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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과 페미니즘

등록일 2014-04-10 02:01 게재일 2014-04-1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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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교수·국문학

나혜석(1896~1948)은 최초의 한국근대 여성 화가였다. 그녀는 매우 똑똑해서 일찍부터 공부에 두각을 나타냈다. 서울 진명여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 도쿄 사립 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

그러나 재주 많은 사람의 운은 그다지 좋게 타고 나지 못하는 법인가 보다. 그녀는 게이오대학에 유학했던 최승구와 연애했으나 그는 조혼하여 아내가 있었고, 또 폐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나혜석은 그가 죽기 직전 고향에서 정양 중인 최승구를 방문하여 열흘 가량 머물렀는데,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사랑하는 사람이라 해서, 아무리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이라고 해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일들 때문에 아마도 나혜석은 통상적인 결혼은 할 수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그는 1920년 4월10일에 오빠 나경석의 친구인 김우영(1886~1958)과 결혼했는데, 이것은 예술의 길을 걷기 위한 현실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그는 교토제대를 졸업한 변호사에 일본 외무성 외교관이 되기까지 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1927년 6월19일에 나혜석은 세 아이를 시가에 맡겨두고 구미 시찰을 떠나는 남편을 따라 소련을 거쳐 프랑스 파리로 갔다.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를 여행했고, 파리에서 야수파 화가 비시에르의 화실에 다니며 그림을 공부했다. 이때 남편 김우영은 법률 공부를 위해 독일에 잠시 가 있었는데, 그 사이에 천도교 지도자인 최린과 만나 급기야는 그해 11월20일에 셀렉트호텔에 함께 투숙하게 된다.

한 달 후 나혜석은 남편이 있는 베를린으로 갔고, 이탈리아, 영국 등을 여행하고 이듬해 8월에 파리로 돌아왔다. 9월에는 미국으로 건너갔고, 거기서 시카고, 로스앤젤레스 등을 거쳐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타고, 하와이, 요코하마, 부산 여정으로 1929년 3월12일이었다.

조선에 돌아오니, 최린과의 연애 사건이 떠들썩한 스캔들이 되어 있었다. 1930년 내내 스캔들과 남편의 이혼 요구에 시달리던 나혜석은 그해 말인 11월20일 끝내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어주고 만다. 그 후 나혜석의 삶은 간난신고의 그것이었다고 해야 한다.

남편으로부터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쫓겨나온 나혜석은 여관의 투숙객으로 살아가야 했다. 1932년에 나혜석은 금강산 해금강에 가서 그림을 30, 40점이나 그렸는데, 집에 불이나 10여점밖에 건지지 못했다고 한다. 몸이 좋지 않아진 그녀는 1933년경에는 수전증으로 왼팔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가 되었다. 1934년에 그녀는 최린을 상대로 정조 유린의 위자료로서 1만 2천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으니, 그 생활난과 심리적 불안 상태, 복수욕 따위를 능히 짐작케 할 만한 사건이었다.

그 후로도 남편 김우영이나 한때의 애인 최린은 건재했으나 나혜석은 방랑과 가난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가야 했다. 1935년에는 수원, 1937년에는 김일엽이 머물고 있던 수덕사 견성암 아래 수덕여관, 1938년에는 해인사 아래 홍도여관, 1939년에는 다시 수덕여관, 1944년에는 수덕여관을 떠나 서울 오빠 집으로, 양로원으로 전전한다. 1947년경에 나혜석은 안양에 있었다. 1948년 12월10일, 그녀는 서울 원효로의 시립 자제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10년 결혼 생활은 어떤 것이었을까? 나혜석은 끝내 현실적인 생활에 안주하지 못하고 결혼의 울타리 바깥으로 잠시 외출했던 탓으로 끝내 사회로부터 `추방`당한 여성이었다.

그러면 이 `추방`은 정당했을까? 나혜석 생일이 다가오는 지금,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어찌 되었든 화가이자 문필가였던 나혜석의 불행한 삶의 편에 서야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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