가 덧없고 삶은 떠 있어도 실체적이다.

2014-01-09

산 공부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서울에는 북한산이 있다. 그윽하고도 친절한 산이어서 사람들 누구나 즐겨 찾는 곳이다. 지난 토요일이다. 아침이 되자 나는 문득 그 산에 오르고 싶어졌다. 계란을 삶고, 귤을 두 개 넣고, 커피 전문점에서 원두커피를 사서 마호병에 담았다. 혼자서 가는 산은 그러고보니 몇 년만에 처음이다.북한산은 입구가 많다. 어디서도 오를 수 있고 올라가서 여러 갈래를 치며 그전과 다른 출구로 옮겨갈 수 있다.구기터널 앞에 이북5도청 가는 쪽에서 산을 타기 시작했다. 이 길이 내게 가장 익숙한 여정이다. 바로 며칠 전에도 큰 선배님과 함께 이 루트로 올라가 대남문 지나 대성문 지나 정릉 방면으로 내려 왔다.왜 며칠 사이에 다시 산에 왔나. 내게 좀처럼 없던 일이다. 남에게 이끌려 산을 오를지언정 내 뜻으로 올라본 적 별로 없다.그런데 뭔가 변하고 있다. 마음 속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내 발로 혼자 산에 오르겠다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인 것이다.겨울 북한산은 눈이 얕게 깔렸다. 오래 전에 내린 눈이 녹을 데는 녹고 응달 진 곳, 패인 곳에는 쌓여 있고 녹은 것이 얼어 자못 미끄럽다. 하지만 아이젠 없이도 오를 만은 하다.사람 몸은 참 간사해서 금방 숨이 차오른다. 어디를 얼마나 올랐다고 쉬어가자 한다. 한 중년의 사내가 저 앞에서 한 발 한 발 산길을 꼭꼭 눌러 밟듯이 걷고 있다. 저 이는 어디서 쉴 것 같지 않다. 그냥 저렇게 자기 갈 데까지 갈 것 같다.산사람들이 올라가고 내려오고 나면 이야기 소리, 웃음 소리도 산나무 뒷편으로 사라지고 곧 산의 고요가 찾아든다.나는 바위 위에 깔려 있는 눈을 본다. 나뭇잎을 다 벗어버린 나무들을 본다. 얼음 박힌 돌길을 본다. 산이다. 세상은 이 순간 내게서 조금 멀어져 있다.갈림길이 나타난다. 한 쪽은 대남문 가는 방향이요, 다른 한 쪽은 승가사 가는 방향이다. 사람은 가끔 낯선 곳, 가지 않은 곳에 가고 싶다. 그러면 오늘은 승가사 쪽이다.절로 올라가는 길은 조븟한 계곡길이다. 작은 시내를 따라 돌길을 밟아 올라간다. 바위가 먼 옛날에 두 동강이 나 서로로부터 떨어졌다. 그 사잇길을 통과해서 사람손을 타는 나뭇가지를 잡고 미끄러운 돌을 꾹꾹 천천히 밟으면서 위로 위로 올라간다.이 길은 좁은 만큼 사람이 더 없다. 더 한가하고 더 고적하다. 오늘 이쪽으로는 사람이 많지 않다.돌이켜 보면 숨가쁘게 달려왔다.왜 그렇게 살았을까. 내게 주어졌던 시간들을 어느 구덩이에다 철푸덕 쏟아버린 것 같다. 이제 여유 있게 쓸 수 있는 시간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많이 아껴 써야 할 것 같다. 붙잡아 놓을 수는 없으니까 조금씩 쓰는 방법을 고안해야 할 것 같다.시냇물이 얼어 있다. 두껍게 언 곳도 얇게 언 곳도 있다. 물이 돌 사이로 흘러 떨어지는 곳은 얼지 않았다. 맑은 시냇물이 앙증맞은 파문을 만들며 흘러 내린다.몸에 훈기가 돈다. 숨이 차오르는 때를 지나 바야흐로 내 몸은 세컨드 윈드다. 평화로운 고원이다. 힘든 등성이 지나 저 곳이 멀지 않았다. 장갑을 벗어본다. 싸늘한 산 공기가 손에 와 닿는 감촉이 새롭다. 손으로 휘저으면 거머쥘 수도 있을 것 같다. 깨끗한 산공기가 머릿속으로 스며든다. 만성 두통을 이 순간 잠시 잊어버렸다.적당한 바위를 골라 걸터 앉아 본다. 오래 걸은 끝의 휴식이 달디달다.이제는 산에 오르며 살아야겠다. 그리고 올라가면 내려가야겠다. 세상은 잊혀지기도 해야겠고, 내가 나만을 응시하기도 해야겠다. 새해가 되면 새 나를 낳고, 그리고 그 나조차 잊기도 해야겠다. 산 공부다. 산 마음 공부다.

2014-01-02

이상한 클로즈업 시대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지난 토요일에는 작은 송년회가 있었다. 학교 선생 세 사람과 신문사 논설위원 한 사람, 그리고 여성 시인 한 사람이 어느 복집에 모여 앉은 것이다. 오래 친분을 쌓아온 사람끼리 그냥 `번개`를 하다시피 만난 것이었다. 복어 요리는 코스였고, 오래된 집이라서 맛도 아주 좋았다. 우리는 막걸리와 청주를 마시며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화제 삼았다. 자리가 좋았으므로 우리는 서로를 격려하며 좋은 밤을 보냈다.올해는 시대도 몹시 가팔랐다. 급한 여울목을 여럿 돌고 돌아가는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그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필자는 필자 나름대로 인생의 중요한 시간들을 보냈다고 생각했다. 3월에 논문을 의무로 써야 하는 입장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논문, 비평, 번역, 소설을 포함해 줄잡아 5천매를 썼다. 숨가쁜 나날이었다. 그러고 난 다음날 아침이다. 늦게 일어나 염상섭 장편소설을 펼치다 말고 텔레비전을 켰다. 밤새 세상이 어떻게 되었는지 살펴보자는 것이다.그런데 세상은 편안하지 않다. 바야흐로 텔레비전의 모든 뉴스 전문 채널들이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빌딩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중계하고 있다. 뉴스Y도, MBN도, YTN도, 그 밖의 채널도 경향신문사 현관에 중계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다. 그러면서 각 채널마다 정치평론가들, 교수들, 연구원들, 언론사 기자들을 불러들여 테이블에 올려 앉혀 놓았다. 입장이 강한 몇몇 채널은 자신들이 선호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철도파업을 진단하는 말을 하도록 했다. 메가폰 기능을 맡겨놓은 것이다.서울 정동이라면 필자가 살고 있는 곳에서 택시로 십오 분 거리다. 경향신문사에는 필자도 알고 있는 문학 담당 기자도 일하고 있고, 거기서 버스로 몇 정거장만 가면 광화문 교보문고가 나온다. 경향신문사 빌딩에서 시작되는 정동길은 이문세 노래 `광화문 연가`에 나오는 덕수궁 돌담길로 이어진다. 정동극장 같은 문화 기관, 단체들이 들어선 곳, 서울에서 가장 운치 있는 거리 가운데 하나다.하지만 그 곳이 경찰병력 5천명, 민주노총원과 시민 600명이 모여서 발 디딜 틈이 없다. 텔레비전 속에서는 지금 금방 경향신문사 현관 유리문이 중부소방서 소방관들에 의해 깨져 내렸다. 현장을 중계하는 카메라들이 일제히 부서지는 문을 클로즈업한다. 방송사에서 뉴스를 진행하던 여성 앵커가 놀람이 섞인 목소리로 문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을 알린다.경찰병력 네 명이 노조원 사지를 하나씩 떠메 들고 나가는 가운데 나머지 현관문을 열고 막으려는 몸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열린 문으로 들어간 경찰병력과 노조원들이 서로 밀고 밀리는 통에 현관 유리문이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터져 나올 것 같다. 아나운서는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린다고 전한다.이제 현관문이 다 열렸다. 경찰병력들이 “천천히”를 외치는 가운데 건물 안쪽으로 꾸역꾸역 밀고 들어간다.나는 오늘이 며칠이지? 하고 생각해 본다. 12월 하고도 22일이다. 올 한 해가 열흘도 남지 않은 시간이다.카메라들은 오늘 한국 방송사상 전례 없는 현장 중계를 하고 있다. 화면 가득 사람들의 치열한 움직임이 잡히고 외치는 소리, 명령소리,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바야흐로 클로즈업 시대다. 경찰병력과 노조원들의 밀고 밀리는 현장을 이토록 길게, 이토록 가까이서 보여준 적이 있던가. `롱 테이크`의 클로즈 업 시대다. 하지만 아무리 클로즈 업 해도 진실은 드러나지 않는다.한 종편 채널이 메가폰들을 동원해 열심히 분석, 평가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은 아니다. 북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숙청이 한창인데, 여기서는 지금 무슨 일이 전개되고 있는 것일까. 막 경향신문사 기자에게 답신이 왔다.“오늘 마침 휴무인데 가봐야 할 듯합니다. 주말에 들어올 거라 예상은 했지만 참 힘든 시대 맞습니다. ㅠ”

2013-12-26

저 비범한 잔인함이여

▲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JST는 그렇게 세상에서 덧없이 사라졌다. 나는 오로지 텔레비전 화면만으로 이 사태의 진행과정을 엿볼 수 있을 뿐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그의 실각설이 흘러나왔다. 사실이라고도 하고 사실이 아니라고도 했다. 확인할 수 없다고도 했다. 며칠 사이에 텔레비전 화면에는 대규모 회의석상에서 보위부원들에 의해 끌려가는 그의 모습이 나타났다. 한 컷인지 두 컷인지 모르는 그 사진은 그의 몰락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이 곧바로 죽음으로 직결될 것이라고는 쉽사리 예측할 수 없었다. 그는 수령의 고모부요, 그 수령은 아직 서른 살도 못 된 애송이요, 이 수령을 움직이는 집단의 힘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던 까닭이다.이때까지도 나는 아직 방심하고 있었다. 모든 잔인한 독재세력은 언제나 보통 사람의 상상력을 초월해 나간다는 사실을 나는 잠시 잊고 있었다.사태는 신속하게 쉽게 예상치 못한 수준으로 이월해 갔다. 수령과 그의 동지들은 인민들을 동원해서 텔레비전 화면 앞에 세워서는 그를 전기로에 처넣어 버리고 싶다고 말하도록 했다. 살의가 인민의 것이 되도록 함으로써 더러운 그가 죽어야만 사태가 일단락될 것임을 명확히 한 것이다. 그의 야욕과 음모와 부패를 화면에 띄워 올리는 한편, 원시적인 신경망처럼 조직된 권력 메커니즘을 작동시켜 대중의 살의를 확산시켜 나갔다. 그들이 결정하면 인민은 살의를 품어야 했다.혁명 가계의 혈통을 이어받은 수령은 역시 비범했다. 그를 체포하는 즉시 단 한 번뿐인 군사재판에 회부해서는 스스로 자신의 죄행을 100프로 인정하도록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백에 근거하여 그를 처형대에 올려 버렸다. 그것도 재판 즉시 처형대로 보내 공포가 인민들 모두에게 신속하고도 광범위하게 확산되도록 했다. 살의는 곧바로 공포와 함께 어울렸다. 공포의 조성을 위해 수령의 선전 기술자는 처형 사실을 알리는 마지막 사진 한 장을 텔레비전 화면에 흘려보냈다. 그 사진 속에서 JST는 오랏줄에 손이 묶인 채 박두한 죽음 앞에 서 있었다.그는 기관총으로 살해되었다고도 하고 화염방사기로 불쏘시개가 되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아직은 미확인 소식통들이다. 그러나 분명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보여줄 수만 있으면 처형 장면을 내보내는 일도 서슴지 않을 테니까. 이미 공개처형을 일상화시킨 그분들이시다. 다만 인민이 동정심을 발동시키지 못하도록 강약을 조절하는 기술을 발휘했을 뿐이다.이렇게 해서 수령은 자신의 비범한 결단력을 만천하에 떨쳤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바야흐로 시작된 대 드라마의 서곡일 뿐임을 의심치 않는다. JST를 처형한 것과 똑같은 방식의 몰락이 처형을 실시한 이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루마니아의 차우세스코는 부부가 함께 빗발치는 총탄을 맞고 허수아비들처럼 쓰러졌다. 이라크의 후세인은 그를 증오한 이들에 의해 목에 올가미가 씌워졌다. 가다피 또한 비참한 최후를 면치 못했다. 이 `빛나는` 혁명가들은 그들이 조직한 인민의 증오와 살의에 의해 최후의 순간을 맞이했다.이 점에서 저 백두혈통의 혁명 가계는 신통방통하기만 하다. 자기 대에 맞이할 운명을 손자 대에까지 지연시키는 저 초인적 능력들을 보라. 남을 죽임으로써 자기는 살고 자신들의 치세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저 권력자들의 어리석음이여. 한없는 어리석음이여. 자신이 살아서 힘을 쥐고 있으면 그밖에는 아무 것도 더 구하지 않는 저 메마른 인간성이여, 저 비범한 잔인함이여. 그대들의 외관이 아무리 호화로워도 추악한 본색은 감출 수 없으리라.

2013-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