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어제다.
아침방송에 김복동 할머니가 출연했다. 이금희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프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올해 89세. 열다섯 살 나이에 위안부로 끌려가 고귀한 생명을 짓밟힌 그 분이 텔레비전에 나와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정부가 앞장서서 해결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오늘, 한국의 외무부장관이 처음으로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공식 제기한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위안부 문제를 직접 언급하는 대신 우회적인 표현을 써왔으나 이번에는 직접적이면서도 명시적인 표현을 담아 국제사회의 지지를 이끌어냄과 동시에 일본정부가 문제해결에 나설 것을 촉구하리라는 것이다.
며칠 전 일본의 문부과학성의 사쿠라다 요시타카 부대신은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 운운은 거짓말이자 날조라고 떠들었다.
한국 정부가 이렇듯 최근 들어 계속되고 있는 일본 정부쪽 도발에 대해 대응 수위를 높이기로 했다는 것이지만, 국민적 감각으로는 아직도 우리 정부가 역사 문제를 미온적으로 처리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지난 십 년 가까이, 국내에서는, 한·일 근대사 관계를 둘러싸고 이상한 인식이 일로 확산되어 왔다. 그 가장 단적인 예가 바로 역사교과서 문제의 처리다.
이른바 교학사 교과서를 둘러싸고 정부 일각에서는 마치 그것의 채택 여부가 교과서 제도의`정상성`여부를 판단하는 척도라도 되는 듯이 움직인 느낌이 없지 않았다. 그런 흐름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의 채택은 거의 무산되다시피 했지만, 그러자 이번에는 장노년층의 보수적인 계층들에 호소해서 책을 사주자는`운동`을 벌이고 있는 징후들이 보이기까지 한다.
도대체,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 것이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식의`자학적`논리를, 우리 학생들이 배우고 떠받들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런 수치 경제학은 지나간 일제강점사를 몰인간적 시각으로 재단하게 한다.
텔레비전에 출연한 김복동 할머니는 그녀가 경험한 일제말기가 어떠했는지 증언했다. 그것은 폭력과 강제와 동원과 협박으로 점철된 시대였다.
또, 작가 최인훈은 장편소설`화두`에서 그가 경험한 해방 전 시대가 육체에 가하는 폭력의 시대였음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어디서나 때렸다는 것이다.“일본 점령자들은 그것이 군대건 경찰이건 면사무소건 심지어 병원 진찰실에서건 자기 권위 아래 놓인 불쌍한 피점령자를 그것이 노인이건 갓난아이건, 남자건 여자건, 건강한 사람이건 아픈 사람이건, 사회적으로 지위가 있는 사람이건 없는 사람이건, 무엇보다 먼저 귀싸대기를 눈에서 불이 번쩍 나게 올려붙이고 동시에 발길로 내지르고 보는 것이 기본동작이었다.”(2002년판`화두`1, 40쪽)
매일“귀싸대기”를 얻어맞더라도, 철도 연장이 늘어나고, 곡물생산량이 늘고, 학교들이 무척 지어졌으니 좋은 게 아니냐는, 기이한 양자택일 논법을 왜 우리 학생들이 받아들여야 하나?
일본 쪽에서도 이른바 우익교과서라는 후소샤 교과서가 제작되어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지만, 그것은 그래도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를 가리고 호도한다는 점에서 일본의 자기 본위라는 명분에 만큼은 기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우익`교과서는 이상한`자학사관`에 물들어 있다.
역사를 상고해 볼 때, 해방 후 분단과 대한민국의 단독 수립은 불가피한 국제적 과정의 산물이었다. 이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오늘 여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강하게 긍정하는 것이 왜 일제의 식민통치를 수긍하는 것에 연결되어야 하나?
정부는 지난날의 소극성을 버리고 일본에 물을 것은 물어야 한다. 따질 것은 따져야 한다. 한맺힌 위안부 할머니들의 인권을 지금이라도 지켜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