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나는 일본에서 출판된`이광수 장편소설 연구`라는 책의 한국어판을 내는 일에 나날을`빼앗기고` 있다.`빼앗기고`는 있으나 이것은 물론 만해 한용운이 시에서 자신은 자유보다 복종을 좋아한다고 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스스로 나서서 시간을 투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일본의 여성 한국문학 연구자가 쓴 것인데, 일종의 한국판 `다윈의 플롯`이라 할 만하다. 내용인 즉슨, 이광수의 장편소설들, 특히 `무정`이며, `재생`이며, `흙`이며, `사랑` 같은 작품들 속에는 서구 진화론, 퇴화론 담론들을 의식하면서 시대의 약자이자, 퇴화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조선 민족의 생로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입증해 가는 저자의 태도는 아주 성실하고도 집념이 강해서, 당대 일본에 수용된 진화론, 퇴화론 줄기들은 물론이고, 서구와 북미의 이 담론의 흐름을 다양하고도 복합적으로 조명하면서, 이것이 이광수 문학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가를 치밀하고도 광범위하게 서술해 나간다.
그러면서 저자는 한국의 현대문학 연구자들에게 묻는다. 왜 당신들은 한국의 근대문학인들을 일본과의 관계라는 협애한 틀 속에 묶어두려 하십니까? 그 시대의 한국문학인들은 일본과의 관계틀을 넘어서는 근대문학의 길을 개척하려고 고심참담한 길을 걸었고, 그러한 문제의식 때문에 일본어 아닌 외국어를 숙달될 수 있을 정도로 공부해 나갔건만, 왜 당신들은 그런 선배 문학인들의 고민을 조명하는 대신 일본에서 가공된 문학사 이론이나 담론에 값싸게 의존해서 그들을 설명하는 데 만족하고 계십니까?
이광수문학은 저자가 식민지 시대 한국문학에 대한 자신의 판단과 평가를 뒷받침하기 위해 선택한 재료로서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이 재료는 정작 우리 한국 사람들에 의해서는 손쉬운 이데올로기적 재단의 대상일 뿐인 경우가 많은데도, 저자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광수 소설 텍스트들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집요하게 몰고 나가고 있다.
나는 이 저술을 처음부터 끝까지 세 번씩이나 읽고, 저자 스스로 번역한 문장을 다듬고, 문장과 어휘의 약물들을 바로잡고, 한국에서 불필요하거나 반대로 필요한 표현들을 빼고 넣고 하면서, 내 자신이 지금 좋은 경험을 하고 있음을, 단순히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게 결코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지난 몇 년 동안 내가 접해본 한국문학 연구서 가운데 가장 주밀한 책이고, 그때문에 나는 지금 어떤 태도로 일하고 있는가를 심각하게 되돌아보게 하는 책이었다.
그로부터 생각하게 되는 것 하나는, 과연 일을 일답게 한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일본에서의 출판 부호들과 한국의 그것은 유사하면서도 달라서 숱하게 많은 것을 바꾸고 뒤집고 하면서도 나는 기꺼이 때려도 때려도 머리를 내미는 너구리들 같은 교정, 교열 거리를 기꺼이 잡고 또 잡고 한다.
왜냐. 이 책의 저자가 한국문학에 보여준 성의만큼의 대가를 나 또한 이 책에 되돌려주고 싶은 까닭이다.
연구나 공부도 하나의 일이라고 보면, 일을 일답게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이 저절로 움직일 정도로 일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 사회에는 그런 일다운 일꾼들이 많아져야 한다. 출판에 관심을 갖다보면 교정, 교열에도 숱한 급수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이 분야에서 최고라는 평가를 듣기는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이나 어려운데, 왜냐하면 이 분야는 그 최고의`달인`이 될 때까지 결코 만족스러운 보상을 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런 이들이 있다. 그런 이들을 존경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나는 우리에게 일꾼다운 일꾼들이 더 많아지기를 고대해본다. 이 혼란스러운 현대사회를 정돈해 줄 이들은 바로 그 장인들일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