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는 참 귀찮은 존재다. 태양 아래서 살고자 하는 한 떼어버릴 수가 없다. 어둠 속으로, 캄캄한 곳으로 들어가면 없어진 것 같다. 없애버리는데 성공한 것도 같다. 그런데 아니다. 형체를 없애버린 줄 알았는데, 버젓이 살아나서는 자기와 꼭 붙어서 돌아다닌다.
인식의 그림자도 그와 같은 것이라 생각된다. 이제 나는 새 사람이다, 하고 마음 속으로 선언하고, 새 사람이 품을 법한 생각이나 하려 하는데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내가 품어온 생각의 그림자 때문이다. 어제까지 품어온 생각을 버리는 일은 뼈속에 든 인을 파내는 것처럼이나 불가능에 가깝다. 나는 지난 삼십 년 동안 단 두 번 생각을 바꾸려고 애쓴 적이 있다. 한 번은 실존주의를 버리고 `공동체` 사상을 받아들이고자 한 때다. 막 대학에 들어와서 시작된 이 과정은 대학생활 내내 계속되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독하다는 게 실존주의의 대체적 가설일 것이다. 인간은 저마다 고독한 존재로 태어나며, 태어나자마자 자기 아닌 타인들에 둘러싸이게 되고, 이런 실존적 상황을 자기 투기 또는 기투로써 헤쳐나가게 된다는, 고독한 자유의 합리화가 바로 실존주의 계통의 철학일 것이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나는 인간의 존재 조건으로서의 사회성이라는 명제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적 동물이 되었어야 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자족적인 완전한 존재로서의 개인이란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가 고등학생 때 심취해 있던 실존주의를 기각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이런 생각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주 힘들었다. 이미 자족적인 존재처럼 성장해 버린`나`의 완전한 고독 대신에 거추장스러운 사회성을 승인하고 그에 따른 도덕적, 정치적 의무를 짊어져야 하는 삶의 변화를 끌어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나는 해냈다. 지극히 불철저했고 비논리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간의 사회성을 승인하는 쪽으로 움직였고, 그러한 인식 아래 내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문제들을 회피하지 않고 상대해 보려 했다.
하지만, 대학을 나와 대학원에 진학할 때쯤 나는 새로운 변화를 요구받았다. 그것은 내가 짊어지려 애써온 인간의 사회성에 대한 새로운 의문 때문이었다. 과연 `나`라는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명제 수용이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 사회성을 고도로 강조하던 1980년대의 시대적 추세가 썰물이 되자, 나는 다시 한 번 자기 삶의 주역으로서의`나`라는 문제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나는 `완전한` 나로 돌아오지 못했다. 사회적인 존재로서의`나`라는 과거의 인식이 완전히 새로운 생각으로 옮겨가고자 하는 내 자신의 의지를 시험하며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던 것이다. 그래도 변화는 어떻게든 있었다. 나는 다시 새로워졌다.
그렇다. 내 사유의 궤적으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새로운 인식, 의식을 갖는 일은 불가능하다 해도 좋다. 그러나 나는,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인식의 그림자를 버리고 자유롭고자 하는 노력이 언제나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한 태도를 가리켜 옛 시인 김수영은, 시란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 했다. 그냥 새로운 생각에 바탕해서 시를 쓰라고 하지 않고 온몸으로 밀고 나가라 한 것은 과거와의 단절 의지를 그만큼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자신의 과거의 그림자를 떼어버리고 새로운 땅위에서 새로운 문학을 하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나는 요즘 우리 사회가 지식인들, 시민들에게 새로운 생각을 요청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동북아시아가 숨가쁘게 변모해가고 있다. 우리들 삶의 토대도 격변중이다. 만물을 새로운 눈으로 보라. 과거의 인식의 그림자를 버리고. 그래야 새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