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물었다. 한국 문학의 문제점이 무엇이냐고. 나는 잠시 생각했다. 문제를 하나부터 열까지 낱낱이 세서 말할 수도 있고 단 한 가지만 들어 말할 수도 있다. 둘 다 가능하고 나쁘지 않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는 후자의 방법을 취해 본다. 언젠가부터 나는 이런 본질주의를 싫어하게 되었지만.
도무지 사상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사상이라고 말하면 또 다들 깜짝 놀랄 수도 있다. 그러니까 그건 좌익 사상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냐고 말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단 하나의 사상을 말하는 게 아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1945년 해방 때로 돌아가는 회상력이 중요하다. 그때 사상은 오로지 단 두 가지만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두 가지 사상은 각기 자기 존립의 절대성을 주장했으므로 그때 사람들 각자가 주장한 것은 오로지 한 개의 사상밖에 없었다. 내가 보기에 바로 이 상황이 부조리한 것이었다. 남북한에 각기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북한의 침공으로 전쟁이 벌어지고 휴전이 성립하자, 남과 북에는 바로 그 단 하나의 사상들이 지배권을 가졌다.
그러나 사상이란 것이 본디 우주와 사물과 인간을 보는 각도의 차이들에서 저마다 각기 다르게 개진되는 것이라면, 그 사상은 많고도 그 많은 것이 각기 깊어야 좋지 않겠는가?
하지만 우리 역사와 현실은 이 다양성과 깊이를 장려하지 못했다. 이것이 아니라면, 그럼 저것이란 말이냐고 으름짱 놓기 바빴다. 대립하는 두 극단을 상정하고 이항대립과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사회는 깊어질 수 없다. 자기 사상에 대한 성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남쪽은 북쪽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유를 누렸다. 저것만 아니라면 다른 사상이야 얼마든지 추구해도 좋다는 허락이 있었다. 그러나 양 극점의 자장이 워낙 강했던 탓에 다른 사상들은 마치 이 두 극점을 잇는 직선상의 어느 지점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은 착시 현상이 작용했다. 이 효과 탓에 사상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개성과 가치를 충분히 발양시키지 못했다.
예를 들면 농본주의는 어떨까. 나는 가끔 농본주의야말로 현대인들이 잊어서는 안되는 귀중한 뿌리의 사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광수가 장편소설`흙`을 썼을 때, 그 주인공 허숭은 농촌을 계몽하기 위해 고향 살여울로 간 것만은 아니다. 이 소설을 다시 읽으면 허숭의 선택의 배경에 작용하고 있는 당대의 농본주의의 흐름을 포착할 수 있다.
이 농본주의는 지금 퇴행적, 복고적 사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이 사상이 우리 사회에서 면면한 흐름을 형성하면서 자기 진화하는데 미흡한 점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또 나는 세계시민주의 같은 것은 어떻겠느냐고 생각한다. 아니면 반대로 지독한 개체주의 같은 것을 밀고 나가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예술지상주의의 21세기판 같은 것은, 무정부주의의 최신판은, 환상에 매달려 보는 것은, 우주론적 통찰을 현대 물리학의 가르침에 연결지어 풀어보는 것은 어떻겠는가, 하고 생각한다. 영원한 여행자의 사상을 구축하는 방랑의 문학가는 없어도 되는가, 왜 이 문학은 지금 사상의 강도와 열도가 이리도 약하단 말이냐. 이러고도 세계의 문학이라 할 것이냐.
이렇게 쓰고 있으니 최인훈이며, 박상륭이며, 이청준 같은 작가들의 이름이 불현듯 그리워진다. 그대들이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들이 그립답니다.
작가들아. 자기만의 사상의 싹을 키우라. 젊을수록 더 고독한 사상을 준비하라. 소외된 음지의 작가일수록 그 그늘을 녹일 사상을 만들라.
이것이 바야흐로 남북의 문이 열리고, 통일을 대비하는 시대를 위해 작가들이 쌓아가야 할 자기만의 몫이다.지금 한국문학은 지성을 회복해야 할 때를 맞았다.
밤에 좀더 많은 책을. 술잔 대신 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