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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살라

등록일 2014-01-23 02:01 게재일 2014-01-23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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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과

겨울이 깊어 서울은 눈도 내리고 기온은 영하 10도까지도 내려간다.

새벽에 길을 나서면 몸이 더 춥다. 산나무들도 다들 추울 것이다. 잎사귀를 다 떨어뜨리고 오로지 줄기와 가지만으로 묵묵히들 서 있는 나무, 나무들.

푸르스름한 새벽빛 속에 말없이 서 있는 나무들은, 사람에게, 저와 같이 살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나무처럼 살라.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말이냐.

나무는 남을 먹지 않고 스스로 먹이를 만들어 살아간다. 뿌리로부터 무기물을 흡수해서 양분을 만든다. 햇빛을 받아 광합성으로 삶을 이어갈 에너지를 창조한다.

사람 또한 모름지기 스스로 만들어 살아갈 일이다. 남을 해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위한 먹이며 재화를 만들어갈 일이다.

나무는 또 향상하는 마음이 있다. 위를 향해 뻗어나가는 저 나무들과 같이 사람도 자신의 자아를 고양시켜 나가며 위를 향해, 위를 향해 살아갈 일이다.

또 나무는 제가 뻗어가고픈 곳이면 어디로든 가지를 내뻗는 자유를 품고 있다. 그가 움켜쥐는 허공이 그대로 그 나무의 영토가 된다.

그러면 사람도 자기가 하고 싶은 일, 말하고 행동하고 싶은 것을 행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어느 영화를 보았다. 세 아들 중 하나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예의를 지키며 할 말을 하지 않느니 예의를 지키지 않겠습니다. 이런 사람의 말과 행동은 귀하고 자유롭다.

나무는 또 저마다 서로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혼자 살아간다. 그 나무 어느 것도 다른 나무의 삶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우리도 그와 같이 서로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갈 일이다. 자기 삶의 범위를 지키며 남의 삶의 방식을 논단하지 않으며 나는 나대로 살겠다. 당신은 당신대로 살라. 햇볕을 쬐고 싶소. 조금 몸을 비켜주지 않겠소?

존 스튜어트 밀의`자유론`을 보면 사람이 누려야 할 자유가 몇 번에 걸쳐 나무에 비유되고 있음을 본다. 밀보다 후대 사람인 오스카 와일드에게서도 초목에 관한 비유를 읽은 기억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요절한 작가 이효석이 그런 사유들과 공명하고 있었다.

그의 소설 중에 아주 짧은 `산`이라는 게 있다. 지주 집에서 머슴 살던 중실이라는 인물의 이야기다. 그는 주인인 김영감의 첩을 건드렸다는 오해를 받고 쫓겨난다. 7년만의 일이다.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하나? 여느 사람 같으면 우선 다른 머슴집을 찾아볼 일이요, 다음으로 촌에서 떠나 도시를 찾아갈 일이다.

하지만 중실은 이 둘 중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는다. 그는 대신에 산에 들어가 산다. 산에서 잠자리를 찾고 먹을 것을 찾는다. 소금이나 구하러 산아래로 내려갈 뿐 그는 이제 산을 집 삼아 살아간다. 산을 집 삼아 살아가는 것은 나무, 그는 낙엽을 잠자리 삼아 별을 헤면서 살아간다. 산에는 나무들, 나무들. 나무들 속에서 그는 나무가 되는 것 같다.

두 발은 뿌리요, 두 팔은 가지다. 살을 베면 피 대신 나무 진이 흐를 것 같다.

`산`은 읽는이들에게 산위와 산아래를 구별하게 산다. 산위, 나무들 세상은`자연`이요, 산아래 사람들 세상은`사회`다.

이제 사람도`자연`처럼, 나무처럼 살아갈 일이다.

겨울이 깊었으니 이제 봄이 가까웠다. 마치 죽은 듯 말없는 나무들. 하지만 봄은 저 헐벗은 나무들에 윤기를 준다. 잠자는 생명은 기지개를 켜고 저 나무들에 초록옷을 입혀준다.

지금은 음력 섣달도 다 저물어 가는 때. 이제 정월은 봄이나 한 가지. 새 생명을 입고 새로 깨어날 저 나무들처럼, 사람도 나무처럼 깨어날 일이다. 나무처럼 깨끗하게, 아름답게 살아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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