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호치민이다. 호치민대학에서 주최하는 학술대회,`아시아적 시각에서의 한국문학`에서 발표를 하기로 되어 있다.
베트남은 그럭저럭 다섯번째다. 처음에 베트남에 대한 인상은 알파벳을 쓰고 있다는 데서 오는 충격이었다. 동아시아 나라이고, 한자 문화권의 일부이니만큼 한문은 아니어도 뭔가 다른 문자가 있으려니 했었다. 하지만 베트남은 알파벳으로 문자 생활의 현대화를 이루어냈다.
두번째로 인상 깊었던 것은 집들이다. 우선 색상이 다들 파스텔 톤으로 밝고 투명했다. 그리고 더워서 그렇겠지만 벽돌을 한 겹으로 얇게 쌓아 올려서 간단한 축조법을 쓰는 듯했다. 서구적인 느낌이 가미되어 있는 가옥들은 전쟁을 겪은 나라답지 않게 미래가 기약되어 있음을 느끼게 했다.
그 다음에는 호치민, 곧 옛 사이공의 선상 유람선이다. 베트남에 처음 왔을 때 사이공 강에서 배를 타고 식사를 하고 베트남 가수의 노래를 들었다. 그때 노래 가사에 대한 설명을 들었는데, 전쟁에 나가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오자이를 입은 가수의 아름다운 노래와 사이공 강의 바람에 몹시나 취했었다.
그후 학교 선생님들, 학생들과 함께 오기도 했고, 박태준 평전이 베트남어로 번역되었을 때 저자인 이대환 선배와 같이 오기도 하고, 포스코 청암재단에서 지원해 주는 `아시아` 잡지 문제로 오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에 왔으니 외국으로서는 여러 번 온 셈이다. 하지만 베트남을 안다고 할 수 없다. 베트남어라고는 인삿말 `신차오`밖에 모른다. 베트남문학이라고는 `전기만록`과 `전쟁의 슬픔`과 `쭈옌 끼에우` 밖에 모른다. 베트남 사람이라고는 한국에 유학했던 사람밖에, 평전으로 읽은 호치민밖에 모른다. 이대환이나 김남일이나 방현석 같은 작가 선배들 덕분에 베트남을 이해해야 한다는 의식을 버리지 않고 있을 뿐이고, 이것을 위해서 실제로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없다.
이번에 다시 호치민, 옛날의 사이공에 왔다. 그러면 이제 무엇이 보이나?
여전히 빛깔이다. 식사를 하러 레스토랑에 들어가 쌀국수 퍼에 월남쌈을 먹는다. 희고 투명하고 녹색 빛깔과 연주황 빛깔의 먹거리들이다. 쌀의 희디흼이 우리나라 국수보다 희고, 푸성귀의 푸르름이 우리나라 상추빛보다 연푸르다. 퍼 국물에 짜넣는 라임의 연노란 푸르름이여. 가로수 화립의 작게 노란 잔주름 간 꽃들이여.
가늘디 가는 국수 가닥들이여. 무슨 빛깔이든 물에 풀어 헹궈놓은 것 같은 아오자이의 빛깔들이여. 그 옷감에 휘감긴 국수가닥처럼 가는 베트남 여자들의 기다란 몸매여. 길가에 펴져 있는 작아서 앙증맞은 탁자들, 걸상들이여.
이번에도 첫날 저녁은 사이공 강에서의 선상유람선이다. 딤썸에, 닭고기에, 야채에, 베트남식 전골이라고 해야 할까. 이것저것 넣어 끓여 먹는 요리를 마시며 배를 타고 바람에 가볍게 떠밀리듯 어디론가 흘러간다. 배 안에서는 플루트와 기타 연주, 그리고 서양춤이 있고, 마술사가 있다. 나는 요리와 놀이에 취했다 밤하늘의 달을 본다.
강위에는 내가 떠가고 밤하늘 강에는 달이 떠간다. 쪽배를 꼭 빼닮은 달이다. 쪽배 달은 기우뚱거리며 물결을 타듯 왼 쪽에서 오른 쪽으로 흘러간다. 물길이 필시 그렇게 나 있는 듯하다. 어라. 달이 높은 빌딩 꼭지에 걸리는 듯하다. 하지만 무사하다. 그 뒤로 사라졌다 다시 모습을 나타낸다.
이 베트남에서는 달도 노란빛에 흰빛이 돈다. 희끄무레한 달이다. 물살에 헹궈놓은 달이다.
좋은 나라다. 보이는 것들마다 여유가, 풍요로움이 스며 있다. 돈으로 만들지 못할 귀한 습성의 작용이 있다. 이곳에서 역사는 흘러가 덧없고 삶은 떠 있어도 실체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