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1968년 얘기를 지금 재론하는 것은 과거에 머무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가 자유에 관한 것이라면 경우가 달라진다고도 할 수 있다.
그때 이어령과 김수영 사이에 이른바 불온시 논쟁이 있었다. 수십 년만에 다시 들여다본 불온시 논쟁은 그 당사자들이 무엇을 염려하고 있었는지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그때 김수영은 자기한테 써놓지 않고 발표하지 않고 있는 시가 여럿 있노라고 했고, 또 신춘문예에 응모해 온 불온시 같은 것도 발표되어야 우리 사회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령은 문제틀을 바꾸어, 당신의 그 서랍속에 들어 있는 불온시를 좀 내놓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써놓고 발표하지도 못하는 시라면 위대한 문학이 될 수 없으며, 지금(그러니까 당대의) 문학의 부진 상태는 정치적 부자유보다도 문학인들의 창작의식의 결핍 탓이라고 했다.
김수영이야 그때 바야흐로 참여문학의 대변인 격으로 `승격되고` 있었던 형편이었기에, 이어령은 그를 향해 당신은 정치적 문학, 정치적 환경이나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문학을 하자는 것이 아니냐, 그런 류의 문학이 한국문학을 위대하게 만들어 줄 수는 없었던 것이 아니냐고 힐난한 것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의 근저에는 당신의 그 참여문학의 배후에는 일종의 사회주의를 향한 은밀한 지향 같은 게 숨어 있는 게 아니냐는 비난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면 문제는 이제 김수영이다. 논쟁 과정을 들여다보면 김수영은 아주 쩔쩔 맸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좌익 사회주의자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전위문학이니, 실험문학이니 하는 말을 도입해 가며 이어령의 비난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시도해마지 않았다.
그리고 이 논쟁의 여운이 가시지도 못한 상황에서 김수영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김수영은 참여문학의 희생자가 되고, 그로써 일각으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그의 이른바 온몸시론, “시여 침을 뱉어라”는 시인이라면, 문학인이라면 몸부림을 쳐서라도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 같은 그릇된 후광에 감싸여 오늘에까지 왔다.
그러나 그가 죽음에 다다랐을 무렵, 그는 공산권에서의 문학인의 좌절을 다룬 글을 쓰고 남기고 있다. 소련 사회주의 체제 아래서 `닥터 지바고`의 파르테르나크를 비롯한 문학인들이 어떻게 좌절했으며, 쓰고도 서랍 속에 넣어두어야 할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느냐는, 그 경위를 설명하는 글이었다.
이 글에 그러니까 써놓고 발표하지 못하는 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를 이른바 불온시 논쟁에 연결지어 보면, 김수영은 당시 한국에서의 자유의 문제를 소련에서의 자유의 문제에 비추어서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때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김수영은 “자유의 이행”, 즉 어떤 두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즉각, 더 많은 자유가 필요하다고 쓸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기실은 더 많은 자유라기보다는, 절대적인 자유에 대한 요청이었으니, 말하고 쓸 수 있는 자유가, 절대적으로 주어져야 함을 김수영은 주장하고 싶어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생각은 공상적인 것일까? 또는 이 절대적 자유는 그것을 허용한 사회를 위태롭게 만드는 것일까?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사실 이어령이 주장했듯이 이 땅에서 위대한 문학이 출현하지 못한 것은 자유의 결핍 때문은 아닌지도 모른다. 소련에서는 솔제니친이며 파스체르나크가 나오지 않았던가.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구가할 수 있는 자유의 총량, 또는 그 허용치가 얼마냐 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두통거리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떤 불합리한 체제의 존재를 명분 삼아 자유의 크기를 제한하는 논법은 이미 낡았고 설득력이 부족해졌는지도 알 수 없다. 자유를 이행하라. 이것은 어떤 문학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 공동의 인식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