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내려오면서 우리는 요즘 젊은이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대 청년들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뜨거운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대화는 갑자기 음성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식들 얘기를 한다. 대학을 대학 같지도 않은 곳에 보내려니 보람이 안 느껴진다는 것인데, 그것도 등록금을 자기가 대주지 못하고 아내가 벌어 대는 형편이라 도대체 말발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런 대학을 가느니 차라리 일찍 공무원 될 수 있는 길을 찾아보라 해도 아들도 안 듣고 아내는 언제나 아들 편이라는 것이다. 요즘 대학 등록금이 말이 아니기 때문에 집안에 대학생 하나 나오면 허리가 부러질 지경이고 보면, 이름값 없는 대학 다니는 것보다 실속 있는 직업을 찾아보는 게 현명한 일인 것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산행은 남자들의 등산이 으레 그렇듯이 막걸리집으로 이어졌다.
또 한 사람이 젊은이들 삶의 풍경을 날카롭게 진단하기 시작한다. 자기가 생각하건대 진짜 문제는 공부 잘 못하는 그 아들이 아니라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하게 성장해서는 공부도 적당히 잘해서 대학에 가고, 또 거기서 어떻게든 사회에 성공적으로 진입하는 길을 택해서 사회의 중간 관리계층으로 편입되는 청년들이 더 문제라는 것이다.
왜냐. 예나 지금이나 마름이 더 무섭고 끔찍스러운 법인데 요즘 그런 친구들은 자기 생각을 계발하도록 인도되기보다는 주어진 사회체제에 적당히, 아니, 어떻게든 적응하도록만 길러지는 까닭에 정의나 부정의에 대한 감각도 결핍되기 쉽고,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이 정상적인 것, 표준적인 것,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여기면서, 타인들에 대한 관심은 희박해져버린다는 것이다.
결과는? 이제 그런 청년들이 사회 중추세력으로 성장한 사회는, 그 사회의 작동 메커니즘에 대한 성찰이나 이상 사회에 대한 사유를 권장하는 대신에 주어진 규칙에 따를 것을 일방적으로 요구하게 될 테고, 그 속에서 무감각, 비정의 관리층이 위와 아래를 자동적으로 조절하는 현상이 만연하리라는 것이다.
나는 듣고 또 한 사람이 말한다. 이런 청년들이 지금 목하 학교 체제 아래서 성장하고 있는데,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이른바 루저 의식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루저라니? Loser. 패배자로서의 의식 같은 것 말이다. 지금 젊은층을 들여다보면 공부 잘 하는 아이도, 잘 사는 집 아이도, 그 루저 의식에 감염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을 루저라고 인식하는 절박감 속에서 어떻게든 그런 상태에서 빠져나와야 한다거나, 어떻게 해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고통스러운 심리가 작용하고, 이 때문에 타인이나 주변에 시선을 돌리고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공고해서 다른 방식으로는 진화할 것 같지 않은 세계에 어떻게서든 적응해서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바로 지금의 기성세대 그 자체일 것이다. 만약 젊은 세대가 루저의식을 가진다면 그것은 윗세대의 의식에 감염된 탓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루저의 루저들은 삶을, 사회를 미래적으로 펼쳐가기에는 언제나 무거운 지붕이 짓누르고 있는 부담감에 시달린다. 어떤 슬픔과 원한으로 인해 구성원들은 유대와 결속보다 불신과 고립의 감정에 더 익숙해진다. 상호 원조를 통해 사회의 진보를 이루어가는 대신 경쟁과 도태로 이끌어지는 사회는 윤기가 부족하다. 물질이 상대적으로 풍부하다 해도 그것이 정신의 건조함을 메워줄 것 같지 않다. 좋은 학교에, 좋은 직장에 가도 이미 루저가 되어 있을 청년들을 상상하는 산행객들의 저녁 자리는 우울했다. 윗세대의 사회운영 원리보다 나은 메커니즘 속에서 삶을 영위하게 할 수 없나?
비록 이름이 높지 않을망정 대학에 들어간 젊은이를 축하해 주자면서 우리 3인은 서울 주점에는 오로지 한 가지밖에 없는 승리한 막걸리 잔을 높이 치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