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ST는 그렇게 세상에서 덧없이 사라졌다. 나는 오로지 텔레비전 화면만으로 이 사태의 진행과정을 엿볼 수 있을 뿐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그의 실각설이 흘러나왔다. 사실이라고도 하고 사실이 아니라고도 했다. 확인할 수 없다고도 했다.
며칠 사이에 텔레비전 화면에는 대규모 회의석상에서 보위부원들에 의해 끌려가는 그의 모습이 나타났다. 한 컷인지 두 컷인지 모르는 그 사진은 그의 몰락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이 곧바로 죽음으로 직결될 것이라고는 쉽사리 예측할 수 없었다. 그는 수령의 고모부요, 그 수령은 아직 서른 살도 못 된 애송이요, 이 수령을 움직이는 집단의 힘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던 까닭이다.
이때까지도 나는 아직 방심하고 있었다. 모든 잔인한 독재세력은 언제나 보통 사람의 상상력을 초월해 나간다는 사실을 나는 잠시 잊고 있었다.
사태는 신속하게 쉽게 예상치 못한 수준으로 이월해 갔다. 수령과 그의 동지들은 인민들을 동원해서 텔레비전 화면 앞에 세워서는 그를 전기로에 처넣어 버리고 싶다고 말하도록 했다. 살의가 인민의 것이 되도록 함으로써 더러운 그가 죽어야만 사태가 일단락될 것임을 명확히 한 것이다. 그의 야욕과 음모와 부패를 화면에 띄워 올리는 한편, 원시적인 신경망처럼 조직된 권력 메커니즘을 작동시켜 대중의 살의를 확산시켜 나갔다. 그들이 결정하면 인민은 살의를 품어야 했다.
혁명 가계의 혈통을 이어받은 수령은 역시 비범했다. 그를 체포하는 즉시 단 한 번뿐인 군사재판에 회부해서는 스스로 자신의 죄행을 100프로 인정하도록 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백에 근거하여 그를 처형대에 올려 버렸다. 그것도 재판 즉시 처형대로 보내 공포가 인민들 모두에게 신속하고도 광범위하게 확산되도록 했다. 살의는 곧바로 공포와 함께 어울렸다. 공포의 조성을 위해 수령의 선전 기술자는 처형 사실을 알리는 마지막 사진 한 장을 텔레비전 화면에 흘려보냈다. 그 사진 속에서 JST는 오랏줄에 손이 묶인 채 박두한 죽음 앞에 서 있었다.
그는 기관총으로 살해되었다고도 하고 화염방사기로 불쏘시개가 되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아직은 미확인 소식통들이다. 그러나 분명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보여줄 수만 있으면 처형 장면을 내보내는 일도 서슴지 않을 테니까. 이미 공개처형을 일상화시킨 그분들이시다. 다만 인민이 동정심을 발동시키지 못하도록 강약을 조절하는 기술을 발휘했을 뿐이다.
이렇게 해서 수령은 자신의 비범한 결단력을 만천하에 떨쳤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바야흐로 시작된 대 드라마의 서곡일 뿐임을 의심치 않는다. JST를 처형한 것과 똑같은 방식의 몰락이 처형을 실시한 이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코는 부부가 함께 빗발치는 총탄을 맞고 허수아비들처럼 쓰러졌다. 이라크의 후세인은 그를 증오한 이들에 의해 목에 올가미가 씌워졌다. 가다피 또한 비참한 최후를 면치 못했다. 이 `빛나는` 혁명가들은 그들이 조직한 인민의 증오와 살의에 의해 최후의 순간을 맞이했다.
이 점에서 저 백두혈통의 혁명 가계는 신통방통하기만 하다. 자기 대에 맞이할 운명을 손자 대에까지 지연시키는 저 초인적 능력들을 보라. 남을 죽임으로써 자기는 살고 자신들의 치세는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저 권력자들의 어리석음이여. 한없는 어리석음이여. 자신이 살아서 힘을 쥐고 있으면 그밖에는 아무 것도 더 구하지 않는 저 메마른 인간성이여, 저 비범한 잔인함이여. 그대들의 외관이 아무리 호화로워도 추악한 본색은 감출 수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