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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대, 어떤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하나

등록일 2013-02-28 00:09 게재일 2013-02-28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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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소설이라는 말은 그 쓰임이 아주 오래되었다. 옛날 중국에서부터 쓴 말이다. 그때 소설이라는 말은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되었다.

하나는 역사적인 서술 가운데 믿을만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말한다. 제왕이나 영웅들의 이야기는 정사 속에 들어가는데 반해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긴요치 못한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을 써놓은 것이 소설이다.

다른 하나는 사상 가운데 중요치 못한 것들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다. 중국은 풍요로운 사상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유가니, 도가니, 법가니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그런 사상의 계보 가운데 소설가라는 게 있다. 이것은 말하자면 어엿하지 못한 사상이다. 그럴 듯한 체계도 없고 힘써 의지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런 사상가가 바로 소설가다.

그러니까 고대 중국에서 소설이니 소설가니 하는 말은 다 하급의, 중요치도 않고 믿을만하지도 않은 역사적 기술이나 사상을 가리키는 뜻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소설은 그 나름의 존재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오늘날로 치면 나는 그것이 일종의 문화의 숨통이었다고 생각한다.

잘 짜여진 역사적 기술의 방법과 체계, 또 잘 구비된 사상적 체계들에 들어가지 못하는 모든 것이 다 소설이 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소설은 일정한 형식을 주장하지도 않고 특정한 내용을 지칭하는 것도 아니었다. 체계 바깥에 잉여물로 존재하는 게 바로 소설이었고, 바로 그 잉여적인 성격 때문에 소설은 세월을 두고 이어져 오늘에 와 닿을 수 있었다.

나는 우리 문화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우리 문화는 마치 소설과 같이 어떤 특정한 체계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은 것들, 잉여적인 것들에 고루 역할과 의미를 부여해 주어야 한다.

사실, 문화라는 말의 용례가 어떻게 보면 소설의 용례와 비슷하다. 문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삶의 양식이다. 그런데 이 삶의 양식은 정치니, 경제니, 사회니 하는 것들로 나뉜다. 법률이니 예술이니 하는 것들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문화는 그 모든 것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그것들에 포괄되지 못하고 남게 되는 그 모든 것이다.

그래서 문화는 아주 고급한 것도 있을 수 있지만, 아주 저급한 것도 문화가 될 수 있다. 또 균형과 질서, 통일을 이룬 것은 응당 문화가 되지만, 찌그러지고 혼란되고 어수선한 것도 문화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들 삶의 본질은 잘 만든 문살처럼 규격을 가진 데 있지 않다. 우리들의 마음 세계를 보라. 과연 조화로운가? 우리들의 몸을 보라. 과연 고요하기만 한가? 우리들 사회를 이루는 사람들의 삶은 고전주의적 질서를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것에 합류될 수 없는 잉여물들을 가진다.

나는 이 잉여물을 잘 다룰 줄 아는 문화가 진짜 좋은 문화라고 생각한다. 잉여에 관대한 문화, 잉여를 허용하는 문화, 잉여 때문에 더 재미있게 살 수 있게 되는 문화가 좋은 문화인 것이다.

소설이 교훈적이기만 하다면 왜 사람들이 그것을 읽게 될까? 소설엔 사랑이 있고 욕망이 있고 혼란과 비밀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손을 탄다. 문화도 마찬가지다. 만약 어떤 문화가 스파르타식 체계만을 고집한다면 그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질식될 수밖에 없다.

옛날에 나는 어떤 소설이어야만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지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각각의 소설가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그러나 그 안에 자기 세계를 철저하게 쌓아올린 소설이라면, 다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떤 소설을 좋아한다면 다른 사람은 다른 소설을 좋아할 수도 있어야 한다.

관용과 허용, 그리고 자유. 새 시대 문화는 이런 덕목들을 구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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